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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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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동의강간죄’ 도입이 세계 표준…정권 교체 세력도 동의해야

캐나다를 시작으로 프랑스까지 ‘동의 모델’ 도입… 한국 법무부는 계속 퇴행 중, 민주당도 ‘도입 공약’ 철회
등록 2025-05-22 18:34 수정 2025-05-26 18:32
프랑스는 2025년 4월1일 하원 본회의에서 형법상 ‘강간’의 정의에 기존 ‘폭력, 강압, 위협, 기습’ 외에 ‘동의 없는 모든 성적 행위’를 추가하는 형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변화의 촉매제가 된 사건은 배우자에게 약물을 먹여 의식을 잃게 한 뒤 남성 수십 명과 공모해 9년 동안 성폭행해왔던 ‘도미니크 펠리코 사건’이었다. 사진은 2024년 12월19일 법원 판결 직후 기자들과 만난 피해자 지젤 펠리코의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프랑스는 2025년 4월1일 하원 본회의에서 형법상 ‘강간’의 정의에 기존 ‘폭력, 강압, 위협, 기습’ 외에 ‘동의 없는 모든 성적 행위’를 추가하는 형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변화의 촉매제가 된 사건은 배우자에게 약물을 먹여 의식을 잃게 한 뒤 남성 수십 명과 공모해 9년 동안 성폭행해왔던 ‘도미니크 펠리코 사건’이었다. 사진은 2024년 12월19일 법원 판결 직후 기자들과 만난 피해자 지젤 펠리코의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재판상) 실무에서는 이미 ‘동의 여부’를 가지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폭행·협박 등 유형력의 행사를 구성요건으로 하는 현행 형사법(성범죄) 체계의 문제를 지적할 때마다 판례 변경 등 실무적 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법조인들의 항변은 늘 뒤따랐다. 하급심에서 폭행·협박의 범위를 기존보다 넓혀 유죄를 선고하거나 대법원에서 피해자의 명시적 거부 의사를 기준으로 강간을 인정한 사례가 있었고, 2023년 9월21일 강제추행죄의 폭행·협박 최협의설을 30년 만에 폐기하는 등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여전히 ‘운’에 기댄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여전히 ‘운’에 기대고 있다. 수사관이나 법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특히 2024년 1월 일명 ‘천대엽 판결’로 알려진 대법원 판례가 나오면서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오독을 불러일으켜 하급심에서 이 판례를 인용해 무죄를 선고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실무에서 동의가 없을 경우 성폭력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피고인의 ‘오인’ 가능성에 힘을 더해 성범죄 고의를 부인하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즉 피해자와 피고인의 관계, 피해자의 언행 등을 들어 피고인이 피해자가 성관계에 암묵적·묵시적 동의를 한 줄 알았다는 주장의 근거로 등장하며, 재판부 역시 이를 바탕으로 무죄를 선고한다. 피고인이 동의했다고 오인하면 성범죄가 아니라는 식이다.

이런 상황에서 ‘동의 없는 성관계는 성폭력’이라는 생각으로 수사기관과 법원을 찾은 피해자들은 오히려 ‘무고범’으로 몰리기도 한다. 명시적 거부 의사를 밝혔고 해당 녹음기록이 있었음에도 조작된 녹취록을 제출한 가해자의 진술만으로 무고 피고인이 됐던 피해자(무죄 확정), 과도한 음주로 인해 항거불능 상태였고 전 과정이 녹음된 기록을 가해자가 가지고 있다가 편집해 제출했음에도 법정에 서야 했던 피해자(무죄 확정), 수면제를 먹고 잠들어 동의 여부를 밝힐 수 없었던 상태로 연인에게 성폭력을 당했으나 가해자가 무죄를 선고받고 무고로 손해배상 소송을 당한 피해자 등 끝도 없다. ‘성범죄 무고 타령’의 실체란 이런 것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통계는 이런 성폭력 피해자들의 현실을 보여준다. ‘2024년 상담통계 현황 보고서’를 보면, 2024년 상담한 모든 유형의 강간(강간, 유사강간, 준강간 등) 피해자 218명의 상담일지를 분석한 결과 피해자의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은 28건(12.8%)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폭행·협박이 없던 경우(70.2%)이거나, 강제·강압(평소의 가정폭력·교제폭력 등)을 이용한 경우(17.0%)였다. 성폭력 범죄의 보호법익인 ‘(개인의) 성적 자유·성적 자기결정권’과 현행법이 충돌한다고 평가받는 이유다. 결국 ‘실무’에 기대지 말고, 아니 실무와 현행 법체계의 괴리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유형력 모델’에서 ‘동의 모델’로 전환하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

