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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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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이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

‘부마항쟁기념식’ 공연곡 교체 요구 받은 가수 이랑 인터뷰
“노래 하나 뺀다는 건 저라는 사람을 치워도 되는 존재로 만드는 것”
등록 2022-12-02 17:33 수정 2022-12-07 06:36
<늑대가 나타났다>를 부르는 가수 이랑.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늑대가 나타났다>를 부르는 가수 이랑.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이른 아침 가난한 여인이/ 굶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안고/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를 울며 지나간다/ 마녀가 나타났다(합창)/ 부자들이 좋은 빵을 전부 사버린 걸/ 알게 된 사람들이 막대기와 갈퀴를 들고 성문을 두드린다/ 폭도가 나타났다(합창)/ 배고픈 사람들은 들판의 콩을 주워 다 먹어치우고/ 부자들의 곡물 창고를 습격했다/ 늑대가 나타났다(합창)/ 일하고 걱정하고 노동하고 슬피 울며 마음 깊이 웃지 못하는/ 예의 바른 사람들이 뛰기 시작했다/ 이단이 나타났다(합창)

―이랑 <늑대가 나타났다>

YH무역 여성노동자 이야기의 마무리 곡으로

최근 행정안전부(행안부)가 제43회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식에서 공연할 예정이던 <늑대가 나타났다>의 가사를 문제 삼아 가수 이랑의 출연을 막았다는 ‘검열 의혹’이 제기됐다. 기념식 준비를 맡은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은 행안부 쪽의 요구로 <늑대가 나타났다> 대신 <상록수> 등으로 노래를 바꿔달라 요청했다. 이랑과 기념식 총연출을 맡은 강상우 감독은 이를 거부하고 기념식 준비에서 빠져야 했다.

언제까지 국가기념행사에서 “저들의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상록수>)라는 노랫말만 울려 퍼져야 할까. 2022년 11월28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자택에서 이랑을 만났다.

<늑대가 나타났다>를 무대에 올리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너무 부당하죠. 저도 한 명의 시민이고 (대통령) 윤석열도 한 명의 시민이잖아요. 시민 중에 직업이 다른 것뿐이죠. 그러면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잖아요. 무슨 명찰 이름을 보고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이런 걸 말하는 게 너무 싫어요. 모든 사람에게는 똑같은 양의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해요. 만약 대통령이 (기념식에) 온다 해도 대통령 심기를 거스르는 이랑을 빼는 게 아니라, 동시에 존재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노래 하나 뺀다는 건 37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사는 저라는 사람을 치워도 되는 존재로 만드는 거잖아요.”

애초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식 섭외에 응한 이유는 뭐였나.

“강상우 감독님이 <늑대가 나타났다> 공연으로 꼭 기념식이 마무리됐으면 좋겠다며 와이에이치(YH)무역 여성노동자 이야기로 구성한 연출안을 보내주셨어요.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외친 구호는 ‘배고파서 못 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는 이야기였거든요. 제 노래가 시작부터 끝까지 외치는 게 배고픈 사람들 얘기잖아요. (가사를 보면) 부모가 죽은 자식의 시체를 안고 나타나고, 콩을 주워서 먹고, 성문 쪽으로 다가가서 우리는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고 우리 자식이 굶어 죽는 걸 더는 볼 수 없다고 외치며 끝나는 노래잖아요.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된 여성들의) 기록과 잘 맞는 노래인 거죠.”

이랑은 2017년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수상한 최우수 포크 노래 부문 트로피를 즉석 경매로 판매하기도 했다. 연합뉴스

이랑은 2017년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수상한 최우수 포크 노래 부문 트로피를 즉석 경매로 판매하기도 했다. 연합뉴스

행안부는 11월22일 검열 논란이 일자 해명자료를 냈다. “밝고 희망찬 분위기의 선곡을 검토해달라는 의견을 재단에 전달했을 뿐 검열한 사실이 없다.”

행안부의 해명은 어떻게 보나.

“행안부가 (무대에는 안 올라가더라도) ‘출연료 지급에 관해 논의 중입니다’라고 밝혔지만, 그 어떤 연락도 어느 곳에서도 오지 않았어요. 이해 안 되는 게 너무 많아요. 어떤 과정에서 (출연료) 금액이 산정되는지도 모르겠고요. 행안부가 검열한 적은 없고 밝고 희망찬 분위기의 선곡을 검토해달라고 했다는 말은 뉴스를 통해 처음 들었어요. 저는 행안부에서 공식적인 답변을 전혀 듣지 못했어요. <늑대가 나타났다>가 대체 어디가 우울하죠?”

서울 강남역 사건 직후인 2016년 5월20일 살해된 희생자를 추모하는 촛불집회에 모인 여성들이 참가자의 말을 듣고 있다. 한겨레 자료

서울 강남역 사건 직후인 2016년 5월20일 살해된 희생자를 추모하는 촛불집회에 모인 여성들이 참가자의 말을 듣고 있다. 한겨레 자료

“계속 이야기를 만들고 말을 걸겠다”

곡을 들으면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부르는 노래 같다.

“얼마든지 대답할 수 있죠. 제가 화가 많은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화낼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간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라고요. 우화적으로 가사를 썼지만요. 사람들을 늑대로 치부하고 이단이라 부르고 폭도라고 부르는 사태는 오래전에도 계속 벌어졌고 현재도 벌어지는 일이니까요.”

예전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을 대중가수가 아닌 ‘민중가수’라 말한 점이 흥미로웠다.

“<늑대가 나타났다> 노래가 현대의 민중가요라고 생각해요. ‘늑대’ 자리에 자기 이름을 넣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집회 현장에서 부르기 좋게요. 간호사들이 집회할 때도 ‘간호사’가 나타났다고 변주할 수 있는 거죠.”

