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여성의 날(3월8일)을 하루 앞둔 2017년 3월7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젠더폭력 근절을 위한 여성·인권단체 공동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여성폭력 근절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저 불이 꺼지면 내가 죽는다.”
2024년 9월1일, 교제폭력 피해자 ㄱ씨가 가해자 ㄴ씨를 불을 질러 살해한 혐의(현주건조물 등 방화치사)로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사건을 전하는 보도의 헤드라인이었다. 그런데 본문을 살펴봐도 ㄱ씨에 대한 불리한 정상, 즉 방화 뒤 신고하지 않았고, ㄴ씨가 술에 취해 잠든 사실을 알면서도 불을 질러 죄질이 나쁘며, 그로 인해 ㄴ씨가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는 등만 부각됐을 뿐 ㄱ씨가 당한 교제폭력이 어땠는지, 범행 동기와 연결해 그 점은 어떻게 반영됐는지 등은 알 수가 없었다.
11월20일, 이번엔 ㄱ씨의 변호인이 살인의 고의를 부인하고, 사건 당시 ㄱ씨가 심신장애 상태였으며, ㄴ씨로부터 상습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참작해달라고 주장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34년 전 아동성폭력 가해자인 송백권을 살해하고 법정에 섰던 김부남씨 사건이 연상돼 신경이 쓰였다. 때마침 11월25일 해당 사건을 계기로 설립됐던 성폭력예방치료센터가 주최한 ‘전북 반성폭력 운동 30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전주로 향했기 때문에 12월4일 열린다는 항소심 두 번째 공판부터 모니터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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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3일 전주에 도착해 일정을 마무리하고 숙소에서 계엄 선포와 해제를 지켜보며 뜬눈으로 밤을 새운 뒤 오전 10시40분으로 예정된 재판 방청을 위해 법원으로 향했다. 광주고등법원 전주재판부 형사1부(재판장 양진수)와 공판검사는 ‘부산여행 동창생 폭행 식물인간 사건’ 2심 모니터링 대상이기도 했는데, 꼼꼼하게 절차를 진행하는 편이었고, 이번 재판에서도 ㄱ씨 변호인의 정신감정 요청이 수용됐다.
방청 뒤 직접연대를 검토한 건 피고인 변호인(이한선) 때문이었다. 국선변호인이었음에도 교제폭력에 대해 성실히 조사한 뒤 적극적으로 재판에 임하고 있었다. 변호인 접촉 전 1심 판결문을 분석해보니 1심 재판부(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제1형사부·재판장 정성민)는 ㄱ씨가 당한 교제폭력을 ‘살인의 고의를 입증할 근거’(교제폭력으로 인한 앙심)로만 판단해 중형 선고를 내렸을 뿐 ㄱ씨의 교제폭력 피해나 신체·정신적 건강상태 등은 전혀 참작하지 않았다. 판결전조사를 실시했음에도 그 결과 역시 반영하지 않았다. 교제폭력 실태나 ㄱ씨의 상태, 상황 파악을 위해 변호인 접촉을 미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호남권에서 활동 중인 시민모임인 ‘비호’(비혼호남여성모임)에 연락했다.
2025년 1월 초, 비호는 변호사와 접촉하는 데 성공했다. 변호사 역시 외부 연대에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감정유치 기관이 결정되고 본격적으로 감정유치에 들어가면 협업 체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러기 위해 당사자인 ㄱ씨의 의사 확인이 필요했는데, 1월17일 ㄱ씨는 변호인 접견 과정에서 외부 연대자들에게 사건 관련 정보를 공개·공유하는 것에 동의했고, 이를 토대로 5년간 이어진 교제폭력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너무 참혹했다.
가정폭력으로 초등학교 고학년 때 가정이 깨지고, 방임과 학대에 노출되어 그때부터 술을 접한 ㄱ씨는 사회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울 정도로 알코올의존증이 심했다. 그러던 중 2019년 ㄴ씨를 만나 교제 및 동거를 시작했고, 신체적·정신적 건강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ㄴ씨는 ㄱ씨의 외부 활동을 막겠다며 목을 조르고, 소주병 등 물건까지 이용해 주로 얼굴 부위를 때렸으며, 화상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안와골절에 갈비뼈골절, 응급실 의사가 호흡부전으로 사망 위험성이 있다고 고지할 정도의 심각한 폭행이 이어졌다. 기억력 감퇴, 외시력 감퇴, 화상 흉터 등 심각한 후유증이 생겼고, 우울장애, 조현병, 불면증 등 정신건강도 위험한 상태에 이르렀다. ㄱ씨의 어머니를 통해 받은 폭행 피해 사진은 차마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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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씨는 5년간 공식적으로 23차례 경찰에 신고했다. 그때마다 경찰은 종결하기 바빴고, 지역 내 기관 연계 등 후속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ㄱ씨에게 폭행당하면서 왜 ㄴ씨를 떠나지 않느냐며 책임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다 2023년 ㄱ씨가 신고한 건으로 ㄴ씨는 상해 등으로 기소돼 합계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재판부(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강동원 판사)는 ㄱ씨가 치료 일수 미상의 심각한 상해 피해를 입었고, 엄벌을 탄원했음에도, 우발적으로 범행했고, 잘못을 반성한다며 ‘정상참작감경’까지 해서 선처했다.
