지난 1년간, 윤석열 대통령의 통치는 한국 정치의 문법을 여러 곳에서 바꿔놓았다.
먼저 대통령의 말과 행동에서 최소한의 품격과 책임이 사라졌다. 되는대로 말하고 되는대로 행동한다. 거침없고 부끄러움이 없다. 이것은 무치(無恥)의 정치다. 한때 노무현 대통령의 거침없는 언행에 논란이 있었지만, 거기에는 기득권과 권위주의를 타파하려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 권위주의의 강고한 벽을 허물기 위해 얼마간의 오해와 파격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공적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정치 행위였고, 대통령이라는 지위에 덧붙여진 과거의 권위주의적 색채를 상당 부분 일소했다. 반면 윤석열식 정치에는 어떤 의도나 목적도 없다. 대통령이라면 아무렇게나 행동할 수 있고, 어떤 객관적 근거 없이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다는 방종을 보여줄 뿐, 여기에는 정치적이라고 볼 만한 행위가 없다.
또 다른 놀라움은 대통령이 통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통치욕이란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사적 치부가 아닌 공적 행위를 하게 하는 동기부여 수단이다. 나라를 잘 경영해보려는 욕망이야말로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이는 종종 권력욕으로 비난받기도 하지만 좋은 의미에선 명예욕이기도 하다. 자신의 노력으로 잘 통치되는 나라를 보면서 보람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모든 권력자가 꿈꾸는 일이다. 적어도 그런 보람을 원하는 사람은 독재자가 될지언정 폭군은 되지 않는다.
역사에선 종종 통치에 관심 없는 왕이 등장하기도 했다. 통치에 관심이 없는데, 다만 그 지위를 물려받는 경우다. 이런 일은 민주주의에선 거의 생기지 않는다. 권력자 지위를 차지하는 데 상당한 수고가 들고, 통치욕이란 동기부여 없이는 이 여정을 헤쳐나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이 바로 이 드문 예에 속한다. 윤 대통령은 다만 모욕을 씻고 복수하기 위해 출마했고, 그를 지지한 국민도 다만 그러기를 원했기에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당선됐다.
그렇게 당선된 대통령은 ‘대통령 놀이’에 열중할 뿐, 나라를 통치하는 일엔 별 관심이 없다. 여러 차례 반복된 외교·안보 분야의 실책은 물론이고, 2022년 여름 홍수나 10·29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대통령의 태도에선 국정에 대한 어떠한 책임감이나 통치에 대한 최소한의 호기심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로써 우리는 민주주의에서 통치에 관심 없는 대통령을 둔 해괴한 상황을 맞았고, 무치(無治)의 정치라는 새 영역을 접하게 됐다.
또 다른 큰 변화는 정당정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겠지만, 한때 한국 정치에서 ‘협치’란 말이 유행했다. 정부와 여당은 야당을 국정 파트너로 존중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국민이 이를 민주주의 이전에 통치의 기본 요소라고 봤기에, 야당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대통령은 심지어 독재정권 시절에도 지지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국정지지율이 낮거나 국가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대통령은 야당 당수를 만나 협력을 요청했고, 야당 역시 명분상 그것을 거부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경쟁과 타협이 병존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든지, 그럴 필요가 없다든지 하는 판단의 결과는 아니다. 그저 하지 않을 뿐이다. 여론을 신경 쓰지 않는 무치, 통치하지 않는 무치의 경지에 있기 때문에 애초 관심이 없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 사라진 게 협치가 아니라 정당정치 자체라는 점이다. 이 점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대통령과 여당의 관계다.
막바지로 치닫는 여당의 전당대회를 사람들은 ‘지명대회’라고 부른다. 지난 1년 동안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무엇인가 한 것이 있다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를 쫓아내고 자기에게 충성하는 사람으로 여당을 채우려는 것 하나뿐이었다. 대통령은 정말 집요하게 이 일에 매달렸다. 대통령은 왜 이렇게 노골적으로, 또 공격적으로 ‘윤심’을 작동하는 것일까? 이유는 무치의 정치와 같다. 모욕을 갚기 위해서다.
