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문원씨가 2025년 11월18일 오후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구역에 위치한 판금 성형 업체 사장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채윤태 기자
서울 중구 입정동 일대. 도시개발업자들은 이곳을 조선시대 다리의 이름을 따 ‘수표구역’이라 불렀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를 구역별로 쪼개 붙인 인위적인 이름이다. 이 이름을 꺼내자 “구역 이름은 잘 모르고 보통 ‘청계천 공구거리’라고 해요. 청계천 생태계의 일부예요.” 입정동 일대에서 30년 넘게 공구상점을 운영하는 강문원(65)씨가 말했다. “이 지역부터 을지로에서 청계천, 광장시장, 방산시장 등이 쭉 이어져 있어요. 자연발생적인 큰 시장이 형성된 거야. 전세계 어디에도 없는 생태계입니다.”
강씨가 운영하는 공구상 ‘두루통상’은 본래 수표구역 안에 있었지만,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지금은 철거됐다. 그는 시행사와 협의해 임시로 마련한 컨테이너 가건물 2층에서 장사를 이어가고 있다.
한겨레21은 2025년 11월18일 강씨와 함께 사라져가는 ‘청계천 생태계’의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수표구역 일대를 둘러봤다. 강씨에게 ‘자주 가던 식당을 소개해달라’고 하자 손가락으로 공사 가림막을 가리켰다. “다 저 안에 있어요.” 모두 철거됐다는 얘기다. “양미옥이니 을지면옥이니, 아니면 수표구역 쪽에 있는 식당에 갔는데 다 없어졌어요. 뭐 보여주고 싶어도 다 없어졌네.”
그와 함께 수표구역과 세운3구역 인근을 걷다보니 공사가 진행 중이라 높은 가림막이 설치된 곳이 대부분이었고, 이미 재개발을 마친 구역에는 이질적인 고층 빌딩이 들어서 있었다. 거리에는 강씨의 가게처럼 컨테이너 가건물에 들어선 일부 공구상이 보였지만, 많은 가게가 비어 있었고 창고로만 쓰이는 듯했다. “여기 있던 공구상들 다 떠나고 극히 일부분만 컨테이너에 남아 있는 거예요. 임시 가게가 너무 좁고 추워요. 컨테이너에서 화재 위험 때문에 난방기기를 틀기도 어려워.”
청계천 공구거리를 떠난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딴 데 갔다가 망한 사람도 있고, 장지동 ‘가든파이브’로 간 사람도 있고, 파주나 뭐 이런 데로 떠난 사람도 있고, 이 근처로 다시 들어간 사람도 있고 그래요.”
강씨의 공구상에서 가정용 공구는 보기 힘들었다. 대신 1m가 넘는 길이의 드라이버, 금속도 자를 수 있을 것 같은 특수 펜치, 대형 볼트와 너트 등을 팔고 있었다. 대부분은 기성품이 아닌 강씨가 다른 금속 가공업체에 맡겨 ‘맞춤형’으로 개량한 제품들이다. “이런 거 가격을 일반 손님이 들으면 깜짝 놀라. 하나에 50만원이나 하거든. 조선소에서 쓰는 거예요.” 그가 ‘이런 거’라며 가리킨 부품은 주먹만 한 ‘유압 토크 렌치 소켓’이라는 부품이었다.
강씨의 주요 고객은 공장이나 조선소 등인데, 대부분의 현장에서는 자신들의 공정과 기계에 맞는 부품이나 공구가 필요하기 때문에 강씨에게 특수 제작을 요청한다. 강씨는 주문을 받으면 기성품을 주변 정밀 가공업체에 맡겨서 고객 맞춤형 공구로 만들어 팔고 있다. 그러다보니 주변 금속 가공업체, 공구상들과의 협업은 필수다. 이게 강씨가 앞서 말한 ‘청계천 생태계’가 돌아가는 방식이다.
청계천 생태계는 세운재정비촉진지구에 포함되지 않은 충무로 인쇄골목도 포함한다. “인쇄 윤전기가 대부분 독일제인데, 대부분이 구형이라 본사에 연락해도 부품이 없다고 합니다. 주문해도 120일이 걸려요. 그런데 청계천에선 가능합니다. 치수 재고 깎아 만들어서 오리지널 부품이랑 똑같이 만들어서 기계가 돌아갈 수 있게 해줬지요. 전국에서 이게 유일하게 가능한 데가 청계천입니다.”
