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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더 무력해야 ‘인신매매’로 봐줍니까

등록 2026-02-05 22:31 수정 2026-02-11 18:06


우리나라가 2015년 12월 발효한 ‘유엔 인신매매 방지 의정서’는 ‘인신매매’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착취를 목적으로 위협이나 무력행사, 강박, 납치, 사기, 기만, 권력의 남용이나 취약한 지위의 악용 등에 의해 사람을 모집, 운송, 이송, 은닉 또는 인수하는 것.’

이 정의를 보면 인신매매가 더는 ‘사람을 사고파는 행위’만 가리키지 않고 ‘착취’를 목적으로 하는 일련의 행위로 그 개념이 확대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형법의 인신매매죄 조항은 여전히 ‘매매’만을 처벌합니다. 이 조항은 인신매매 범죄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합니다.

이는 수사기관과 법원이 과거 대법원 판례(91도1402)를 그대로 답습하는 탓입니다. 형법에 ‘부녀매매죄’가 있을 당시 나온 이 판례는 “계속된 협박이나 명시적 혹은 묵시적인 폭행의 위협 등의 험악한 분위기로 인해 보통의 ‘부녀자’라면 법질서에 보호를 호소하기를 단념할 정도의 상태(실력적인 지배)에서 그 신체에 대한 인수인계가 이루어졌는가에 달려 있다”고 판시했습니다. 피해자가 무력한 상태여야 한다는 겁니다.

한국에서 가수로 활동하기 위해 예술흥행(E-6) 비자를 받고 2014년 입국한 필리핀 여성들이 외국인 전용 클럽에 끌려가 클럽 사장의 강요로 성 판매를 했습니다. 사장은 이들의 여권을 빼앗고 임금을 체불했으며, 월∼목요일 하루 3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과 요일의 외출을 모두 금지했습니다. 그런데 검찰은 2015년 10월 사장의 인신매매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들이 휴대전화를 소지했고 업무시간 외 외출이 가능했다는 겁니다.

법원도 다르지 않습니다. 피고인 ㄱ씨가 2015년 다른 피고인 ㄴ씨에게 지적장애인을 매도하고 ㄴ씨가 피해자를 자신의 주거지로 데려간 사건에서 법원은 ‘피해자가 어머니와 전화통화를 하고 동생을 만난 적이 있으므로 얼마든지 ㄴ씨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며 ㄱ, ㄴ씨의 인신매매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광주지법 해남지원 2015고합10 판결)

10여 년 전 일 아니냐고요? 다음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누리집이 2025년 8월 소개한 사례입니다. 마사지업소 업주가 타이 여성을 감금하고 성 판매를 강요한 사건으로, 경찰이 2024년 1월 인지했습니다. 업주는 ‘가족에게 네가 성매매한 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런데 검찰은 업주의 인신매매 혐의에 대해 ‘혐의 없음’ 처분을 했습니다. 업주가 선불금 상환을 빌미로 피해자를 다른 업주(매수인)에게 인계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스스로 이동할 업소를 알아보고 매수인과 직접 소통했다는 겁니다.

피해자의 취약한 지위를 고려하지 않은 이 사례들은 우리나라가 의정서에 2000년 12월 서명하고도 2013년 개정 형법에서 인신매매를 의정서에 맞게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인신매매죄 조항을 이대로 두면 피해자는 존재하는데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는 비정상이 계속될 겁니다. 우리나라 국격에 맞지 않습니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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