국제적으로는 이미 ‘유형력 모델’이 아니라 ‘동의 모델’이 주가 되고 있다. 1983년 캐나다가 형법을 전면 개정해서 비동의강간죄를 최초로 도입했고, 독일·영국·스웨덴·덴마크·스페인·오스트레일리아 등도 강간죄 구성 요건에 ‘동의 여부’를 명시했다. 미국 역시 대다수 주에서 ‘동의의 부재(결여)’를 강간의 판단 기준 중 하나로 두고 있다. 2021년 유엔 인권이사회는 강간에 대한 특별 보고서를 채택해, 모든 국가에 비동의강간죄 입법을 권고했다.

‘유형력 모델’을 유지하던 프랑스조차 2025년 4월1일 하원 본회의에서 형법상 ‘강간’의 정의에 기존 ‘폭력, 강압, 위협, 기습’ 외에 ‘동의 없는 모든 성적 행위’를 추가하는 형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배우자에게 약물을 먹여 의식을 잃게 한 뒤 남성 수십 명과 공모해 9년간 강간해왔던 도미니크 펠리코와 (확인된) 공범 50명의 사건이 촉매제 구실을 했다. 강간범 대부분이 피해자인 지젤 펠리코가 성행위에 동의했다고 믿었다며 혐의를 부인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수치심을 가져야 할 건 우리(피해자)가 아니라 그들(강간 가해자)”이라며 피해자인 지젤이 재판 과정 공개를 결정해 알려졌고, 2024년 12월 남성 피고인 51명 전원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미스터 에브리맨(보통 남자·Monsieur Tout-le-monde)”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한 강간범들의 모습은 프랑스 내 강간 문화의 실체를 드러냈으며, 이는 곧 ‘동의 모델’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부동의성교죄’ 도입 일본에서도 제도 안착

일본 역시 2023년 이미 형법을 개정하고 ‘동의 모델’로 전환했다. 2019년 친족 성폭력 가해자, 일면식도 없던 여성을 성폭행한 가해자, 만취 상태의 여성을 성폭행한 가해자 등에 대해 ‘항거불능 상태라고 보기 어렵다, 성교에 대한 동의가 있었다고 오해했다, 폭행이 없었다, 피해자가 저항하지 않았다’ 등의 이유로 연달아 무죄가 선고되자 시민들은 ‘플라워 데모’를 통해 법 개정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다. 시민들의 분노는 법무성을 움직였고, 법무성 쟁점 심의 때 성폭력 피해 생존자가 참여해 목소리를 더했으며, ‘스프링’ 등 시민단체는 성폭력 피해자 5889명에 대한 실태조사 결과를 법무성에 전달했다.

법무성은 수차례 검토와 심의를 거쳐 형법 개정안을 도출했고, 2023년 하원에서 전원일치로 가결됐으며, 그해 6월 본회의를 통과해, 7월부터 개정 형법을 시행했다. 기존 ‘강제성교 등 죄’를 ‘부동의성교 등 죄’로 바꾼 개정 형법은 상대방이 부동의 의사를 형성하거나 드러낼 수 없게 하는 가해자의 행위 8가지를 열거(2015~2019년 강간 사건 판례 1300여 건 분석해 정리한 범죄 유형을 바탕으로 함)하고, 유사 행위 역시 처벌 대상으로 삼는다. 법 개정 후 기소율이 늘어났으며, 일선 수사기관에서도 수사가 수월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성범죄 무고’를 우려했던 것과 달리 악용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명확한 기준이 생기면서 피해자들도 더 적극적으로 신고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은 어떠한가. 시민사회는 1990년대 초부터 20년 이상 관련 논의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다 2018년 사회 전반으로 확산된 ‘미투(Me Too) 운동’을 계기로 2019년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이하 강간죄개정연대)가 출범했고, 이후 국민동의청원(5만 명 이상 참여)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개정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문제는 법무부와 정치권이다. 2017년 이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 세 차례(2017·2018·2024년) 권고(강간죄 판단 기준을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동의 결여’로 변경), 2023년 유엔 자유권위원회로부터도 모든 형태의 강간을 ‘동의 부재’로 정의하도록 권고받았음에도, 법무부와 정치권은 ‘억울한 피의자 양산’ ‘시기상조’ 등을 내세우며 과대 대표된 일부 남성들의 목소리만을 대변하고 있다.

