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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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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적’으로 해법을 찾아라

등록 2008-07-25 00:00 수정 2020-05-03 04:25

외교·안보의 IMF 사태를 피하는 법… 남북관계의 핵심은 ‘경제교류와 협력을 통한 한반도 긴장완화’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일본에 서버를 둔 사이트(www.kcna.co.jp)에는 북한 의 기사와 논평, 사진 등이 매일 업데이트된다. 인터넷이 막혀 있는 북쪽이고 보면, 이 사이트는 사실상 의 유일한 대외 창구 노릇을 한다. 이 얼마 전 새로운 ‘메뉴’를 추가했다. 사이트 오른쪽 윗부분에 △6자회담 관련 론(논)조 △조-일 관계 개선·대일 론조 △10·4 선언 이후 동향 등 3가지를 새롭게 선보였다.

왜 6·15 선언이 아니라 10·4 선언일까

링크를 클릭하고 들어가면 각각 △북-미 관계(9·19 공동성명) △북-일 관계(조-일 평양선언) △남북관계(10·4 공동선언) 관련 문서 자료와 의 관련 보도 및 논평을 접할 수 있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이를 두고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북쪽이 보는 외교의 3가지 축을 대외적으로 선언한 셈”이라고 지적한다. 구 교수는 “북한 외교·안보 정책의 세 가지 중요 문건을 상징적으로 내비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북-미·북-일·남북 관계에서 북쪽이 뭘 중요시하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게시된 3가지 문서는 모두 상징성을 지닌다. 9·19 공동성명은 북한이 ‘정상 국가’로 가는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충실히 이행하면 미국의 테러지원국·적성국교역법에서 놓아질 수 있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또 2002년 9월의 조-일 평양선언은 북-일 관계 정상화의 청사진이다. 관계 정상화 과정에선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이 빠질 수 없다. 북쪽 입장에선 경제발전을 위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눈길을 끄는 것은 맨 아래 놓인 남북관계다. 북쪽이 그토록 강조하는 6·15 공동선언 대신 10·4 선언이 머리에 오른 것은 의미가 크다. 6·15 선언이 ‘원칙’을 말한 것이라면, 10·4 선언은 ‘이행계획’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가 파열음을 내고 있는 지금, 이명박 정부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위기’라는 말은 태생적으로 긴박감을 준다. 긴박감은 자주 실수를 부른다. 정부가 굳이 ‘위기’라는 말을 피하고 싶어하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위기’는 종종 ‘기회’가 되기도 한다. 물론 그 ‘기회’를 놓치면 곧 더 심각한 ‘위기’에 휘말리게 된다. 정부의 ‘선의’까지 의심하지는 말 일이다. ‘어떻게 하면 파국을 피하면서, 좀더 나은 쪽으로 다가설 수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현실을 따져보자. 이명박 정부는 역대 어느 정권보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좋은 환경을 물려받았다. 15년 이상 한반도 정세를 옥죄어온 북한 핵 문제가 ‘실질적 해결의 전기’를 마련한 상황에서 정권을 넘겨받았다. 정부 출범 이후에도 상황은 꾸준히 진전을 거듭했다. 북핵 문제는 불능화 단계를 지나 폐기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6자회담의 진전은 한반도 평화체제, 나아가 동북아 안보공동체의 미래를 꿈꾸게 했다.

북쪽은 이명박 ‘실용외교’에 기대감

그렇다. 크고 작은 실수와 오판, 섣부른 대응과 위기관리 부재가 이어졌다. 하지만 한반도 외교·안보의 ‘펀더멘털’은 아직까지 ‘외교·안보의 IMF 사태’를 피할 여력을 갖추고 있다. ‘구제금융’을 피하는 방법은 단 하나, 외교·안보의 ‘외환보유고’를 늘려야 한다. ‘무역수지’의 균형은 어디서 맞출 것인가? 가까이에서 찾아야 한다. 남북관계의 복원. 우리 외교·안보의 지렛대는 언제나 우리 내부에서 시작됐다.

기실 북한은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을 전후로 나름대로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따지고 보면 북쪽이 지난해 10월 임기를 고작 석 달여 남겨둔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합의한 것도 참여정부 이후를 겨냥한 측면이 크다. 예전처럼 ‘북풍’을 염두에 둔 게 아니란 얘기다. 다음 정부와 남북관계를 더욱 굳건히 만들려는 의지를 내비쳤다는 해석이 올바를 게다. 실제로 북쪽은 이명박 정부의 ‘실용외교’에 관심과 기대감을 표시했으며, 취임 이후에도 10·4 공동선언 합의 내용의 이행을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북쪽이 ‘어깃장’을 놓기 시작한 것은 지난 3월 말 김태영 합참의장 내정자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선제타격론’을 들먹인 이후부터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게다.

