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은미 경기도 화성동탄경찰서장이 2025년 5월28일 경기도 수원시 경기남부경찰청에서 이른바 ‘동탄 납치살인' 사건에 대해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원심의 형량은 가벼워서 부당하다. 피고인을 징역 30년에 처한다.”
‘부산 연제구 교제살인 사건’의 2심 결과다. 피고인 김아무개씨는 교제 기간 내내 피해자를 통제, 협박, 폭행했다. 관계 단절로 인한 사회적 고립, 수면제 등 약물의 강제 투여, 정신과 방문 강요, 협박 등을 견디지 못한 피해자가 결별을 고하자 김씨는 스토킹을 이어갔다. 피해자는 한 달간 긴급 주거지에서 생활하고, 퇴소 뒤 주거지를 이전하는 등 김씨와 멀어지려 노력했으나 2024년 9월3일, 세 번째 경찰 신고 열흘 만에 배달원으로 위장한 김씨에게 주거지에서 살해됐다. 1심보다 형량은 5년 늘어났지만, (1심과 달리) 재범 위험성이 낮다며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명령은 기각됐다. 선고 뒤 부산고등법원 301호 법정 앞에서 유족과 앞으로의 대응 방향을 논의했다. 연대한 이들에게 유족은 고마움을 표했지만, 피해자는 살고 우리는 서로 몰랐어야 했다.
2024년 10월22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부산경찰청 국정감사에서 이 사건에 대한 질의가 나왔다. 신고 뒤 분리조치를 했으나 피해자가 처벌불원 의사를 밝히고 스마트워치 지급 등 신변보호를 원치 않아 사건을 종결했다며 피해자에게 일부 책임을 돌리던 경찰은, 국정감사 과정에서는 김수환 부산경찰청장이 피해자 진술·의사에 의존한 미온적 대응을 했다며 관리 미흡 책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수사기관과 법원의 안일한 대응으로 피해자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특히 2025년 5~6월 한 달 사이에 피해자 3명이 연달아 살해됐다.
5월12일 경기도 화성에서 30대 남성이 전 연인을 납치·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피해자가 경찰에 9차례 신고했고, 4월에는 고소장 및 고소이유보충서 등 600장이 넘는 사건 관련 자료를 제출했으나 경찰은 한 달 이상 사건을 방치했다. 스토킹 피해를 호소하고 보복 위험에 노출됐다며 불안해하는 피해자에게 스마트워치 반납을 요구하고 안전조치 종료를 통보했다. 피해자는 결국 지인이 마련해준 오피스텔로 옮겨야 했지만, 그사이 흥신소를 통해 피해자의 거주지를 찾아낸 가해자가 피해자를 납치해 자신의 주거지에서 살해하고 자살했다. 세 번째 신고 때 피해자의 처벌불원 의사만 확인하고 별다른 보호조치 없이 현장을 떠난 경찰로 인해 이후 고문에 가까운 폭행을 당했던 피해자는, 그럼에도 경찰을 믿고 계속 도움을 요청했으나 경찰은 그를 보호하지 않았다. 16일이 지나 서장이 사과했고, 관련자들은 징계 처리 중이다.
