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아닌가요?”
굳게 닫힌 서울중앙지방법원 506호 법정 출입문에 귀를 대고 1심 선고 결과(징역 10년)를 듣던 피해자 주환경(가명)씨가 반문했다. 2024년 10월3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1부(재판장 박준석)는 ‘서울대 딥페이크 성폭력 사건’의 주범 박아무개(40)의 모든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하며 검찰 구형대로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환경씨는 61명(확인된 피해자)에 이르는 사건 피해자 가운데 한 명으로 공판 방청을 지속하며 법정에서 직접 의견진술도 했지만, 정작 검찰 구형(징역 10년 등)대로 1심이 선고되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한 눈치였다. 또 다른 피해자인 루마(가명)씨는 “판결이 저(피해자)와 변호사님들과 연대자 분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아냈다”고 기뻐했다.
이 사건을 처음 접한 건 2024년 초, 진실탐사그룹 셜록의 ‘범인은 서울대에 있다’는 연속기사를 통해서였다. 피해자들은 2021년 7월부터 각각 네 군데 경찰서에 신고했지만, 수사기관은 가해자를 특정하지 못하고, 수사 단서 확보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했다. 형사제도의 무능과 태만이 그대로 드러났다. 결국 피해자인 루마씨가 가해자를 특정해 수사기관에 알렸지만 경찰은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다수의 피해자가 있는데도 늘어지는 수사 과정에 피해자들은 절망했다. 의지와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어 보였다.
포기할 수 없었던 피해자 곁에 조력자들이 나타났다. 한국성폭력위기센터가 법률전문가를 소개했다. 무료법률지원사업으로 공동법률사무소 이채의 조윤희 변호사가 합류했다. ‘추적단불꽃’의 대표 원은지 활동가는 2019년 ‘엔(n)번방’ 사건 가해자들을 추적하던 열정과 전문성으로 힘을 보탰다.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이어 항고 기각, 재정 신청까지 한 끝에 2023년 11월, 공범으로 추정되는 한아무개의 기소가 결정됐다.
그럼에도 다른 가해자들에 대한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재정 사건의 특성상, 기소 뒤 재판 과정에서 검찰이 공소 유지와 범행 유죄 입증을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기대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피해자와 조력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연대했고, 2024년 4월3일 주범(박씨)이 드디어 체포됐다. 텔레그램의 익명성과 강력한 보안을 오용해 수사기관과 사법시스템을 조롱하던 디지털성범죄의 실체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주범에 이어 같은 서울대 출신의 31살 강아무개, 그리고 공범 또 다른 박아무개(28)가 잡혔다. 주범 박씨의 첫 재판이 열리던 6월4일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해당 법정(506호)의 특성상 구속 피고인이 대기하는 장소가 별도로 마련되지 않아 피고인은 방청객이 드나드는 문을 통해 수갑을 찬 채 등장했다.
올해 40살인 서울대 출신의 남성, 최소 4년 동안 텔레그램으로 디지털성범죄를 일삼으며 ‘절대 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피해자들의 인격을 멸시하던 그는, 첫 공판일에 울먹이고 벌벌 떨면서 법정에 등장했다. 법원에서 만나는 성폭력 가해자들의 실상은 이렇게 역겹고 초라하다. 물론 그것은 심신미약을 내세운 피고인 쪽의 전략 중 하나로 보는 것이 적절하겠지만. 주범 박씨는 심신장애를 주장했다. 예상대로 “반성한다”면서도 교사 혐의, 범행의 상습성 등은 부인했다.
반면 검거 전 사용하던 휴대전화를 폐기해 증거를 인멸했던 강씨는 심신장애를 주장한 것 외에는 혐의를 인정하며 피해자 중 일부와 합의했다. 강씨 입장에서는 밝혀진 범행을 인정하며 읍소하는 것이 본인의 추가 범행을 은폐할 수 있는 현실적인 전략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실제 디지털성범죄자들이 모인 온라인카페에서는 수사기관이 확보해서 확인한 범행을 재빨리 인정하고 재판으로 넘어가는 것이 추가 수사를 막는 팁이라는 정보성 글이 수년 전부터 공유됐다. 디지털성범죄자들의 ‘자백’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전략인 셈이다.
