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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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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스케이트 탔던 동료 선수들, 그루밍 성폭력에 침묵하는 이유

자신도 성폭력 피해 겪었거나 폭로해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 좌절
등록 2025-12-04 22:08 수정 2025-12-10 11:38


“제가 얘기를 해도 뭐가 바뀌나요?”

ㄱ씨는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해달라’는 말에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2025년 9월17일 서윤지(30·가명)씨가 자신을 성폭행했던 코치에게 흉기를 휘두른 현장에 있었던 몇 안 되는 목격자 중 한 명이다. 학창 시절, 서씨와 함께 서울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국가대표의 꿈을 키웠던 ㄱ씨는 사건 당시 충격을 받아 과호흡으로 병원에 실려갔다고 한다.

엘리트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였던 서씨는 한겨레21을 만나 고등학생 시절 코치로부터 갖은 모욕은 물론, 폭행과 성폭행을 당했던 과거를 털어놓았다. 대학에 진학한 뒤 뒤늦게 피해 사실을 확인받고자 법적 절차를 밟았지만, 검찰은 성폭행 혐의를 놓고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13년간 울분을 가슴속에 담고 살았던 서씨는 ㄱ씨와 대화를 나누다 우연히 코치를 발견했고, 코치에게 자상을 입혀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윤지를 엄청 잘 안다고 할 수 없어서 지금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거듭된 요청에도 ㄱ씨는 말을 아꼈다. 몇 초간 침묵이 흘렀고 ‘이 취재가 윤지씨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답하자,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그때 티브이에도 나왔는데 안 바뀌었잖아요!” ㄱ씨는 전화를 끊었다.

서씨와 함께 운동했던 ㄴ씨는 “다 그 사람(서씨) 편이 아닐 것”이라고 단정했다. 서씨가 당한 피해 정황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설명한 ㄴ씨 역시 코치로부터 “폭행당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그 사람(코치)에게 폭행당하고 바로 다른 팀으로 옮겼다”며 “나중에 코치가 합의해달라고 연락이 왔지만 합의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왜 문제 삼지 않았나’라는 말에는 “앞으로 빙상 생활을 해야 하니까”라고 답했다.

서씨의 지난 13년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주변인들은 언론을 향한 불신을 드러내거나, 신분이 노출되는 상황을 극도로 꺼렸다. 좁은 체육계, 그중에서도 폐쇄적인 빙상계에서 소문이 잘못 돌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짧은 선수 생활을 끝낸 뒤부터는 지도자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빙상장 위탁 업체와 계약하려면 사제지간, 선후배 등 각종 인맥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ㄴ씨도 현재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체육계에서 사건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누구나 가해자 엄벌을 외친다. 이때 언론 역시 집중적으로 보도한다. 하지만 피해자를 향한 관심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모두가 무대를 떠난 순간부터 피해자는 홀로 싸워야 하고, 그 책임도 혼자 짊어진다. 이런 순간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봐왔을 서씨 주변인들의 침묵은 어찌 보면 생존전략일 수 있다. 검찰에 특수상해로 송치된 서씨는 곧 법정에 선다. 한겨레21은 이후 상황도 추적할 계획이다.

장필수 기자 fe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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