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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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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만 민주화, 예고된 군부 쿠데타

아웅산 수치의 승리에 환호했지만, 수십 년째 이어진 군부의 야욕 잠재울 제도·자산 부족
등록 2021-06-12 20:21 수정 2021-06-15 18:55
2016년 10월 미얀마 수도 네피도에서 국내 민족 간 분쟁의 평화적 종식과 상호 존중에 합의한 팡롱 콘퍼런스 개막식에 군부 최고 실력자 민 아웅 흘라잉 사령관(맨 왼쪽부터), 만 윈 카잉 탄 의회 상원의장, 헨리 반 티오 부통령,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참석했다. REUTERS

2016년 10월 미얀마 수도 네피도에서 국내 민족 간 분쟁의 평화적 종식과 상호 존중에 합의한 팡롱 콘퍼런스 개막식에 군부 최고 실력자 민 아웅 흘라잉 사령관(맨 왼쪽부터), 만 윈 카잉 탄 의회 상원의장, 헨리 반 티오 부통령,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참석했다. REUTERS

2011년 8월, 당시 테인 세인 대통령과 아웅산 수치 야당 대표의 비밀회담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2100여 명에 이르는 정치범 중 일부가 석방되기 시작했다. 3개월 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부 장관이 미얀마를 방문했고 이후 미얀마는 국제사회에서 그야말로 가장 ‘뜨거운’ 국가가 됐다. 하지만 미래는 불안했다. 체제 개방은 야당과 시민사회의 참여가 없는 군부 주도로 진행됐고 통치자인 군부는 정전협상, 경제활동 같은 ‘예약된 영역’을 누리는 조건부 민간 통제 영역으로 들어갔다.

정치 개입할 명분 준 개헌 추진

그리고 2015년 11월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승리하고 이듬해 3월 민간정부가 출범했을 때 국제사회는 미얀마의 민주화에 환호했다. 그러나 단숨에 여당이 된 NLD의 국정 수행력은 검증되지 않았고, 반세기 이상 지속한 군부 통치를 청산할 정치·사회적 자산이 부족했다. 지금까지 군부 쿠데타가 실패한 적이 없어 정작 쿠데타가 발생하면 이를 통제할 제도도 없었다. 이처럼 국제사회는 미얀마가 안고 있는 내적 문제에 대한 성찰보다 권력의 주체만 직시한 제도적 착시현상에 갇혔다.

군부는 정치권력을 민간정부에 위임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필요하면 언제든 다시 가져갈 의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군부는 1990년 총선 결과에 불복하고 시민을 무자비하게 다루면서 20년이나 더 집권했다. 민 아웅 흘라잉 군사령관도 2016년과 2017년 쿠데타에 버금가는 국가비상사태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헌법 11장에 국가비상사태 기준이 명시되지 않아 권력 이양의 주체로서 군사령관은 언제든 정치에 개입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정치에 개입할 명분이었고, 역대 군 지도자들의 행태를 볼 때 의향을 동기로 전환하는 계기가 치밀했다. 2020년 총선이 유권자 명부에 기인한 부정선거였다는 군부의 주장을 존중하면 2010년과 2015년 총선도 마찬가지다. 전자는 유권자 명부까지 거론할 필요 없이 명백한 관권선거였고, 행정적으로 2020년 총선도 2015년 총선보다 개선되지 않았다. 즉, 군부는 총선 과정에서의 부정이 아니라 새로운 정부에서 군부가 역할과 기능 면에서 예우를 받지 못하면 얼마든지 시빗거리를 만든다. 다만 2015년 총선 뒤 아웅산 수치가 군사령관과 회동했기 때문에 최소한 군부는 지난 5년간 정치적 행동을 자제할 각오를 했다.

그러나 아웅산 수치 정부는 철저히 군부를 외면했다. 군부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고, 군부의 경제적 이권마저 축소하려고 했다. 결정적으로 2020년 3월 개헌을 추진해 군부를 자극했다. 현행 헌법 체제에서 개헌은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군부가 정치에서 배제돼야 한다는 당위성을 국민에게 전시하는 묵언 시위였다.