모욕을 갚기 위해 나선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당시 후보는 나이가 한참 어린 이준석 대표에게 모욕당했다. 잠적해버린 이 대표를 울산까지 찾아가 억지로 화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법시험 기수가 한참 아래지만, 나이가 어린 선배 검사들 앞에선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던 대통령이다. ‘젊다 못해 어린’ 정치인에게 ‘내부 총질’을 당했으니, 이 굴욕을 반드시 갚아야 했다. 그래서 다른 일에는 별 의욕이 없는 대통령이지만 당대표를 내 사람으로 앉히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대통령이 이 일에 얼마나 집중하는지를 잘 생각해보면, 경선을 돕지 않고 경기도지사 출마도 거절했던 나경원이, 다만 오랫동안 친분이 있다는 것만으로 당대표에 도전하려던 게 얼마나 무모한 일이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지명대회’는 윤석열이라는 한 개인의 독특한 스타일에서 빚어진 우발적인 사고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비웃고만 넘어갈 수 없는 중대한 함의가 숨겨져 있다. 이는 한국의 정당민주주의가 한 세대 이전으로 퇴행한다는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윤석열은 과거 한국 정치가 이뤄낸 그 무엇, 오랫동안 금기시되던 민주주의의 기둥 하나를 무너뜨리고 있다. 그것은 협치라는 말처럼 가물가물하지만, 과거 한국 정치에서 대통령을 탄핵시킬 만한 근거가 되기도 했던 ‘당정분리’라는 금도다.
민주화 이전, 여당은 대통령의 사당이라 부를 만했다. 아니, 그냥 사당이었다. 지금은 대통령님이나 당대표라는 말이 자연스럽지만, 한 세대 전만 해도 대통령은 ‘각하’였고 당수는 ‘총재’였다. 그리고 대통령과 총재는 말 그대로 일체였다.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민주정의당의 역대 총재는 딱 두 명이다. 전두환과 노태우.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대통령이 당총재를 겸임하는 전통은 깨지지 않았다. 민주자유당과 신한국당의 총재는 김영삼, 그리고 대통령 후보이던 이회창뿐이다.
대통령이 총재를 겸하는 건 단순히 정당 내부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런데 왜 이것이 민주화 이후 심각한 논란이 됐을까? 제6공화국 헌법을 만드는 개헌 과정에서 권력분립이라는 헌법정신이 새롭게 조명됐기 때문이다. 헌법정신에 따르면 행정권력과 입법권력은 형식적으로 구분돼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이 국가원수에 행정부 수장을 겸하는데, 당총재를 맡아 여당 내에서도 공천권을 비롯해 당의 모든 최종결정권까지 행사하면, 행정부 수장이 사실상 입법부까지 장악하니 헌법정신에 위배된다는 비판이었다. 이렇게 당정분리는 정당 민주화의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이는 단순히 학자 사이에서 논란이 된 이론적 문제만은 아니었다. 오랜 독재 통치에 이어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에서도 여당 의원들의 대통령 눈치 보기와 무조건적 충성이 이어지는 것에 국민적 불만이 적지 않았다. 민주화는 됐는데 정당정치는 민주적이지 않았던 셈이다. 많은 사람이 1인 통치의 권위주의적 문화가 이어지는 구조적 원인인 총재 정치를 종식하고 정당민주주의를 가져올 방안은 당정분리뿐이라는 주장에 동의했다.
당정분리 주장이 실현된 계기는 민주화가 아닌 정권교체였다. 김대중 새천년민주당 총재는 통치와 당 운영의 측면에서 이전과 다른 면모를 보여주려 했다. 실제로는 집권 후반기를 제외하면 내내 실권을 놓지 않았지만, ‘직접 통치’보다는 김중권·한광옥 같은 지명직 대표최고위원을 보내는 ‘대리 통치’를 시행했고, 나중에는 정대철·박상천 같은 선출직 대표최고위원이 일정 지분을 행사하기도 했다.