6월19일에는 인천시 부평에서 가정폭력 피해 여성이 가해 남편에게 살해됐다. 가해자는 2024년 12월17일 자택에서 흉기로 피해자를 협박해 특수협박 혐의로 입건됐고, 피해자는 경찰에 ‘임시조치’ 신청을 요청했다. 법원에서 가해자에게 주거지 퇴거 등을 포함한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졌다. 최장 6개월인 임시조치 기한이 종료된 뒤 가해자는 피해자와 아들을 수차례 찾아가 위협했다. 문제는 경찰의 대응이었다. 사건 발생 하루 전, 가해자 난동 뒤 피해자에게 연락한 삼산경찰서 경찰관이 추가 보호조치 등을 요구하는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접근을 막을 수 없다거나 보복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가해자에게 금전적 지원을 하라고 종용했음이 녹취록을 통해 드러났다. 피해자는 다음날 경찰서를 방문해 스마트워치 지급과 주거지 인근 폐회로텔레비전(CCTV) 설치 여부 등 추가 보호조치를 논의하기로 했으나, 당일 살해됐다. 인천경찰은 규정대로 했고 녹취 내용은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다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보다 앞선 6월10일, 대구에서는 스토킹하던 피해자를 살해하고 도주한 사건(윤정우)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앞의 두 사건과 달리 경찰 대응은 적극적이었다. 4월 윤정우가 흉기를 들고 피해자를 찾아가 협박한 사건과 관련해 경찰이 구속영장 청구를 신청했지만 법원이 윤씨가 수사에 적극 협조하고 도주 위험이 없다는 등의 사유를 들어 기각했다.(그러나 협박 범행 뒤 윤씨는 대구를 벗어나 도주하다 체포된 상태였다.) 경찰은 영장 기각 뒤 피해자를 고위험 범죄 피해자로 분류하고 접근금지 조치와 함께 적극적인 신변보호 조치를 했다. 여러 사정으로 긴급 주거시설로 이동하기 어렵다는 피해자의 상황을 고려해, 가해자 얼굴 인식이 가능한 인공지능(AI) 보안카메라를 피해자의 주거지 현관 앞에 설치하고, 스마트워치를 지급했다. 민간경호 서비스도 제공했다. 14일의 민간경호 서비스 종료 뒤 경찰은 피해자에게 연장을 제안했으나 피해자가 거부했고, 스마트워치도 반납한 상태였다. 그러나 윤정우는 해당 서비스 종료 뒤 6층인 피해자 주거지에 배관을 타고 침입해, 피해자를 살해했다. 흉기 협박 범행 뒤 도주한 윤정우를 도주 위험이 없다며 풀어준 법원이 피해자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서울 서초구 강남역 인근 한 건물 옥상에서 의대생 최아무개씨가 여자친구를 살해한 사건의 피해자 유족이 2025년 6월20일 오전 서울 서초경찰서 앞에서 범행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한겨레 장종우 기자
이런 사례는 현행 시스템 내 피해자 보호조치로는 가정폭력, 교제폭력, 스토킹 등 친밀한 관계에 기반한 범죄로부터 피해자를 안전하게 보호하기란 어렵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실제 친밀한 관계에 기반한 범죄의 경우 매해 신고 건수가 늘어나는 것에 견줘 범죄 피해자 안전조치 결정 비율은 감소하고 있다.(2022년 41.5%에서 2024년 34.8%로 감소) 반면 잠정조치 위반 건수는 급증하고, 법원의 접근금지 명령은 형식적이거나 가해자의 분노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어 살인 등 강력범죄로 이어지고 있으며, 가해자를 제한하는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청구나 유치 등은 신청이 적은데다, 그에 대한 법원 결정도 다른 잠정조치의 절반 수준에 머무르는 실정이다. 더욱이 경찰이 수를 늘렸다며 자랑하는 스마트워치로는 범행 현장에서 피해자를 구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발견하고 도움을 청했을 때는 이미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범위 내로 접근한 상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가정폭력·교제폭력·스토킹 등 관계에 기반한 폭력에 대한 국가 통계가 없고, 피해자의 상태·상황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며, 보호조치의 실효성에 대한 검토 등이 형식적인 것에서 비롯한 문제다.
