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9월1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열린 최말자씨 재심 선고 공판을 마친 뒤 최말자씨가 연대자들과 함께 “최말자는 무죄다”를 외치고 있다. 부산=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호랑이처럼 눈을 뜨고 지켜보면서 생명이 다할 때까지 사법을 변화시키도록 노력하겠다.” 2021년 8월 한국여성의전화가 연 온라인 대담 ‘56년을 가로지른 연대’에서 이렇게 말한 최말자씨는 그 말대로 2025년 9월10일 변화를 이끌어냈다. 1964년 18살 소녀가 2025년 79살 ‘호랑이’가 되기까지,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길을 찾고 길을 넓히며 함께 걸은 이들이 있었다.
최씨가 ‘문신’처럼 몸과 마음에 새겨진 한을 풀기 위해 방송통신대에서 만난 ‘동지’ 윤향희씨와 함께 한국여성의전화 문을 두드린 것은 2018년 12월이다. 2018년은 ‘미투’의 해였다. 그해 1월 서지현 전 검사가 안태근 전 법무부 감찰국장의 성폭력을 고발했고, 3월에는 김지은씨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을 세상에 알렸다. ‘한’을 품고 살던 최씨는 이런 ‘후손들’의 성폭력 고발운동을 접하고 분노했다. 그의 싸움이 개인적 싸움에서 사회로 확대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재심 청구가 필요했다. 최씨는 한국여성의전화와 함께 그 준비를 해나갔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송란희 대표를 중심으로 최씨에 대한 연대·지원 방법을 강구했다. 동참할 기관, 단체 등을 모으고 기자회견과 1인시위, 시민들의 탄원 및 연명 모집 등을 기획했다. 조직의 힘을 동원해 사건을 알리고 시민들의 동참을 구하며 당사자의 투쟁을 돕는 단체의 결합은 최씨의 든든한 지지 기반이 됐다. 남은 건 법적 투쟁이었다. 많은 변호사가 “너무 오래된 사건이라 어렵다”고 할 때 김수정 변호사가 결합했다.
김수정 변호사는 여성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한국여성의전화 활동을 이어가던 중 단체로부터 선생님께서 재심을 원하는 데 법률적 조언을 구해와서 깜짝 놀랐다”며 “법률가들은 다 아는 판결의 주인공, 책에서 보던 분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해결하고 싶다 하신 것 자체가 놀라웠고, 처음 뵀을 때도 아우라가 느껴져서 놀랐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지금이라도 억울함을 풀 길이 있는지, 방법이 있다면 끝까지 싸워보겠다”고 용기를 낸 최씨의 재심 청구 여정에 함께 섰다.(책 ‘아주 오래된 유죄’ 중에서)
재심은 엄격한 요건을 필요로 한다. 사실관계를 뒤집을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거나 수사·재판 절차상의 위법성이 확인돼야 한다. 문제는 최씨 사건이 재심 청구(2020년) 기준 56년이나 지난 것이라 증거 수집이 어렵다는 점이었다. 수사·재판 기록은 이미 폐기됐고, 판결문도 국가기록원에서 겨우 구할 수 있었다. 그나마 최씨의 진술이 일관되고 신빙성이 있었기 때문에 2020년 5월6일 부산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1964년 피해자 최씨에게 징역형으로 가해한 법원은 2021년 2월과 9월 최씨의 재심 청구를 기각하면서 한번 더 최씨를 모욕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모욕을 끊어낸 단초를 제공한 것은 또 다른 여성 대법관 오경미다. 2021년 9월 재항고장을 대법원에 접수한 뒤 최씨와 연대자들은 누가 재항고 사건의 주심이 될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2020년 이후 대법관이 대폭 물갈이되면서 대법원에 가해자, 다수자, 강자를 위한 판단이 이어지던 때였다.
그때 오경미 대법관이 취임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마지막 대법관인 그는 인사청문회에서부터 자신의 임명이 “여성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다양성과 다원성을 반영하고 다수결의 원칙만으로는 보호받지 못하는 소수자와 약자를 보호하라는 국민의 요구가 고려된 결과”라는 소신을 분명히 밝혔다. 비록 재항고 선고까지 최씨는 속절없이 3년을 흘려보내야 했지만, 재심 재항고 사건의 주심은 ‘운명처럼’ 오 대법관이 맡았다.
2024년 12월 대법원은 원심이 최씨 진술의 신빙성을 깨트릴 만한 반대 증거나 사정이 존재하는지 제대로 사실조사를 해야 하며, 최씨가 불법으로 체포·감금된 상태에서 조사받은 것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고, 당시 검사의 행위도 직권남용 체포·감금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하며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최씨는 이렇게 말했다. “물방울 한방울 한방울이 바위를 뚫었다는 기분으로, 너무너무 고마웠습니다.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2025년 2월10일, 부산고법은 재심 청구를 인용했다.