지난 7월11일 이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은 그런 점에서 평가할 만한 변화다. 이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과거 남북 간에 합의된 7·4 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비핵화 공동선언, 6·15 공동선언, 10·4 정상선언을 어떻게 이행해나갈 것인지에 관해 북쪽과 진지하게 협의할 용의가 있다”며, 남북 당국의 전면적인 대화 재개를 제안했다. 문제는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이란 돌발 변수다. 사건 보고를 받고도 대화를 강조했던 이 대통령은 돌연 태도를 바꿔 금강산 관광을 전면 중단시킨 채 줄곧 ‘진상 조사’만 되풀이해 강조하고 있다. 남쪽 당국자가 북쪽의 초병을 ‘조사’하겠다는 걸 북이 받아들일 리 없다. 그런 점에서 ‘진상 조사’를 앞세우는 건 스스로 자기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것과 같다. ‘진상 조사’ 없이는 남북관계가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북한전문가는 이렇게 지적한다.

“남북관계는 항상 악재를 딛고 발전해왔다.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관광이 좀더 안전하고 쾌적한 관광으로 가는 데, 이 불행한 사건을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라도 남북 당국 간 대화를 재개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으로선 진상 조사를 강조하지만, 일단 당국 간 대화를 재개한 뒤 이 문제에 대해 북한이 유감을 표명하고 재발 방지책을 함께 마련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기왕에 빚어진 참극을 중단된 남북 당국 간 대화 재개의 토대로 활용하는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남북관계의 핵심은 ‘경제 교류와 협력을 통한 한반도 긴장 완화’로 모아진다. 이는 이명박 정부가 강조하는 ‘실용’ 노선과도 부합한다. ‘자원외교’는 한반도 내부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중국에 진출했던 중소기업이 버마·캄보디아 등지에서 대안을 찾고 있는 마당에, 북한에 안정적으로 투자·진출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기만 한다면 ‘한국 경제의 엘도라도’가 될 수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런 게 바로 실용외교”란 게다.

진보는 터를 깔고, 보수가 과실을 따먹었다

시간이 많지는 않다. 미국은 민주·공화 양당이 전당대회를 통해 대선 후보를 공식 지명하는 오는 8월 말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대선전에 접어들 것이다. 조지 부시 행정부는 새로운 일을 추진하기 어렵게 된다.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선에 머무는 게 상례다. 내년 1월 취임하게 될 새 행정부는 적어도 6개월에서 1년가량 전임 행정부의 정책을 검토해 새로운 정책 방향을 마련할 게다. 새롭게 들어설 미 행정부의 대한반도 정책을 예단할 순 없다. 그들이 우리 얘기에 귀기울일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둬야 하는 이유다. 이봉조 전 통일부 차관은 “적어도 남북 양 정상 간에 언제든 대화가 가능하도록 만들어놔야 한다”며 “그래야 미국의 새 대통령에게 우리 대통령의 말이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보수 기민당 출신이었다. 집권 이전에는 사민당의 ‘동방정책’을 맹렬히 비판했다. 하지만 집권해선 사민당의 정책을 모두 채택했고, 독일 통일을 이뤄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며 축적된 남북관계의 인프라를 물려받은 이명박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바꿔낼 수 있는 기반을 갖고 있다. 게다가 보수층의 반발도 최소화할 수 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역사적으로 진보가 포용정책의 터를 깔면, 그 과실은 보수가 따먹었다”며 “국내적으로 보수 세력이 반대하지 않고, 동맹의 의심을 사지 않으며, 상대방도 쉽게 적대적으로 돌아설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오는 8월8일 베이징 올림픽이 개막된다. 11일에는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한다. 8월15일은 정부 수립 60주년 기념식이다. 이어 정기국회가 열려 예산안을 처리하게 된다. 18대 첫 정기국회인데다, 취임 뒤 첫 예산안 제출이니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 개원연설을 할 가능성이 높다. 조만간 대북 메시지를 대외적으로 공개·전달할 수 있는 기회가 몇 차례 있다는 얘기다. 이 시점을 놓치면 안 된다. 위기의 전면화를 막기 위해선 지금 움직여야 한다. 이봉조 전 차관은 이렇게 조언한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이른 시간 안에 대북정책 방향과 그 추진 체계를 갖춰야 한다. 금강산 문제를 당국 간 대화 재개의 계기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이 나서 ‘진상 조사’를 강조했으니 냉각기를 갖는 건 불가피하다. 그 뒤 대북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대통령이 직접 던지고, 그 후속 조치로 협의해야 할 여러 가지 안건 가운데 하나로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 문제를 담아야 한다. 당국 간 대화에서 불행한 사건에 대한 유감 표명과 재발 방지 대책을 포함시키면 된다. 무턱대고 ‘진상 조사’를 말하는 건 북한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다. 북을 당국 간 대화로 불러내기 위해선 말이 필요하다. 진정성이 담긴 얘기가 나와야 한다. 그리고 행동에 나서면 된다. 북쪽도 기다리고 있을 게다.”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한가

언제쯤이나 가능한 시나리오일까? 이명박 대통령은 7월18일 취임 이후 처음으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했다. 현대아산의 관광객 안전 조처 미흡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고, 개성관광도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말이 새어나왔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이 대통령이 “진상 조사뿐 아니라 철저한 재발 방지책이 중요하다”며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해선 당국 간 논의를 거친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이 대통령은 또 6자회담과 관련해서도 “북한의 전략은 핵보유국임을 기정사실화하려는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안타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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