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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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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하고 끈질긴 미친년’, 더는 혼자가 아니다

반성폭력 싸움, 나홀로 연대에서 함께의 연대까지
등록 2026-03-05 21:10 수정 2026-03-08 11:18
2025년 3월6일 전북 전주지법 앞에서 전국 34개 여성단체로 구성된 ‘군산교제 폭력 정당방위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기자회견을 열어 교제폭력에 시달리다가 집에 불을 질러 남자친구를 살해한 피고인에 대한 정당방위 적용을 주장하고 있다. 이 피고인은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으나 판결에 불복해 현재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2025년 3월6일 전북 전주지법 앞에서 전국 34개 여성단체로 구성된 ‘군산교제 폭력 정당방위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기자회견을 열어 교제폭력에 시달리다가 집에 불을 질러 남자친구를 살해한 피고인에 대한 정당방위 적용을 주장하고 있다. 이 피고인은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으나 판결에 불복해 현재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걱정 마세요.”

2025년 2월27일, ‘군산 교제폭력 정당방위 사건’의 생존자 접견을 위해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한 달 가까이 누워 있다가 목발을 짚고 외출한 첫날이었는데, 택시를 타고 가던 중 접촉 사고가 나 눈앞에서 버스를 놓쳤다. 제때 도착하지 못할 상황이라 함께 충북 청주여자교도소에 가기로 한 접견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부탁했다. 외부 연구원인 그가 혼자서도 접견을 잘하리라 믿었다. ‘여성 대상 폭력 및 살인사건 피해자’를 위한 연대 활동을 막 시작한 2014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그림이다. 이제 더는 혼자가 아니다.

피해자들은 ‘법대로’ 이겼지만, 세상을 떠났다

2014년 연대 활동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약 4년간 이어진 싸움 탓에 날이 잔뜩 서 있었다. 당시는 피해자 보호 및 지원 제도가 막 만들어진 때였고, 외부 기관이나 전문가의 조력을 받지 못해 홀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분석해 해결했다. 연대 활동 역시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온전히 홀로 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대 결과가 좋아서 한동안 ‘혼자 하는 연대’에 도취해 있기도 했다. 고백하자면, 시스템과 제도를 활용하는 능력만큼은 웬만한 변호사나 활동가보다 낫다고 자만했다.

그러다 2015~2016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교제폭력,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고발 운동 등이 촉발된 뒤부터 ‘방청연대’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재판을 방청하도록 독려했다. 그 뒤 2017년 두 명의 피해자를 연달아 떠나보내면서 연대 활동의 방향성을 다시 고민했다. ‘법대로’ 해서 이겨도 죽음으로 내몰린 피해자를 막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시스템과 사람을 잇는 싸움, 시스템을 바꾸는 싸움, 싸움이 끝난 뒤 피해자의 일상을 위한 싸움으로 연대 활동의 영역을 넓혔다. 그게 먼저 간 이들에 대한 애도라 여겼다.

2018년 활동 중단을 고려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때 서지현 전 검사와 김지은씨 등 성폭력 피해 고발 운동(미투)이 이어졌고, 이 사건의 사법적 판단이 나올 때까지 활동 중단을 유보했다. 1심 피해자 증인신문을 앞두고 김지은씨를 만나러 한국성폭력상담소를 찾았고, 서울·기관 중심의 방청연대 활동에 참여하며 기관 활동가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2년간 여름과 겨울 각 두 달씩 전국을 돌며 시민에게 사법시스템을 강연하기도 했다.

그사이 김지은씨는 형사재판에서 피해를 인정받았지만 여전히 힘들어했다. 교제폭력, 불법촬영 등 피해를 본 여성들은 자살했고 사법시스템은 여전히 대중에게 냉혹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내가 아니어도 할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활동을 멈추려 했다. 본업과 부업, 연대 활동을 병행하며 하루 두세 시간 정도만 자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몸이 보낸 경고… 이젠 함께할 동료들이 있다

2019년 11월, 대법원 산하 연구모임인 젠더법연구회에서 온 연락을 계기로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이자 ‘활동가’로서 사법시스템 내부로 들어가 법관들과 함께 성폭력 피해자 설문조사를 시행해 분석했고, 토론회와 세미나를 여는 등 변화를 끌어내고자 노력했다. 당시 교류했던 판사들은 지금 법원 내 또 다른 연구회(현대사회와 성범죄 연구회)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다.