한국 정치에서 실질적인 당정분리가 시작된 계기는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정치’가 끝난 2002년 대선이었다. 당시 여야는 모두 정치개혁의 중요한 화두로 당정분리를 들고나왔다. 이회창에게 당정분리는 김대중의 총재 정치를 비판하는 데 유용했고, 노무현이라는 새로운 세대의 주자는 정치개혁을 더 강하게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은 당정분리를 실행에 옮겼다. 대통령이 당의 총재나 대표를 맡는 시대는 끝났다. 당원이 선출하는 당의 대표는 대통령의 지시나 지휘를 받는 자리가 아니라 독립적 정당의 대표로 인정받았다. 대통령은 여전히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어쨌거나 형식적으로는 당내 문제에 관여할 수 없었다.
새 관행이 생기자 대통령이 여당에 관여하는 행위가 ‘당무 개입’이라는 부정적 용어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해명한 논리도 ‘당무 개입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대통령의 당무 개입이 비민주적일 뿐 아니라 불법적이라는 근거 또한 생겨났다. 공천 과정에 대통령이 개입하면 공직선거법상 ‘공무원 등의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 금지’(제86조) 조항이 적용된다는 발상이 가능해진 것이다. 당내 선거와 관련해 2010년에는 ‘공무원의 당내 경선운동 금지 조항’(제57조)이 신설되기도 했다. 실제 두 조항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이른바 ‘새누리당 공천 개입 사건’에 적용됐다. 당시 검찰은 “박 전 대통령은 친박 당선을 위해 4개월 동안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기는 등 조직적·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혐의점을 밝혔고, 재판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유죄를 선고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정분리도 논란을 일으켰다. 2004년 2월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이 문제가 됐다. 노 대통령은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기대한다. 대통령이 뭘 잘해서 열린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 하고 싶다”고 말했고, 이는 탄핵안 발의의 빌미가 됐다. 실제로 논란이 된 조항은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 의무’(공직선거법 제9조)였지만, 사람들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 명분은 노무현이 스스로 약속한 당정분리를 어긴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최근 한 보수 일간지의 논설위원은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후반 당정분리를 후회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노 대통령은 퇴임 뒤 쓴 글에서, 책임정치와 당정분리를 구분했다. 당정분리를 중단한다는 것은 ‘대통령이 당총재가 되고 공천권을 갖고 주요 당직에 대한 임명권을 가지는 것’이며, 이것은 ‘당이 정치의 중심이 되어 책임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탄핵에서 복귀한 노 대통령은 이 부분을 명확하게 매듭짓지 못한 게 아쉬웠던 것 같다. 노 대통령은 2007년 6월, ‘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법 준수 요청 조치로 개인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침해됐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공권력을 동원해 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안 되겠지만, 발언을 통해 누군가를 지지하는 것은 허용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2015년 박근혜 대통령이 유승민을 둘러싼 공천 파동 과정에서 ‘진실된 사람만 뽑아달라’고 했을 때, 당시 야당은 노 대통령의 사례를 언급하며 탄핵감이라고 비판했다. 이때도 역시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이 형식적인 명분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당무 개입’이었다.
당정분리를 둘러싸고 지난 30년간의 한국 정치에서 일어난 일을 돌이켜보면, 지금 윤석열 대통령의 행위는 단순히 한 개인의 일탈이라고 볼 수 없다. 이것은 명백히 한국의 정당민주주의를 한 세대 이전으로 되돌리는 행위다. 비단 한 세대라고도 할 수 없다. 하다못해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에도 ‘오치성 파동’ 같은 여당 의원들의 항명은 있었다.
그래서 지금 윤 대통령의 당무 개입은 한국 민주주의에 직접적인 위협이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한국이나 미국 같은 대통령제 국가에서 당정분리는 민주주의의 근간에 관련된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최근 대통령과 여당의 관계를 단순히 권력투쟁으로 보는 시각도 대단히 위험하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정치와 권력투쟁을 전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이야말로 민주주의와 헌정질서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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