법무부는 2015년 이후 퇴행 중인데, 특히 검사 출신 장관이던 한동훈 재직 시절, 비동의강간죄 도입에 대해 독일의 통계마저 왜곡(‘독일은 성범죄 유죄율이 8%’라고 주장했으나, 실제 기소 대비 유죄율은 70% 정도였다)하며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2023년 1월 여성가족부는 비동의강간죄 도입 검토를 발표했다가 9시간 만에 검토 계획을 철회했다. 정치권(국민의힘)으로 이동한 한동훈은 여전히 ‘억울한 피의자 양산’ 운운하고, 권성동 등 국회의원들도 ‘무고 가능성’을 들먹이며 반대 중이다. 더불어민주당 역시 2024년 총선 10대 공약에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포함했다가 사흘 만에 ‘실무적 착오’라며 철회했다.

권영국 후보만 유일하게 도입 약속

이러다보니 관련 법안은 발의 자체도 어렵고, 발의 후에도 논의가 지지부진하다. 제20대 국회에서 10건의 비동의강간죄 관련 형법 개정안이 발의됐으나 상임위원회에서 논의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채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고, 제21대 국회에서도 3건이 발의됐으나 역시 폐기됐다. 제22대 국회에서는 시민들의 국민청원 2건이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됐고, 진보당 정혜경 의원, 조국혁신당 정춘생 의원이 법안 발의에 노력하고 있으나 필요 인원(10명)을 채우지 못해 여전히 준비 중이다.

여성혐오를 발판 삼아 집권한 뒤 비상계엄을 선포한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이 파면된 대선 정국에서도 ‘비동의강간죄 도입’은 정치권의 적극적 반대(국민의힘) 혹은 젊은 남성들의 표를 의식한 눈치보기(더불어민주당)로 공약으로 주목받지도 못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만이 비동의강간죄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을 뿐이다. ‘광장’에 모여 빛을 만들고 변화를 끌어낸 여성들의 인권은, 자기결정권은, 자유는 또다시 무시되는 것이다.

“이번에는 되겠지요?”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만났던 변호사가 한 말이다. 정권 교체가 되면 비동의강간죄 도입도 가능해지지 않겠느냐며 자신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며 내게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난 오히려 지금부터가 더 지리멸렬한 싸움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여성혐오와 차별의식을 일상화한 이들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자리 잡기 시작했고, ‘대의’를 위해 일명 ‘여성 의제’는 뒷전으로 밀리는, 여전한 백래시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피해자가 스쳐 갔다.

2025년 4월15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강간죄에서 부동의 성교죄로: 일본형법 개정의 의미와 과제’ 토론회가 끝난 뒤 본, ‘억울한 흙수저 성범죄 피해자, 비동의강간죄 국회발의 통과 촉구에 관한 청원’을 올렸던 성폭력 피해자의 눈빛, “동의 없는 성관계는 강간이다. 동의를 구할 용기도 없는 자들, 그들이야말로 정상적 사회인으로서의 증명이 필요한 자들”이라며 지속되는 입증 요구와 인신공격을 감내하고도 가해자에게 무죄가 선고되는 것을 목격한 피해자의 말. 당사자들도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지금, 연대자이자 활동가인 나 역시 냉소나 체념으로 흘려보낼 시간 따윈 없다. ‘동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진,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동의가 없는 성관계는 성폭력’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이 말이 시스템을 통해 구현될 수 있게, 지금도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더 열심히 뛸 것이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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