재심 결정 후 이번엔 검찰이 어떻게 나오느냐가 관건이었다. 사건 당시 검찰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피해자인 최씨를 괴롭힌 적극적인 가해자였다. 당시 검찰은 최씨의 행위를 정당방위로 판단하고 가해자 노아무개씨에게 강간미수까지 더해 송치한 경찰의 결정을 무시했다. 또한 당시 미성년자인 최씨가 소환장을 받고 검찰청에 간 당일 구속했고, 욕설과 폭언, 주먹질하는 시늉 등을 해가며 강압적인 수사를 이어갔다.
2025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5월에 열린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검찰은 증거조사를 위해 관련자들을 증인으로 신청하는 등 사실관계 재구성에 집중하는 듯한 행태를 보였다. 61년이 지난 사건이라 사건기록 확보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피해자를 존중하지 않는 기계적 접근이었다. 비판이 일자, 6월 2차 공판준비기일부터 검찰과 피고인 쪽은 증인 신문을 제외하고 검찰의 입증계획서, 증거제출계획서 등을 토대로 신속하게 재판을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2025년 7월23일 결심공판의 공기는 완전히 달랐다. 오전 11시, 나는 부산지법 정문 앞에서 진행한 기자회견 막바지에 352호 법정으로 먼저 들어가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10분 전쯤, 누군가 어깨를 가볍게 치며 옆자리가 비었냐고 물었다. 그를 본 순간, 오늘 검사가 무죄 구형을 할 것이라 확신했다. 한 손에 검사복을 들고 서 있던 그는 부산지검 공판부 정명원 부장검사였다. ‘외곽주의자’라 자신을 칭하는 정 검사는 공판부에서만 20년을 일했고, 그 결과 공판 검사 분야 최초로 ‘블랙벨트’(1급 공인 검사) 자격을 얻었다. 대검찰청 세미나 등에서 만난 그는 재판 절차에서 피해자 존중과 보호를 위해 고민하며 힘을 쏟던 몇 안 되는 검사였다. 그가 직접 나왔다는 건 검찰이 과오를 인정하고 무죄를 구형하며 나아가 사과까지도 기대해볼 만한 신호로 읽혔다.
예상대로 정 검사는 피고인이 아닌 ‘최말자님’이라 지칭하며 검사석에서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검찰의 역할은 범죄 피해자를 범죄 사실로부터는 물론이고 사회적 편견과 2차 가해로부터도 보호하는 것이지만 이 사건에서 검찰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작동했다. 그 결과 성폭력 피해자로서 마땅히 보호받아야 했을 최말자님께 가늠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드렸다. 깊이 사죄드린다.” 이어 말했다. “1964년 5월6일 발생한 이 사건은 갑자기 가해진 성폭력 범죄에 대한 피해자의 정당한 방해 행위로, 과하다고 할 수 없으며 위법하지도 않다. 피고인에 대해 정당방위를 인정해 무죄를 선고해달라.”
그날 법정의 분위기는 잊히지 않는다. 피고인석에서 꼿꼿하게 앉아 있던 ‘최말자님’과 변호인석에 있던 김수정 변호사의 얼굴에 스치던 수많은 감정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정 검사의 무죄 구형 후 김수정 변호사가 최후변론을 시작했다. “이 사건은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무죄가 되는 사건이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죄일 수밖에 없는 사건이 검찰과 법원의 잘못으로 오판된 것이다. 고통의 시작은 가해자였지만, 이를 가중하게 한 것은 검찰과 법원이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바로잡을 수 있게 됐다. 검찰은 화답했고, 이제 법원이 응답할 차례다.”
결국 2025년 9월10일 법원은 응답했다. 결심공판에서 ‘최말자는 무죄다’라고 외치던 연대자의 목소리를 이날 최씨가 외쳤다. “최말자는 무죄다.” 안희정의 성폭력을 고발한 김지은씨도 이날 부산에서 선고 순간에 함께했다. “제가 받은 연대의 마음을 나누기 위해 왔는데 최말자 선생님께 더 큰 힘과 용기를 받아 갑니다. 연대가 연대로, 용기가 용기로 흘러가는 우리들의 싸움에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 생존자이자 작가인 김진주씨도 함께했다. “지금도 틀리지만 그때도 틀렸다. 범죄 피해는 한순간일지 모르지만 그 피해로 인한 또 다른 피해는 또 다른 피해자에게 계속 이어진다. 그 피해의 책임은 결국 국가에 있다.” 그렇게 법정은, 용기 있는 여성들의 연대로 또 하나의 광장이 됐다.
이제 나는 기다린다. 최말자 전시회가 열리기를. 최말자씨는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면 2018년부터 그려온 그림을 모아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전시회’를 열겠다고 했다. 최말자씨의 그림에서 본 글귀가 기억에 남는다. “그럼에도 네 삶은 아름다웠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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