‘똑똑한 사람’보다 ‘충성하는 사람’

한편, 민 아웅 흘라잉 군사령관은 자신만의 철옹성을 구축했다. 그는 이전 군사 지도자들과 달리 정치 경험이 없는 야전사령관 출신이었지만, 2016년 추가로 한 임기를 더 보장받았다. 그런 그가 2년 전부터 특정 군 인사를 승진 임명했고, 2020년 6월 러시아를 방문한 자리에서 부통령직에 상응하는 군사령관보다 더 높은 직위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 2020년 총선 전후 그의 향후 행보에 대해 다양한 분석이 제기됐다. 그가 어떻게 해서든 권력층에 남을 것이라는 전망이 공통적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퇴역을 거절한 데 이어 국가비상사태까지 선포한 것일까?

1962년 미얀마 역사상 첫 쿠데타부터 지금까지 군 수뇌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과정을 추적하면 흘라잉의 행태는 쉽게 이해된다. 1962년 당시 국방장관으로 쿠데타를 주도한 네 윈은 버마(미얀마의 전 이름)의 구성원을 군인과 민간인으로 구분했다. 네 윈은 아웅산과 함께 독립운동해서 버마의 탄생에 지분을 가졌으나, 민간 정치인으로 대표되는 우누 총리와 항상 갈등했다. 네 윈에게 우누 총리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공산주의자를 포용했고, 외국인이 경제를 주도하는 식민지 자본주의를 고수했으며, 결정적으로 불교도만 옹호해 국론과 연방을 분열시킨 원흉이었다. 이런 시각은 그가 18개월간 과도정부의 소임을 마치고 병영으로 복귀한 뒤 확고해졌는데 쿠데타 닷새 뒤 군사평의회의 기자회견문에도 그 관점이 포함됐다.

짧은 국정 운영 경험에서 자신감을 얻은 군부의 정치 개입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정치에서 성공할 수 없는 집단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군부는 1961년 선포한 불교 국교화를 폐지하고 관료사회를 군인으로 대체하는 등 군인이 중심이 되는 국가의 재구조화에 나섰다. 그렇지만 네 윈은 국가 발전보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만 천착했다. 정치적 정통성이 없는 그는 불교에 의지하는 모순으로 빠져들었다. 엄격히 말하면 네 윈은 불교가 아니라 불교가 포용한 여러 민간 신앙, 힌두교의 부산물로서 점성술 등 비술(祕術)에 의존했다. 이와 함께 그는 왕조시대를 소환했다. 혈통적으로 중국계인 그는 역사학자들을 동원해 그가 콘바웅 왕실의 혈통이라는 엉터리 연구 결과물을 생산하게 했다. 문무를 겸비한 전륜성왕(轉輪聖王·정법으로 통치하는 왕, 쎗짜밍)은 선거 같은 근대제도마저 무력화하는 최고의 정치적 자원이기 때문이다.

네 윈은 1961년 아웅 슈웨 중장에 이어 1963년 아웅 지 준장, 1976년에는 틴 우 군사령관 겸 국방장관을 쿠데타 음모설과 연루해 해임했다. 세 명 모두 네 윈의 잠정적 경쟁자였다. 아웅 슈웨와 틴 우는 아웅산 수치와 함께 NLD를 창당했고, 아웅 지는 1990년 총선에서 독자 정당으로 군부 정당과 대결했다. 네 윈 정권이 유지되는 동안 ‘루가웅 루도’(lu-gaung, lu-daw)라는 말이 생겨났다. 문자 그대로, ‘똑똑한 사람’보다 ‘충성하는 사람’이 각광받던 시대였다.