2020년 활동명을 ‘마녀’에서 ‘연대자D’로 바꿨다. 연대 활동의 2막을 연결어미 ‘~디’처럼 시스템과 사람, 개인-사법시스템-시민사회를 잇는 가교 구실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겨레21에서 디지털성폭력과 관련된 칼럼 제의가 들어온 것도 이 시기였다. SNS 계정 운영만으로는 정보를 알리기 어려웠고 생존자·활동가 시각으로 성폭력 사건을 상세하게 정리해 투쟁할 필요가 있었다. 제의를 받을 때만 해도 5년 이상 연재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칼럼을 연재하며 연대의 폭이 더 넓어졌다. 현존하는 시스템을 활용하는 투쟁과 그 시스템의 변화를 촉구하는 투쟁을 병행했다. 피해자와 일대일로 직접 소통하거나, 수사·사법기관 내 전문가들과 협업해 이들을 상대로 교육·토론·세미나를 이어갔다. 도서를 출간하고,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수사 지침 매뉴얼을 만들어 보급했다. 까칠하고 날이 서 있던 연대 초기와는 달리 소통과 연계에 힘을 쏟았다. 공인된 자격증이 없어도, 기관에 소속돼 있지 않아도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현장’을 찾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현장의 이야기를 제대로 담고자 유사 사례와 판결 등을 분석하는 작업도 이어갔다.

그러다 시스템과 제도의 급격한 변화, ‘삭제’를 내세운 백래시(‘반동’ ‘반발’을 뜻함)의 강화 속에서 활동가로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 돌이켜 보게 됐다. 한겨레21 칼럼 역시 언론사의 논조에 맞추고자 순화한 것은 아닌지, 소통과 연계를 앞세우느라 비판의 칼날이 무뎌진 것은 아닌지, ‘그림자’가 아니라 ‘본체’가 되고 싶은 욕망이 생긴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됐다. 그러다 2026년 1월 자고 일어났더니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몸이 전하는 마지막 경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부 요인으로 활동을 잠정 중단하더라도 이제는 동료들이 곁에 있다. 지혜복 교사의 투쟁은 김지은씨가, 세종시 집단 성폭력 사건 2심은 센터 활동가들이, 가해자의 보복범죄와 수사 과정에 대한 국가 배상 책임을 묻는 싸움은 김진주씨가 진행 상황과 결과를 전달해줬다. 연대를 위한 발판은 충분히 마련된 상황이다. 머리를 쥐어뜯는 고통 속에서도 이들이 있어 그간 활동을 다시 생각해볼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예민해야, 끈질겨야, 미쳐야 세상을 바꾼다

“예민하고 끈질긴 미친년.”

2010년 가해자에게 들었지만, 이 말을 좋아한다. 예민해야 문제를 인식한다. 끈질겨야 문제를 해결하며, 미쳐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이 말을 떠올리며 연대 활동 계획을 수정 중이다. 우선 걷기부터 시작해야 하는 재활을 잘 마무리하고, 체력을 길러 역량을 다시 키운 뒤 할 일을 정리하려 한다. 익명의 개인활동가로서 기록투쟁의 장으로 활용했던 한겨레21과 독자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도 정리의 일환이다. 지면에선 떠나지만 여전히 ‘그림자’이자 ‘연결어미’로 존재할 것이며, 다양한 방식으로 그 경험을 시민들과 공유하고 고민하며 행동할 것이다. 냉소와 체념, 포기와 안주보단 희망과 각성, 투쟁과 저항을 선택해 ‘현장’에 있을 테니 독자분들도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연대해주기를 바란다. 저절로, 알아서, 당연히 찾아오는 변화란 없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n번방 재판 방청기’는 이번 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글을 써주신 마녀 D님과 애독해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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