그렇게 관계가 단절될 줄 알았으나 복역 중에도 편지를 보내던 ㄴ씨는 출소 뒤 다시 연락했다. 연로한 부친에게 위해가 갈까봐 두렵기도 했고, 다시는 때리지 않겠다는 ㄴ씨의 애원도 있었기에 사건 당일 ㄱ씨는 ㄴ씨 집으로 갔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빼앗긴 상태에서 또다시 목이 졸리고 얼굴 부위를 맞았다. 술에 취해 잠든 ㄴ씨 곁에 있다가 탈출을 시도했으나 주거지가 외딴곳에 있는 단독주택이었기 때문에 휴대전화가 없으면 택시조차 부를 수가 없었다. 휴대전화를 찾기 위해 ㄴ씨를 깨우면 또 맞을 것 같았던 ㄱ씨는 ㄴ씨가 잠든 옆방 이불에 불을 붙였다. 교제기간 내내 폭행당해도 주변에서 도와준 적이 없었기에 불을 지르면 신고가 들어가고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만취한 상태에서 방화 뒤 집 근처에 있었던 이유다. 그런데 이게 살인의 고의로 인정됐다.
피고인 변호인, 비호와 화상회의를 통해 사건 대응을 논하던 중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국립법무병원 등 법원이 의뢰한 기관에서 감정이 불가능하다는 회신이 온 것이다. 왜 불가능한지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는 상태로 재판부가 변호인에게 직접 감정 가능 기관을 찾아보고,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감정유치가 어렵다는 통보를 했다. 구속기한이 3월 중순 만료 예정이었기 때문에 다음 재판일(2월5일)까지 감정 가능 기관을 찾지 못하면 그대로 종결될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1월31일 변호인이 감정이 가능한 기관을 찾아 재판부에 알렸다.
2월5일, 항소심 네 번째 공판 전 본격적으로 연대체를 구성하기 위해 여러 단위에 연락했다.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된 이들이 재판 당일 전주, 광주, 경남 창원, 서울 등에서 연차까지 써가며 모였다. 광주여성의전화 연락을 받고 온 전주여성의전화 활동가, ‘거제교제살인사건’ 연대를 지속 중인 경남여성회, 교제폭력·살인 사건 재판 모니터링 등 연대활동을 이어나가는 여성의당 등이 기꺼이 그 짧은 재판을 지켜보기 위해 온 것이다. 2월19일부터 한 달간 감정유치가 결정된 뒤 재판이 마무리됐고, 피고인 변호인과 연대자들은 대면으로는 처음 인사를 나누며 앞으로의 대응 방법을 함께 고민했다. 우선 비호가 시민 대상 온라인 탄원서·연서명을 받기로 했고 연대체 구성 및 언론·방송 대응 등도 간단하게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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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4일 전주에서 피해자 변호사 대상의 성인지 감수성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피고인 변호인을 다시 만났다. 워크숍 참석을 위해 야근까지 해가며 왔다는 그는 여성폭력 피해자를 위해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다며, 그 기회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워크숍 뒤 권지현 성폭력예방치료센터 소장 겸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공동대표까지 함께 식사하며 이 사건 연대를 위해 전주 지역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같이 고민했다. 서로가 연대의 계기가 되고, 그 연대를 확장하기 위해 다시 힘을 모으는 이 과정이 10년 이상 전국을 돌아다니는 힘의 원천이다.
2월23일, 이 사건을 ‘군산 교제폭력 3차 피해 사건’으로 명명하며 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1, 2차 피해에 이어 피해자의 트라우마 등과 연결된 ‘3차 피해’(피해자의 가해자화 등 포함)에 대한 인식 제고 및 정당방위 인정 등에 대한 대응을 위해 힘을 합쳐야 했다. 지역 기반 활동, 시민과 기관의 협업, 지역 간 연대, 입법활동 등으로 이어 나가기 위해 비호, 성폭력예방치료센터, 광주여성의전화, 경남여성회, 여성의당 관계자들이 화상회의를 했다. 언론·방송 대응 원칙 수립, 기자회견 일정 조정, 관련 전문가 접촉 등 짧은 시간 내에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한 것이다.
“도와줄 사람들이 있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됐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변호인 접견에서 ㄱ씨가 한 말이라고 한다. 1심 판결전조사에서 삶에 대한 애착과 변화 의지가 적고 외부에 대한 경계와 공포가 심하다고 평가받았던 그가 연대자들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가정폭력과 학대·방임에 노출됐던 어린 그, 교제폭력을 당하며 23차례 경찰에 신고하면서 도움을 요청하던 그의 손을 잡아줄 이가 있었다면 그가 피고인으로 법정에 설 일이 생겼을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ㄴ씨도 그 소중하다는 생명을 잃을 일이 있었겠는가.
3월8일 여성의날이 있는 그 주는 4일 내내 전국에서 교제살인사건 재판이 열린다. 그리고 난 전주를 비롯해 부산, 창원, 수원 등에 간다. ‘죽거나 죽여야 끝난다’는 것이 교제폭력으로 인식되는 현 상황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을 계속할 것이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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