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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두께로 읽는 건축의 세계

권력, 합리성과 민주성, 진보의 상징이었던 ‘포쉐의 공간’
등록 2026-06-19 10:25 수정 2026-06-21 10:19


건축도면을 펼치면 검게 빗금이 칠해진 영역이 있다. 설계자들도 관심을 두지 않는 ‘포쉐’(poché·포셰), 프랑스어로 ‘주머니’를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도면에 벽처럼 채워진 두께를 가리키는 말이다.

평범해 보이는 도면 기호에 수천 년간 건축을 움직여온 문법이 숨어 있다면 어떨까. ‘포쉐의 공간’(조승구 지음, 시공문화사 펴냄)은 고대 로마 건축부터 르네상스와 바로크, 현대 건축까지 포쉐를 중심으로 건축의 의미를 새롭게 읽어낸다. 로마 건축의 두꺼운 포쉐는 구조물을 지탱하는 것 이상으로 제국의 권력을 드러내는 정치적 상징이었다. 인도 타지마할의 하얀 대리석 역시 표면의 아름다움 너머 영속성과 숭고함을 경험할 수 있었던 건 두꺼운 포쉐가 만들어내는 공간의 무게 덕분이다. 반대로 무게가 가벼워진 파리 에펠탑에는 합리성과 민주성, 기술 진보를 상징하는 근대 건축의 특성이 담겼다. 저자는 포쉐를 단순한 벽이 아니라 벽의 두께와 잔여 공간, 기억이 만나는 장소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바라본다. 무심코 지나가서 놓치는 숨은 공간에 건축물이 만들어진 시대의 사회적 질서와 정치학, 철학이 담겨 있다고 본 것이다.

포쉐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했다. 과거엔 두꺼운 돌벽 속 계단이나 복도 같은 공간을 의미했다. 오늘날엔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모인 코어(건물의 중심 구조)나 전기·배관이 지나가는 설비 통로처럼 건물의 기능을 떠받치는 공간을 가리키기도 한다. 최근 디지털 건축 설계에 사용되는 데이터와 알고리즘도 새로운 형태의 포쉐로 볼 수 있다. 방대한 데이터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공간의 구조를 결정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결국 포쉐는 시대마다 모습은 달라졌지만, 건축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질서라고 할 수 있다. 건물의 겉모습뿐 아니라, 그 사이를 채우는 ‘보이지 않는 두께’가 어떻게 구성됐는지 추적해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건축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낯설지 않다. 우리는 왜 어떤 공간에선 유독 편안함을 느끼고, 어떤 건물에선 압도되는 기분을 느낄까. 오래된 건물 앞에서 느끼는 묘한 무게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저자는 그 이유가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공간의 관계와 그것을 조직하는 방식에 있다고 말한다. ‘무엇이 보이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보이지 않게 만들어졌느냐’의 시선으로 건축을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556쪽, 3만5천원.

 

권지담 기자 gonji@hani.co.kr

 

 

■ 21이 찜한 새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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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흐른다

이미륵 지음, 안삼환 옮김, 민음사 펴냄, 1만4천원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뒤 일제의 수배를 피해 독일로 망명한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고향에서의 유년 시절, 식민지 조선의 현실, 망명에 이르는 과정 등을 담고 있다. 1946년 독일어로 간행돼 초판이 매진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20세기 디아스포라 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받았다. 독일의 일부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500번째 책이다.


영화로 살펴보는 다양성 이야기

주수원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 1만7천원

신체·문화·성·인종을 주제로 한 국내외 상업영화 16편을 통해 다름과 공존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철수와 영희를 위한 사회 읽기 시리즈’ 19번째 책이다. 일상에서 차별을 경험하는 등장인물에게 자연스럽게 감정이입함으로써 한 번도 서본 적이 없는 자리에서 생각해보도록 이끈다. 교실 안에서 영화 감상과 함께 토론수업을 하는 데 교재로 활용해볼 만하다.


천재 박쥐

요시 요벨 지음, 조은영 옮김, 어크로스 펴냄, 2만6천원

박쥐에 관한 책이면서, 인간의 감각과 지식이 얼마나 좁은지 되묻는 책이다. 초음파로 어둠을 읽고, 동료와 관계를 맺고, 생태계의 보이지 않는 일을 떠맡는 박쥐의 세계를 따라가다보면 밤하늘의 어둠이 또 하나의 생태계로 열린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을 뿐, 그곳에는 이미 다른 감각과 언어로 움직이는 생명의 질서가 있다.


 

책은 죽지 않는다

이시바시 다케후미 지음, 편집부 옮김, 로버트 파우저·다카세 미나 번역 검수, 혜화1117 펴냄, 2만1천원

작은 서점들은 여전히 문을 연다. 대형 서점과 온라인 서점, 전자책과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책과 서점이 살아남는 이유는 효율이나 매출의 언어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책은 형태를 바꾸고, 언어를 건너고, 사람 손에서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며 계속 새롭게 태어난다. 당신을 만든 책은 무엇인가. 그 책은 정말 사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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