해당 사건의 피해자 수가 61명까지 늘어났기 때문에 조윤희 변호사 외에 정명화, 송지은, 김민아 변호사도 합류했다. 법률 지원이 탄탄해진 상태에서 내가 조력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가 성폭력처벌법 제14조의 2 신설 뒤 최근까지 확정된 사건들의 판결문 분석 결과를 전달(판례 분석 참고용)하고, 매 공판 참여하는 피해자·가족들과 소통했으며, 방청을 위해 평일에 법원을 찾은 시민들에게 사건을 설명했다. 그사이 루마씨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사건을 알렸고, 환경씨는 법원을 직접 찾았다. 그렇게 우리는 따로 또 함께 연대를 이어갔다.
9월26일 주범 박씨와 공범 강씨의 결심공판에서 “피해자들이 이 정도로 고통받을지 몰랐다. 이 정도는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절대 그들을 미워하거나 모멸감을 주거나 우월감을 느끼려 했던 것은 아니다”라며 참회 퍼포먼스로 최후진술을 하는 박씨를 보며 한숨이 나왔다.
선고 당일, 재판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음에도 법정이 가득 차 피해자 환경씨는 법정에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법정 문에 귀를 대고 재판장의 목소리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피고인들의 모든 주장이 배척됐다. 재판부는 “해당 범죄가 피해자들의 인격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며, 그로 인해 피해자들의 관계망이 파괴됐다. 피해 회복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피고인들이 자신들의 행위가 범죄임을 명확하게 인지한 상태에서 텔레그램의 익명성과 강력한 보안성을 바탕으로 한국의 법률과 사법체계를 조롱했다며 박씨와 강씨에게 각각 징역 10년과 4년, 신상정보 공개고지명령 5년 및 취업제한 5년을 선고했다.
선고 뒤 법정 밖으로 나온 루마씨의 어머니는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판결문에 피해자가 주장한 내용이 잘 반영됐고, 검찰이 구형한 대로 선고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환경씨도 자신이 직접 법정에서 전달한 의견 진술 가운데 상당 부분이 판결에 담겨 위안이 됐다고 했다. 형사사법 제도의 가치를 새삼 깨달았다. 형사사법은 피해자의 피해를 회복하고, 일상을 재구성해 공동체의 신뢰를 높여야 한다. 피해자들이 바라는 ‘엄벌’은 형사소송 절차에서 피해자를 배제하지 않고, 충실하게 참여하도록 보장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1심 선고 다음날 루마씨는 SNS에 이렇게 썼다. “판결문 속 언어가 저와 변호사님들, 연대자 분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아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미와 보상, 성취감을 느낍니다. (…) 본 사건의 엄중한 판결이 단지 제가 ‘가진 자원과 관계망이 풍부한 서울대 출신 박사 유학생’이라서 얻은 예외적인 성과가 아니라, 모든 이미지 기반 불법 합성물 성범죄 피해자들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가 될 때까지, 끝까지 제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가해자들이 자원과 관계망을 총동원해 무죄를 주장하고 선처받으려 애쓰는 것과 대조적으로 피해자들은 가해자 처벌을 위해 쏟는 노력조차 ‘예외적’인 것이 아닐지 고민하게 하는 형사사법은 이제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른 피해자들 몫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운 그들에게 존경과 애정을 표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투사로 만드는 형사사법 제도에 대한 비판과 감시를 계속할 결심을 한다. 평일이었던 선고일, 근무시간을 쪼개어 들렀던 환경씨가 “야근 각”이라며 서둘러 떠나던 뒷모습을 기억한다. 부디 환경씨, 루마씨 등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이 평온한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기원한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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