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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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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대통령을 뽑겠다”

돌봄과 미래·N인분·빠띠가 여는 ‘100인 돌봄시민회의’…
10개 분과 토론 거쳐 수렴된 정책 대선 후보에게 전달
등록 2025-05-08 21:11 수정 2025-05-12 11:06
2024년 10월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10·29 국제돌봄의날’ 조직위원회 회원들이 국가가 책임지는 공공 중심 돌봄체계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2024년 10월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10·29 국제돌봄의날’ 조직위원회 회원들이 국가가 책임지는 공공 중심 돌봄체계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요양보호사를 부르면 하루 3~4시간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데 요양보호사인 제가 어머니를 돌보면 하루 한 시간, 한 달 20일밖에 인정이 안 돼요.”

강원 고성군에서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93살 어머니를 돌보는 정아무개(65)씨는 정부의 돌봄 복지 정책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어르신이 시설에 가는 것을 싫어하고 집에 외부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꺼리는 경우에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요양보호사인) 가족이 돌볼 수 있다고 해서 정씨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2024년 취득했다.

돌봄은 ‘가족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조건이 까다로웠다. 월 160시간 이상 다른 곳에서 노동을 하는 사람은 ‘가족 요양’을 할 수가 없었다. 가족 요양을 하려면 사실상 생계를 포기하고 가족만 돌봐야 한다. 결국 정씨는 당신이 요양보호사로서 어머니가 아닌 다른 노인을 돌보면서, 자신의 부모는 다른 요양보호사가 돌보게 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씨는 “가족 요양으로 하면 한 달에 20시간밖에 인정되지 않아서 고용보험이나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도 없다”며 “가족이 아닌 외부 요양보호사를 부르는 것보다 내가 모시면 정부가 지원을 적게 주는데 이러면 누가 가족 요양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요양보호사의 가족 돌봄이 타인을 돌보는 일에 견줘 낮은 보상을 받는 기저에는 여전히 돌봄을 ‘가족의 일’로 여기는 정부의 소극적인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다. 가족이 부모를 돌보는 것은 당연하므로 타인(요양보호사)이 돌보는 것과 정부 지원을 똑같이 받을 수 없다는 논리다. 가족 요양뿐만 아니라 아동 등 자녀를 돌보는 ‘양육 수당’도 마찬가지다. 시설에 보낼 때보다 집에서 돌보면 적은 금액을 지원받는다. 이렇게 돌봄을 사회 문제가 아니라 개인과 가족이 감당할 문제로 인식하는 정부의 태도는 비합리적인 정책 양산과 유지로 이어진다. 2021년 12월 기준으로 가족 요양보호사는 9만4159명이나 되지만, 정부의 이런 태도는 바뀌지 않고 있다.

‘돌봄 민주주의’를 쓴 미국 미네소타대학 정치학과 교수 조안 트론토는 이런 문제에 대해 “돌봄과 가사가 사회적 약자에게 떠넘겨지는 맥락을 살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동체에서 돌봄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여성이거나, 노인이거나, 가난하거나, 이주민이어서 사회·경제적 조건이 취약하기 때문에 돌봄 정책을 이야기하는 공적인 논의에서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고위 관료, 중년 남성, 부자들은 돌봄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돌봄 정책에는 더 큰 영향을 미치고 공적 논의에서 큰 목소리를 낸다. 역설적이지만 돌봄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돌봄을 잘 받고, 돌봄을 하는 사람들은 돌봄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돌봄 앞에 인간은 평등하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돌봄을 받았거나, 지금 돌봄을 받고 있거나, 앞으로 돌봄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재단법인 돌봄과 미래가 2023년 45~69살 중장년 1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한민국 돌봄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절반 이상(51.7%)이 돌봄이 필요한 가족이 있다고 답했다. 응답자 5명 가운데 1명(20.3%)은 가족 돌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 경험이 있다고 했고, 돌봄을 제공하는 가족 중 62.6%는 ‘우울감이나 스트레스 등 심리적 어려움’을 겪었으며, 58%는 ‘가족 간 갈등’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95.5%는 앞으로 돌봄 문제가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돌봄 제공 가족 62% ‘심리적 어려움’ 경험

우리에게 돌봄은 이미 보편적인 문제가 됐다. 그러나 현실에서 돌봄 부담은 불평등하게 지워진다. 돈이 있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생애 주기에서 단 한 번 돌봄노동을 하지 않고도 거액의 돌봄 서비스를 받으며 노년을 보내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가족을 간병하느라 퇴사를 고민하고, 비싼 간병비에 시름하며, 아픈 가족을 시설이나 병원에 보내고 죄책감을 느낀다. 정부로부터 어떤 돌봄 서비스를 지원받을 수 있는지 몰라 난관에 부딪히기도 한다.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해서 돌봄의 늪에 빠지고 돌봄 부담 때문에 사회·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워지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돌봄노동을 하고 있고, 어떤 돌봄을 받길 원할까? 정씨가 어머니를 돌보는 일이 제대로 평가받고 지원받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위기에 놓인 돌봄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중이거나, 앞으로 지게 될 돌봄 부담이 두려운 시민들을 위해 ‘100인 돌봄시민회의’가 열린다. 재단법인 돌봄과 미래, 돌봄 청년 커뮤니티 ‘엔(N)인분’, 사회적 협동조합 ‘빠띠’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이번 행사는 돌봄 경험이 있거나 돌봄에 관심이 있는 시민이 모여 직접 자신의 돌봄 경험을 공유하고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행사는 2025년 5월10일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서울 마포구 한국사회복지회관 6층 대회의실에 진행된다. N인분의 조기현 대표는 “돌봄 시민들의 ‘넋두리’와 정책 전문가들의 ‘탁상공론’을 모아 정책을 직접 만들어보고, 만든 정책을 대통령 선거 후보에게 전달해 우리의 돌봄을 직접 바꿔보자는 취지로 마련된 행사”라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이번 시민회의는 △가족돌봄자 지원 △치매 및 인지장애 돌봄 △장애인 돌봄과 발달장애 자녀 돌봄 △암환자·중증질환자 돌봄 △생애 말기 돌봄(호스피스 등) △재가 돌봄 △정신장애 돌봄 △의료-간병 통합 시스템 △지역사회·이웃 기반 돌봄 △청년 돌봄 등 10개 주제 분과로 나눠 진행된다. 가족돌봄자 지원부터 노인 돌봄과 호스피스까지 다양한 돌봄 주제 분과 회의에서 참가자들은 자신의 돌봄 경험과 고민을 털어놓고, 필요한 지원과 정책이 무엇인지 함께 논의하게 된다. 각 분과 토론에는 돌봄 정책 및 복지 분야의 전문가 멘토(15명)가 참여해 시민들의 의견을 구체적인 정책 제안으로 발전시킬 수 있게 도울 계획이다. 토론을 거쳐 도출된 정책 아이디어는 당일 현장에서 발표되며 시민들이 만든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절차를 거칠 계획이다. 이 과정을 통해 수렴된 정책들은 대선 후보들에게 전달돼 국정 과제로 채택할 것을 촉구할 예정이다.

“우리의 돌봄을 직접 바꾸자”

허선 돌봄과 미래 교육연수위원장(순천향대 교수)은 “돌봄과 관련된 개인의 불만과 사회 문제들이 가족화되고 개인화된 돌봄 현장에 분절적으로 갇혀 있어 사회 의제가 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이 컸는데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 등 외국에서 체계적으로 조직돼 목소리를 내는 돌봄 제공자(Carers) 단체들을 보고 한국에서도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돌봄의 사회화와 돌봄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차기 대통령의 국정 과제에 포함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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