2019년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의 연구 결과를 보면, 청계천 산업 생태계에서 51%가 유통업, 34%가 제조업, 제조·유통·수리 혼합 형태가 15% 정도였다. 서울시 ‘세운일대 산업 특성 조사 보고서’(2020)를 보면, 제조업체의 60.3%와 인쇄업체의 83.3%가 세운지구 일대에서 자재를 조달한다. 이들이 서로 협업하면서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

공사 중인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수표구역 공사장 인근을 지나는 강문원씨. 채윤태 기자
그런데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청계천 생태계에 균열이 일어났다. 강씨의 공구상점은 2년 전 가건물로 옮기면서 매출이 70%나 떨어졌다. 맞춤형 공구와 재료를 만들어주는 협력업체들이 영등포 등 다른 지역으로 모두 떠나면서 협업도 어려워졌다. 직원 4명은 모두 그만두고 강씨만이 가끔 들어오는 주문을 홀로 처리하고 있다. “생태계가 다 무너지다시피 하고 있어요.”
수표구역은 1960년대를 기점으로 청계천을 중심으로 240여 개의 볼트, 너트, 각종 공구를 취급하는 공구상가가 밀집하면서 ‘청계천 공구거리'라고 불렸다. 이 거리에서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활황을 누리던 시절도 있었다.
변화가 찾아온 건 2006년 10월 서울시가 이 지역을 세운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하면서다. 공구산업 생태계 훼손을 우려하는 목소리, 세입자들이 밖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우려 등이 제기되면서 재개발 사업은 2021년까지 정체됐다. 게다가 2018년 말 산업 생태계 보존에 대한 대책 없이 세운3-1·4·5구역이 철거되면서 인근 상공인들의 분노와 걱정이 커졌다.
강씨는 이때 먼저 나서서 2018년 11월부터 ‘청계천 생존권 사수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아 ‘청계천 생태계 보존’을 외치며 홀로 88일 동안 천막농성을 벌였다. 이후 다른 상공인들도 참여해 돌아가면서 무려 412일 동안 농성했다. 이후 서울시, 시행사 등과 협의 끝에 임시점포 제공, 공공임대상가 등을 약속받았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직후인 2021년 9월 ‘수표구역 정비계획안’을 가결했다. 지금은 일대가 모두 철거됐고, 지하 7층~지상 33층 규모의 고급 오피스용 빌딩이 들어설 예정이다.
철거된 5-2구역 상공인 일부는 상생지식산업센터에 입주했고, 추후 세운3구역, 4구역, 5-1·3구역, 수표구역 등에도 공공임대상가가 세워질 예정이다. 하지만 여전히 기존 상공인을 수용하고 청계천 생태계를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규모다.
도시공학박사인 박은선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활동가는 2025년 9월 발간된 책 ‘산림동의 만드는 사람들’(리슨투더시티 펴냄)에 기고한 글에서 “산림동, 을지로 중부시장 일대, 을지로 및 충무로 인쇄소 골목은 과거의 산업이 아니라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산업 공간이다. 정부는 제조업이 건전한 일자리를 제공하며 혁신의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2020년 서울시가 발표한 대로 을지로 일대를 ‘도시형 소공인 집적지로 지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박 활동가는 “청계천은 자연발생적 제조 플랫폼으로 안정적 공간만 마련한다면 저렴한 비용으로 혁신의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보존’을 외치던 강씨의 바람은 현실에 부딪히며 마모됐다. “청계천 상가와 거리를 계속해서 보존, 개선해왔으면 제일 좋았을 텐데…. 이미 재개발을 밀어붙여서 진행 중인 상태인데 멈추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기왕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으니 오래갈 수 있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산업의 다양성을 갖게 하는 시스템으로 개발이 진행됐으면 좋겠어요. 두들겨 부숴 새로 짓는 게 아니라 기존의 것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다면 그쪽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채윤태 기자 chai@hani.co.kr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박준용 기자 juney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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