허민숙 입법조사관에 따르면 다른 나라(영국,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북아일랜드 등)의 경우 가정폭력 사망검토제를 도입해 피해자 죽음의 사회·구조적 원인을 분석하고 살해의 전조 증상과 위험 요인을 파악해 제거하려 노력한다고 한다. 이런 노력은 피해자 보호와 범죄 예방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강압적 통제’(coercive control·상대방의 일상에 대한 간섭과 규제, 모욕 주고 비난하기, 행동의 자유를 빼앗고, 가족 및 지인 등에게서 고립시키는 등의 가해 행위)와 ‘비치명적 목조름’(non-fatal strangulation·목 부위를 압박해 호흡곤란을 일으키고, 뇌로 가는 산소 공급을 차단하지만, 피해자가 사망에 이르지 않은 경우) 등 친밀 관계 파트너 살인의 전조 증상 등을 발굴해 더 큰 피해를 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한국은 2025년 들어서야 국가 통계 구축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한국여성의전화(2009년부터 매해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한 여성살인 사건 집계·발표)에 교제폭력 통계 구축을 문의한 것이 그 신호다. 경찰도 2024년부터 범죄 통계(살인 등) 속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를 확장했고, ‘관계성 범죄’라는 명명으로 가정폭력·교제폭력·스토킹·아동학대 등을 묶어 분석과 관리를 시도하고 있다. 정치권 역시 반의사불벌 폐지 등을 중심으로 교제폭력 등 관련 법안을 정비하고 있다. 그러나 너무 늦다. 너무 많이 죽었다.
5월21일 경남 창원에서 만난 ‘거제 교제살인 사건’ 유족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은 담담하려 애썼지만 지쳐 보였다. 끝내 사법시스템에서 살인으로 인정받지 못한 죽음 앞에서 유족은 너무 고통스러워했다. 6월20일에는 서울 서초경찰서 앞에서 또다시 무릎을 꿇은 피해자 아버지 소식을 들었다. 의대생이던 최아무개씨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딸을 위해 고통과 분노를 누르다 1심 결심에서 무릎을 꿇었던 아버지는 추가 고소(사체손괴)를 위해 찾은 경찰서에서 딸이 사망 뒤 당했던 2차 공격 부위를 하나하나 그렸다. 이 사건 가해자들은 지속적으로 교제폭력을 저지르며 목을 조르거나, 자살·자해 협박을 하며 피해자를 통제했다. 살인의 전조 증상이 널리 알려졌다면, 피해자들이 이를 인지하고 보호받을 수 있었다면, 관련 처벌 규정이 존재해 가해자들의 행위를 제한할 수 있었다면, 피해자들의 시간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돌이킬 수 없다면 적어도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와 가족들을 보호하고 존중해야 했다. 그러나 사법시스템은 그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 그들은 또 상처를 입었다.

2025년 3월6일 전주지방법원 앞에서 전국 34개 여성단체로 구성된 ‘군산 교제폭력 정당방위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천경석 기자
“판사님, 저에게 다시 한번 법의 심판을 받을 기회를 주세요.” ‘군산 교제폭력 정당방위 사건’의 피해자(방화치사 피고인)가 재판부에 보낸 편지의 일부다. 정당방위나 심신미약은 인정되지 않았지만, 5년간 있었던 교제폭력 피해를 일부 인정받아 2심에서 감형(징역 10년)됐던 그는 교도관이 건넨 문서(상고취하서)의 내용을 확인조차 안 하고 서명해 제출했다. 외부에서 알리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제출한 문서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교제폭력의 후유증은 이토록 심각하다. 현행 시스템 내에서 그에게 다시 기회가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나를 비롯한 ‘군산 교제폭력 정당방위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후원금을 모아 전달하고 접견을 가는 등 그와 계속 연대하고 있다. 언젠가 다시 사회로 복귀할 그를 위해 외부에서 준비하고 있다. 감옥에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는 살아 있으니까.
먼저 간 이들을 위해서도 할 일이 많다. 유족과 지인 등 남은 이들의 회복과 일상 재구성을 위해서라도 시스템과 인식 모두를 바꿔야 한다. 더 이상 죽게 둘 수 없다. 죽은 이들과 그를 기억하고 사랑했던 이들을 더는 외롭게 둘 수는 없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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