1988년 9월 친위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의 수장은 소 마웅이었고 배후에 네 윈이 있었다. 네 윈은 권력 서열 3위로 자신의 총애를 받던 킨 뉸을 후원하면서 1992년 군사평의회 의장에 오른 탄 슈웨와 부의장인 마웅 에를 견제하게 했다. 심리전 병과 출신인 탄 슈웨는 네 윈의 모든 힘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2002년 12월 네 윈은 국가로부터 어떤 예우도 받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미 그의 가족은 그해 3월부터 가택연금 중이었다.

네 번째 ‘왕’이 되기를 바란 군인

자신만의 왕국을 꿈꾼 탄 슈웨의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네 윈 족벌이 사라지자, 2004년 10월 탄 슈웨는 킨 뉸을 부정부패와 명령 불복종 혐의로 축출함으로써 1인 지배 체제를 완성했다. 나아가 그는 2005년 11월 수도를 양곤에서 핀마나로 옮기고 도시명을 ‘왕궁’이란 뜻의 네피도로 바꿨다. 미얀마 역사를 평정한 세 명의 전사왕(戰士王)을 동상으로 만들었고 그도 네 번째 왕이 되기를 희망했다. 탄 슈웨가 비술을 맹신하는 정도는 네 윈을 초월했다.

탄 슈웨는 안정적 노후를 보장받기 위해 끊임없이 인용술을 부렸다. 테인 세인 총리를 차기 정부 대통령으로 천거해, 당시 합동참모장인 슈웨 만을 견제했다. 2015년 총선을 앞두고 당시 친군부 정당 대표이던 슈웨 만을 경질했다. 슈웨 만은 신당을 결성해 2020년 총선에서 세 번째로 많은 후보자를 냈지만 단 한 석도 얻지 못해 사실상 정치생명이 끝났다. 테인 세인 대통령이 추진한 개혁·개방과 탄 슈웨 자신을 포함한 족벌의 안전한 보호를 교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면, 미얀마 군 권력층은 국가의 발전에 별 관심이 없는 집단이다.

독립 뒤 현재까지 군 최고직에 올랐다가 사망한 사람은 네 윈과 소 마웅 둘뿐이다. 건강 문제로 조기 퇴직한 소 마웅은 차치하고라도, 네 윈의 전철은 후배 군 수뇌부에 적잖은 교훈을 준다. 잠재적 경쟁자의 성장을 지켜본 뒤 냉혹하게 처리함으로써 새로운 도전의 기운마저 잠재우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보장된 제도가 끝나면 지난 시절 누렸던 권력은 어느새 누군가의 손에서 보복으로 바뀌어 되돌아오니, 그들은 절대 권력층에서 이탈하지 말아야 한다. 그야말로 권불십년은 현실이었다.

아웅산 장군 “국민이 존경하는 군대 돼야”

민 아웅 흘라잉은 지난 5년간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상상했겠지만 명확한 출구전략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권력을 사유화한 군사정부와 달리 민간정부에서 그가 여생을 걱정했다면, 이는 노욕에 찬 그의 독단일 뿐 다른 사유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군 수뇌부에 경쟁자나 도전자가 없는 상황을 직시하고, 국가의 안정과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2021년 2월1일 ‘거사’를 치렀다. 쿠데타 다음날 그는 수도 근처 사찰을 찾았고, 최근에는 한 지방의 고승에게 보시하는 모습을 공개했다. 군인이 왕이고 왕이 군인이던 과거로 돌아가려는 명확한 장면이었다.

이제 그는 선배들처럼 국가 최고지도자 자리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불구대천(하늘을 함께 이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 세상에서 같이 살 수 없을 만큼 큰 원한을 가짐)의 아웅산 수치를 영어(구금)의 상태로 만들고 NLD를 해산하는 등 그 과정에서 방해되는 사람이나 제도를 걷어찰 것이다.

1941년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 군대, 즉 탓마도를 창설하면서 “군대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국민이 명예롭게 생각하는 군대, 국민이 존경하는 군대가 돼야 한다. 만일 군대가 국민의 미움을 산다면 군대 창설의 목적은 수포가 되고 만다”고 했다. 80년이 지난 현재, 군부는 그들의 아버지가 한 말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장준영 한국외국어대 동남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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