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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OTL-숨은인권찾기] 국기에 대한 맹세, 벌써 1년

등록 2008-08-07 15:00 수정 2020-05-02 19:25

▣ 남종영 기자 한겨레 매거진팀 fandg@hani.co.kr

[인권 OTL-숨은 인권 찾기⑭]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불편했다. 종과 횡으로 학생들이 교차한 운동장, 자글대는 웃음이 잦아든 불완전한 고요의 풍경. 가슴에 손을 얹으며 드는 불편함이 어디서 비롯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우리는 습관적으로 충성 맹세를 하는가. 애국심이 충만한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 같은 성격적인 ‘아웃사이더’는 충성 의식이 불편했다. 여태껏 나는 태극기가 자랑스러운지도 모르겠고, 조국과 민족에 항상 무궁한 영광이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누가 됐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게 사무치게 싫다.
지난해 이맘때쯤 국기에 대한 맹세 존폐를 두고 거센 논란이 일었다. 재작년 이 표지 이야기 ‘국기에 대한 맹세 없애자’를 통해 맹세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본격적으로 제기하면서부터 시작된 논란이다. 이 문제를 줄곧 취재하면서 놀란 것은, 1972년 맹세가 제정된 이래 모두가 습관적으로 맹세를 외우기만 했지 단 한 번도 성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국가 상징물을 관장하는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도 맹세문의 작성자를 모를 정도였으니까.
의 도발적인 문제 제기 이후 누리꾼들은 찬반 논란을 거듭했고, 청소년 102명은 맹세 거부를 선언했고, 보수언론은 폐지론자들을 예의 ‘빨갱이’로 몰아댔다. 여론조사 결과는 시종 존치가 폐지를 6 대 4 정도로 앞섰다.
인권은 다수결로 결정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정부는 타협을 선택했다. 박정희식 전체주의를 연상시키는 문구를 일부 수정하는 선에서 절충한 것이다. 무조건 충성을 읊는 몰가치적인 문구를 살짝 바꿔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이라는 전제를 달았다. 그리고 지난해 7월27일 새 국기 맹세를 시행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서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그럼에도 문제는 남아 있다. 국가의 이익이 개인의 양심보다 우선하는가? 개인의 양심에 관계없이 충성 맹세를 강제해도 되는가? 그렇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 고백을 하라고 하고, 무관심한 사람은 내버려두면 되는 것이다. ‘사랑의 서약’을 만들어 모든 사람에게 외우게 하는 것은 국가가 개인에게 가하는 스토킹이다.
1972년 전남 오사재건교회의 주일학교 교사 양영례씨는 “국기 경례는 우상숭배이므로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이유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1973년 국기 경례를 거부한 김해여고 학생 6명은 학칙 위반으로 제적됐다. 놀랍게도 대법원은 제적 조처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2003년 의정부 영석고는 국기 경례를 하지 않겠다는 학생의 입학을 불허했다.
그리고 국기 맹세 존폐 논란의 와중에서 경례를 거부한 이용석 교사도 경기도교육청으로부터 정직 3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다. 그는 징계가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반한다며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며칠 전 이용석 교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대법원까지 가더라도 승소 확률은 많지 않다고 하더군요. 역사적인 판결이어서 꼭 이기고 싶었는데…”라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수원지방법원은 행정소송을 기각했다. 유신 판례가 되풀이된 이 판결은 기사 한 줄 나지 않았다.
‘국가를 향한 연가’는 지금도 학교에서 강제 암송된다. 한때 민감했던 전체주의에 대한 촉수도 다시 무디어졌다. 여전히 국가의 아웃사이더들은 양심권을 침해받는다. 패배주의에 빠져 묻는다. 지금 우리는 전체주의의 포근한 포박에 안주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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