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알라 알카이시 지음, 서제인 옮김, 글항아리 펴냄)에서 ‘예술’과 ‘배고픔’의 연결은 우리가 아는 레토릭이 아니다. 책을 읽는 것 자체가 굶주림의 고통스러운 추체험이다. 그러나 고통의 실체에 가닿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신, 소중한 독자여- 당신이 아무리 민감하다 한들, 당신의 마음이 아무리 열려 있다 한들- 이 느낌을 당신이 정말로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알라 알카이시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번역가이자 연구자이다. 팔레스타인 작가들의 문학작품을 영어로 번역해 서구 매체에 알린다. 또한 가자지구의 굶주림과 기억, 상실에 관한 영어 에세이를 직접 써서 인터넷에 올린다. 참상의 오롯한 당사자가 쓴 이 기록은 애초 선형적인 기승전결을 구성할 수 없다. 일상이 서사가 아닌 참상의 소용돌이인 탓이다. 참상은 육체에만 새겨지는 것도 아니다.
“배고픔은 몸을 집어삼키기 훨씬 전부터 언어의 뼈대를 풀어헤치고, 명료함을 지워버리고, 리듬을 해체하고, 생각의 허약한 찌꺼기들만 남겨놓는다.” 알카이시는 육체와 사유가 박리돼가는 사태 앞에서 외려 글을 일으킨다. “우리는 붕괴의 구경꾼이 되거나, 한때 우리를 붙들어주었던 것들의 기록자가 되거나 둘 중 하나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나는 계속 글을 쓸 것이다.” 그것은 안간힘이다.
안간힘을 다한 참상의 기록은 더없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이것이 인간인가’(프리모 레비), ‘숨그네’(헤르타 뮐러), ‘체르노빌의 목소리’(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연상된다.(다만, 이 작품들은 실시간 기록이 아닌 후기다.) 나아가 참상을 기록한 글을 미학적으로 향유한 독자에게 형언하기 힘든 감정과 더불어 문학의 본질을 새삼 되묻게 한다. 소설가 김연수가 추천사에서 나름의 답을 내놓았다.
“가자지구에서는 알리 알카이시가 ‘그럼에도’ 쓰고 있다. 이토록 우아하고 지적이며 아름답기까지 한 문장을 쓸 수 있는 재능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닥친 지옥 같은 현실을 말하는 데 쓰이는 게 안타깝지만, 이것이 문학의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이 책은 단행본 원서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알카이시의 글을 몇 편 한국어로 옮긴 번역가와 번역글을 본 출판사 편집자가 알카이시에게 제안해, 함께 간추리고 묶었다. 가자지구로 향하는 구호선단에 기꺼이 몸을 실었던 평화활동가들의 행위성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출판도 독서도 연대다. 224쪽, 1만8천원.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 21이 찜한 새 책

다시 만난 세계: 무질서 시대, 신질서의 설계자들
김희교 지음, 푸른숲 펴냄, 2만1천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국제질서는 명을 다했다. 제 손으로 만든 그 질서를 허물고 있는 건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미국이다. 유엔은 유명무실해졌다. 세계무역기구(WTO)도 작동을 멈췄다. 동맹은 청구서만 들이민다. 각자도생의 무질서 속에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가? 저자는 “외교의 국민주권화로 빛의 혁명을 완성하자”고 제안한다.

이성애의 비극
제인 워드 지음, 노지양 옮김, 라우더북스 펴냄, 2만1천원
이 책은 당연하게 여겨온 사랑의 방식이 왜 이토록 자주 서로를 지치게 하는지 묻는다. 연애와 결혼 안에서 반복되는 여성의 피로와 불만, 친밀감이 자주 실패하는 이유를 분석한다. ‘정상적인 사랑’으로 여겨진 관계가 왜 많은 여성에게 실망과 노동으로 돌아오는지 역사와 대중문화를 오가며 짚는다.

매일 저녁 90초를 위한 시간
심수미 지음, 클 펴냄, 1만8천원
“심수미 당신, 지옥 갈 거야.” 안면마비로 입원한 병원 침대에서 받은 협박 메일로 시작하는 책은, 태블릿피시(PC) 보도 이후 공격과 혐오를 통과한 여성 기자의 생존기다. 저자는 극우세력의 공격, 언론계의 고질적인 여성 차별, 승진과 육아의 공포를 돌아본다. 한국 사회에서 일하는 한 인간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버텨온 기록이다.

AI는 아이를 어떻게 바꾸는가
가와하라 시게토 지음, 박현강 옮김, 카시오페아 펴냄, 2만원
“인공지능(AI)이 제일 친한 친구야”라는 말이 현실이 된 시대, AI가 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여도 괜찮을까? 언어학자인 저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조건 없는 공감과 가짜 정보를 태연하게 제공하는 AI의 특징이 지적·정서적으로 미숙한 성장기 아이의 소통 능력에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해법까지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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