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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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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대물림이 만든 불평등

등록 2025-04-18 11:00 수정 2025-04-24 07:31

“준비된 상속이야말로 가족에 대한 사랑입니다.”

한겨레21 제1559호 표지이야기 ‘상속계급통’을 준비하면서 읽은 상속 ‘노하우’ 책 첫 장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마치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았습니다. “준비와 계획 없는 상속은 가족 간의 분쟁을 일으키므로 미리 준비해야 가족의 행복과 화목을 유지할 수 있고, 절세도 할 수 있다”는 저자의 조언에서 조금의 온기를 느꼈으나, ‘상속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차갑게 읽혔기 때문입니다. 한겨레21과 만나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지 않는다”고 했던 김현제(32)씨가 떠올랐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어 사실상 가장인 그는 자녀에게 해줄 것이 없어 도저히 결혼을 꿈꿀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녀에게 자산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요.

물론, 열심히 모은 자산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직 내 자녀에게만 부를 물려주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거나, 내 가족 외 다른 사람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엘리자 필비는 저서 ‘상속계급사회’(Inheritocracy)에서 “시장경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국가의 역할은 위축되는데 다정한 엄마와 아빠는 과거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자녀를 돕고 있다”며 이들 부모를 ‘좋은 부모, 나쁜 시민’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개인이 쌓은 부를 모두 사회에 돌려주자는 것은 아닙니다.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리 공동체가 정말 어렵게 쌓아 올린 부를 잘 사용해야 하는데, 각자가 쌓은 재산의 20% 정도는 사회에 환원해 사회안전망을 두껍게 하는 데 사용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런 제안은 김장하 선생이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에게 말했던 “자유에 기초해 부를 쌓고 평등을 추구해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며 박애로 공동체를 튼튼히 연결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임기 내내 우리 공동체의 ‘사회적 유산’을 갉아먹다가 12·3 내란 계엄을 일으키고 탄핵당한 윤석열은 마지막 퇴장마저도 기괴했습니다. 2025년 4월11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를 나서는 윤석열을 배웅한 청년들(?) 때문입니다. 관저 퇴거 하루 전 한국사 강사인 전한길을 만난 윤석열은 “나야 감옥 가고 죽어도 상관없지만, 청년 세대 어떡하나”라며 걱정했다고 합니다. 이 청년들은 서울 시내 주요 대학의 ‘과잠’(학과 점퍼)을 입고 윤석열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른 김장하’ 다큐멘터리에서 김장하 선생이 들려준 한 장학생(과거 자신이 지원했던) 이야기가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김종명이. 명신고 7기. 와서 하는 이야기가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돼 죄송합니다’ (웃음) 내가 그런 것을 바랐던 건 아니었어.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

물려받은 자산이 없어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지 않아도, 평범해도 ‘계급통’ 없이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을 꿈꿉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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