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민주주의에 드리운 나폴레옹의 그림자

윤석열은 비상계엄 선포 직후 수하에게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조치였다”는 메시지를 ‘우방국’들에 전하도록 했다. 허튼소리지만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자유민주주의’ 여섯 글자다. 한국에서 이 합성어는 신성불가침으로 간주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분리해서 보려는 시도만으로도 색깔 시비를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둘의 관계는 정작 적대적이다.
‘민주주의인가 보나파르트주의인가?’(도메니코 로수르도 지음, 장석준 옮김, 산현글방 펴냄)는 보통선거제를 둘러싸고 2세기 넘게 프랑스와 미국 등에서 펼쳐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투쟁사를 좇는다. 존 스튜어트 밀, 알렉시 드 토크빌 등 유명짜한 자유주의자들은 ‘1인 1표’의 원리를 부정하면서 엘리트에게 복수투표권 같은 반민주적 특권을 주라고 핏대를 세웠다. 미국 정치철학자 웬디 브라운의 말대로 그들의 자유주의에는 “노골적이고도 필연적으로 비자유가 존재”했다.
오늘날 1인 1표의 보통선거제는 대세가 됐지만, 승자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보나파르트주의’다.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나폴레옹 1세의 조카)의 정치 행적을 빗댄 개념이다. 1848년 2월 혁명을 거쳐 프랑스 제2공화정 대통령에 선출된 그는 1851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독재권력을 확립했으며, 이듬해엔 공화정을 폐지하고 황제(나폴레옹 3세)에 등극했다.
이 과정에는 보통선거라는 봉합술이 동행했다.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에 오를 때의 수단이었고, 보통선거를 제약하는 의회를 해산할 때의 명분이었다. 심지어 그가 황제에 오를 때도 국민투표를 거쳤다. 보통선거가 권력을 집중시키고 인민주권을 제약한 이 역설은 오늘날 대통령제, 양당제, 소선거구제 같은 제도로 전승됐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엘리트들 사이의 경쟁과 정권 교체의 메커니즘으로 한정됐고, 정치는 특권을 보호하고 강화했다.
저자는 이를 ‘연성 보나파르트주의’라고 부른다. “연성 보나파르트주의는 위기 상황이 닥쳐 변화가 필요해진 경우 혹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철권통치를 실시하는 강성 전시 보나파르트주의로 전환할 수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6년 11월 치를 중간선거 결과를 부정할 가능성이 점쳐지는 것도, 윤석열이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며 내란을 일으킨 것도 보나파르트주의가 민주주의의 경계 끝에 걸려 있음을 방증한다.
이 책이 이탈리아어판으로 나온 건 1993년인데, 영어판은 2024년에야 나왔다. 한국 독자 앞에는 33년 만에 도착했다. 그러나 민주주의 위기 극복이라는 과제에 영감을 제공하기에는 결코 늦지 않아 보인다. 428쪽, 2만9천원.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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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품정리사가 좋은 죽음을 묻습니다
길해용 지음, 마이라이프 펴냄, 1만8500원
유품정리사가 처음 마주하는 것은 사람의 흔적과 유품이다. 유서와 일기장, 방 한구석에 벗어놓은 운동화와 빈 냉장고 등은 보잘것없지만 어떤 서사를 품고 있다. 저자는 보호종료 청년부터 20대 여성, 독거노인, 기러기아빠, 입주자의 죽음으로 화가 난 건물주까지 총 16편의 실화를 소개하며 ‘좋은 죽음과 삶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남긴다.

재를 찾아서
하나 미쉘 지음, 이윤정 옮김, 정은문고 펴냄, 1만9천원
1995년 6월29일, 삼풍백화점이 붕괴했다. 최악의 참사를 목도한 저자는 이를 바탕으로 거대한 서사를 만들었다. 1992년 대망타워가 무너진 직후부터 2016년에 이르기까지, 24년의 세월을 관통하는 대한민국의 격동적인 현대사를 미스터리 장르의 틀 안에 녹여냈다. 소설의 주인공 ‘새’가 남편이자 대망타워 엔지니어인 ‘재’를 둘러싼 진실과 마주하며 벌어지는 이야기.

슬픔의 발견
바버라 블래츨리 지음, 제효영 옮김, 디플롯 펴냄, 1만9800원
36년을 함께한 배우자를 떠나보낸 심리학자이자 신경과학자가 상실의 심연에 빠진 자신을 들여다본 탐사 기록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뇌와 신경세포 등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인지능력 전반에 크고 작은 변화를 낳는다. ‘관찰’이란 객관성과 ‘겪음’이란 주관성이 만나 다시 과학적 인식을 얻고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이 흥미로우면서도 뭉클하게 다가온다.

저출생 우생학 사회
이주희 지음, 은행나무 펴냄, 2만2천원
한국은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도 합계출산율이 0.72 수준까지 떨어졌다. 저자는 그 원인을 국가의 저출생 정책이 시간과 금전의 여유, 사회·문화자본을 가진 ‘정상’ 부모를 선별해 지원하는 반면 ‘부모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들에 대한 지원을 줄여 출산을 경제·사회적 지위를 위협하는 선택으로 만든 데서 찾는다. 이름하여 ‘구조적 우생학’이다.

조선범죄실록
정명섭 지음, 교보문고 펴냄, 2만원
예의와 도덕의 나라, 조선의 이면에는 서늘하고 잔혹한 민낯이 존재한다. 길에서 두 발 잘린 아이가 발견되거나 명예살인과 보복살인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졌고, 거리엔 도박 중독자와 사기꾼이 들끓었다. 이 책은 촘촘한 사료의 그물망으로 건져 올린 조선의 범죄 현장을 들여다본다. 이들의 이야기가 오늘날 범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담았다.

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
노은정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1만8800원
열심히 했어도 “별거 아니었어요”라고 말하게 되는 ‘EP 문화’, 타인의 기분과 요구를 먼저 살피는 ‘피플 플리저’처럼 모호한 마음에도 이름이 있다. 심리상담가인 저자는 반복적으로 느끼면서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던 마음들을 28가지 심리학 개념과 정신분석 이론을 기반으로 풀어냈다. 알 수 없는 마음에 이름을 붙일 때 위로의 순간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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