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29일 며칠 전부터, 집에 자주 찾아오는 길고양이 ‘내고’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스물다섯의 송은지가 맛있는 밥을 챙겨주고 이름도 지어준 아이였다. 부모님이 고양이에게 주기 위한 사료를 사도, 은지는 꼭 캔에 담긴 더 맛있는 사료를 구매해 챙겨주곤 했다. 그런 따스한 마음을 동물이라고 모를 리 없다. 다른 가족을 보면 도망가던 고양이가 은지를 보면 어쩐지 가만히 있곤 했다.
이태원 참사 며칠 전, 문득 은지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요즘 고양이가 안 와.” 은지의 아버지 송후봉(61)씨는 처음엔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때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지나보니 (모든 일을 은지와) 연관해 생각하게 되잖아요. 혹시 고양이가 (참사를) 미리 알고 은지와 정을 좀 떼려고 그런 것 아닌가 싶더라고요. 이런 것까지 (괜스레) 연관짓게 되네요.”
<한겨레21>이 송후봉씨를 처음 만난 것은 2023년 2월17일, 참사로부터 112일이 지난 뒤였다. 처음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 인근에서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유가족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아이들의 피 끓는 울부짖음이자, 국가로부터 방치된 유가족의 피눈물을 뜻하는 상징으로” 고른 빨간 목도리를 둘러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100여 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막내딸 은지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던 그에게 빨간 목도리는 은지를 매 순간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도 같았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도 송씨는 자신이 늘 들고 다니는 열쇠고리에 달았다. 은지가 무선이어폰 케이스에 달고 다니던 리본을 옮겨 단 것이다.
“은지가 무슨 의미로 달고 다녔는지 직접 물어보진 않았어요. 아마 또래 친구들의 아픔을 같이 느껴서 가지고 다니지 않았나 싶어요.”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기꺼이 돌보고, 타인의 슬픔을 자기 일처럼 공감하는 딸이었다는 걸, 송씨는 뒤늦게 곳곳에 남은 은지의 따뜻한 마음을 발견하며 깨달았다. 참사 두 달여 전 떠난 외할아버지의 납골당에 은지는 부모님 몰래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넣었다. 송씨는 몇 번이고 그 편지를 읽는다.
<i>“할머니는 걱정 마세요. 지금이라도 열심히 효도할게요. (…) 할아버지가 표현은 많이 안 해주셨어도 항상 빵이나 먹을 것 챙겨주시고 하신 게 그리워요. 다음 생에 또 저의 할아버지가 되어주세요. 사랑해요, 할아버지. 은지가♥”</i>막내인지라 집에선 ‘꼬맹이’로 불렀던 딸이 어느새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자신의 삶과 꿈을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건 빈방에서 발견한 은지의 일기장을 통해 알았다. “직장생활에 대한 고민, 사회인으로서 두려움, 연애나 결혼에 대한 생각, 이런 걸 일기 형식으로 많이 써놨더라고요. 그걸 아내와 함께 보고 많이 울었죠.” 마냥 어린 줄만 알았던 딸은 어느새 자기 앞가림을 톡톡히 해내는 어른이 돼 있었다. “야무지게 살았더라고요. 조금이라도 금리가 높은 곳을 열심히 찾아서 월급을 알뜰하게 모아두고, 아르바이트도 하고요. 그동안 자격증을 9개나 땄더라고요.”
2022년 3월, 여행 관련 회사에 들어간 은지가 직장에서도 “싹싹한 막내”였다는 이야기는 장례식장을 찾은 직장 동료들로부터 들었다. 늘 출근 시간보다 훨씬 일찍 나가던 부지런한 딸이었다. 여행을 유달리 좋아했다. 시간 나면 친구들과 대만, 러시아, 일본 등을 다녔다. 마음속에 품은 다음 여행지는 튀르키예. “튀르키예 음식이랑 문화 이런 게 좋았나봐요. 튀르키예를 꼭 가보고 싶다고 얘기했어요.”