이번 일을 기념식이 끝나고 나서 공론화한 이유는 뭔가.

“이태원 참사도 영향을 미쳤죠.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 시민이 폭도로 불릴 정도의 사건이 터진 거잖아요. 제 안전이 염려되니까 말을 꺼낼지 말지 걱정했는데요. 여러 사람이 계속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니까 이제 저도 해야 할 일을 할 때라는 생각을 한 거예요. 저는 제 이야기의 신념이 있어요. 이태원 참사 유족들도 나와서 자기 이야기를 하잖아요. 한 명씩 내 딸, 내 아들, 내 친구 이름을 말하면서요. 그 사람들이 거짓말할 거라고 누가 생각해요. 진실이라 보고 듣는 거잖아요. 저도 제 이야기가 진실이고 제대로 전달되기를 원하죠. 계속 이야기를 만들고 말을 거는 일이 제 사명인 거예요. 그냥 3분짜리 노래 한 곡이라기보다 제 인생이 달린 거죠.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검열 공개 이후 응원은 없었나.

“오늘은 장혜영 의원(정의당)이 전화했고요. 페미당당 친구들도 연락이 왔어요. 제가 대중가수로 불리지 않잖아요. 제가 하는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가난하거나 약자이거나 꺼내기 어려운 얘기를 갖고 있어요. (이런 일로) 생활이 확 변하는 건 없어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2022년 10월16일 열린 ‘제43주년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제공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2022년 10월16일 열린 ‘제43주년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제공

같이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노래

이랑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한 독립영화 감독이자 작가, 싱어송라이터다.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난 2016년, 여성들이 모인 집회에선 이랑의 2집 음반 수록곡 <신의 놀이>를 틀곤 했다. 노래는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로 시작한다. 반복되는 가사가 적은 노래라 따라 부르기 어려웠다. 이랑은 사람들이 행진하며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후렴구가 반복되는 <늑대가 나타났다>를 만들었다. 그는 이비에스(EBS) <스페이스 공감>에서 이 곡에 대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같이 사회를 살아가는 여러 사람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늑대가 나타났다>가 실린 3집 음반으로 2022년 3월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과 ‘최우수 포크 음반’ 상을 받았다.

2022년 10월16일 부산시민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식. 이랑의 출연이 좌절된 기념식에는 누가 나타났을까. 그날 기념식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아닌 이상민 행안부 장관이 등장했다.

부마재단 검열 사건이란

대통령 참석할까봐?

가수 이랑은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식 행사 총괄감독을 맡았던 강상우 감독과 함께 행정안전부와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부마재단)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 등을 준비 중이다. 박근혜 정부 때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맡았던 하주희 변호사가 법률 대리인을 맡았다.

부마재단은 처음 강상우 감독과 기념식을 준비할 때만 해도 감독의 자율성을 존중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부마재단 관계자는 2022년 6월30일 강 감독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 “청와대(대통령실)에서 본 기념식의 연출 방향에 대해 지시하거나 가이드를 내리지 않고 있으며 행정안전부 역시 부마재단의 행사 추진 과정에 특별한 지시나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지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43주년 부마항쟁기념식은 청와대(대통령실)나 행안부 등의 특별한 개입 없이 부마재단의 주도로 준비될 예정입니다.”

그러나 이랑의 <늑대가 나타났다> 공연 등 기념식 윤곽이 잡히자 분위기가 사뭇 다르게 전개됐다. 9월7일 부마재단과 행안부 주무관 등이 참여한 회의가 끝나고 며칠 뒤 강 감독은 이랑을 기념식에서 제외하라는 행안부 윗선의 요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늑대가 나타났다> 공연에 행안부의 압박이 있고, 기념식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함께였다.

재단 쪽은 9월24일 강 감독을 만나 <늑대가 나타났다>를 기념식 공연에서 제외하기로 했다는 재단 입장을 처음 전했다. 같은 날 이랑도 재단으로부터 행안부, 부마진상규명위의 요청으로 <늑대가 나타났다>를 기성곡으로 바꿔 무대에 서야 한다는 통보를 전자우편으로 받았다. 부마재단은 <늑대가 나타났다> 대신 <상록수>나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불러달라고 요구했다.

“예산의 목줄을 행안부에 맡기고 있다보니… 그동안 저희 메시지를 관철할 수가 없었거든요. 아마 행안부 윗선에서 중간결재 라인에 있는 사람들에게 브레이크가 잡힌 것 같습니다.”(9월26일 진현경 부마재단 상임이사와 강 감독의 통화) 곡 변경 요구를 끝까지 거절하자 기념식 공연은 무산됐다. 재단 실무진은 “선곡 변경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기에 기념식에서 강상우 감독님과 기념식을 더 진행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라는 전자우편을 10월6일 보냈다.

재단은 대행사에 사례비 협의를 넘겼고 대행사는 1700만원으로 책정된 연출비와 출연료도 700만원만 주겠다고 통보했다. 8월 초부터 두 달 가까이 밴드·시민합창단과 함께 무대를 준비하던 이랑에겐 정산해야 할 숙박비와 연습료도 적잖았다. 강 감독도 무대 연출안을 모두 짜고 시민 섭외도 마쳐놓은 상황이었다.

행안부는 11월22일 “밝고 희망찬 분위기의 선곡을 검토해달라는 의견을 재단에 전달했을 뿐 검열한 사실이 없다”며 “중도사퇴한 공연 관계자와의 정산 방식에 대해서는 기념식 행사 용역대행업체와 재단에서 현재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부산과 경남 마산의 학생과 시민이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싸운 운동이다.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함께 4대 민주화운동으로 불린다. 부마항쟁은 40주년이 된 2019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정부가 주관하는 공식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이정규 기자 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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