가족과도 틈틈이 강원도 고성, 제주도 등을 다녔다. 코로나19 기간이라 마스크를 쓴 모습만이 사진으로 남은 게 송씨는 못내 아쉽다. 바다를 무척 좋아하던 딸이 “겨울 바다를 보고 싶다”는 말에 2년여 전 단둘이 함께 정동진 여행을 떠났던 날의 기억을 그는 자꾸 떠올린다. “그때 은지 얘기를 더 많이 물어볼걸 그랬어요.”
송씨는 여전히 딸의 마지막 순간에 물음표가 많이 남아 있다. 당일 함께 있던 친구의 설명과 경찰·병원·소방서 등의 답변을 조각조각 모아봤지만 빈 지점이 너무 많다. “(참사 현장인) 골목길 옆에 빈 건물이 있어요. 아마 은지는 현장에서 희생돼서 그곳에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거기서 용산 다목적체육관으로 이동한 뒤 (경기도) 평택의 장례식장까지 간 거죠.”
2022년 10월29일 일찍 잠든 송씨는 다음날인 30일 오전에야 사고가 일어난 것을 알았다. 은지와 계속 연결이 닿지 않자 경찰과 다산콜센터(서울시 민원 서비스)에 신고했다. 전날 친구와 홍익대 근처로 놀러 간다고 해서 친구 집에서 자고 오겠거니 했다. 혹시나 해서 경찰에게 딸 휴대전화 위치를 좀 알려달라고 했더니 “최종 위치가 이태원”이란 답이 돌아왔다. 가슴이 철렁했다. 피가 말랐다. “처음엔 좀 다쳤겠지, 다쳐서 치료받고 있으니까 통화가 안 되는 거겠지 생각했어요.”
순천향대학교병원과 한남동 주민센터에 들렀다. 신원 파악이 안 된 사망자 중에 은지와 비슷한 인적사항은 없다는 답변을 듣고 안심했다. 부상자가 있는 병원을 찾았다. 세브란스병원, 이대목동병원 등 이곳저곳을 돌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부상자라고 생각했어요. 경찰도 (사망자 중 은지와 비슷한 사람이 없다고) 말해줬으니까요. 그러다 오후 4시쯤 경찰이 은지와 같은 지문을 가진 사망자가 평택 장례식장에 있다고 얘기한 거예요. 그래서 달려갔죠.”
참사가 발생한 뒤 “피를 말리는” 18시간 동안 은지가 왜 평택까지 가게 됐는지, 유가족이 왜 맨땅에 헤딩하듯 여러 병원을 애타게 돌아다녀야 했는지, 참사가 발생한 뒤 이른바 ‘골든타임’ 동안 행정안전부·서울시 등 국가에서 왜 유가족에게 아무런 연락도 없었는지, 55일 활동한 ‘국회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결과 등을 어째서 언론을 통해서만 알아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태원에 있다던 은지의 휴대전화는 왜 찾지 못해 돌려받지 못했는지 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잖아요. 서울 한복판에서 이렇게 큰 참사가 발생했는데요. 국민이 어디를 가든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고요. 불가능하거나 부당한 걸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할 일을 하라는 것뿐인데….”
대형참사의 유가족이 되는 일은 곧 재난전문가가 된다는 말과도 같다. 송씨의 휴대전화에는 참사 순간을 촬영한 영상 링크가 잔뜩 저장됐다. 어려울 걸 알면서도 혹시나 은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틈날 때마다 계속 돌려본다. 그가 바라는 건 단 두 가지, 책임자 처벌과 재발 방지 대책 마련뿐이다. 그 둘만 이뤄진다면 다시 은지를 만날 때 부끄러움이 없을 것 같다. 못다 나눈 이야기도 실컷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
가끔 은지는 송씨의 꿈속에 희미하게나마 나타난다. “제 마음속에 가장 아름다운 스물다섯의 은지, 누구보다 알뜰살뜰하고 성실한 은지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겁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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