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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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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드기 같은 것

동자동 9-20에서 연희동 매입임대주택으로 이사한 6명… ‘맑은 동네’에서 그들은 섬이 돼갔다
등록 2016-02-17 14:32 수정 2020-05-03 04:28
1년  추적연재


가난의  경로


⑨ 일기
주제  일기
무대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
인물  고정국(59·남·가명), 조만수(59·남·가명), 양진영(62·남·가명), 성덕윤(62·남·가명), 최용구(57·남·가명), 엄장호(68·남·가명)
내용  동자동(서울시 용산구) 9-20 퇴거주민 43명 중 용산구 밖으로 나갔거나(사망자 2명 포함 10명) 거주지를 밝히지 않고 떠난 사람(3명)은 모두 13명이다. 주소가 확인되는 생존자 8명 중 6명이 집단 이주한 서대문구의 한 건물이 있다. 강제퇴거 과정에서 그들은 매입임대주택(한국토지주택공사가 다가구주택을 매입해 저소득·빈곤 가구에 저가 임대) 입주를 신청했다. ‘흩어지고 싶지 않다’는 소망이 받아들여져 한 건물에서 살도록 ‘선처’됐다. 2015년 5월21일 6명의 ‘합동 이삿짐’(제1064호 ‘쪽방에서 난 길은 쪽방으로 통한다’ 참조)은 1t 트럭 2대를 채우지 못했다. 양진영(동자동 9-20 204호)은 새 거처의 101호에 짐을 풀었다. 그들 6명은 퇴거자들 중 가장 좋은 방으로 옮긴 경우였다. 양진영이 이사 전후 쓴 일기엔 쪽방을 벗어나도 떼어지지 않는 ‘진드기 같은 가난’의 풍경이 선연하다.
▶지난 연재 보러가기(아래)
① 딱지
② 이주
③ 이주2
④ 곡절
⑤ 그놈
⑥ 한양
⑦ 귀가
⑧ 순례


서울시 용산구 동자동 9-20에서 강제퇴거된 주민 6명의 이삿짐이 2015년 5월21일 1t 트럭에 실려 새 거처인 서대문구 연희동으로 옮겨지고 있다.

서울시 용산구 동자동 9-20에서 강제퇴거된 주민 6명의 이삿짐이 2015년 5월21일 1t 트럭에 실려 새 거처인 서대문구 연희동으로 옮겨지고 있다.

가난의 경로는 해충의 경로

2015년 10월1일. 밤새 몸이 아파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늦게까지 뒤척이다 방에서 하루 종일 식사. 어지러움이 지속되고 방에는 아직까지 벌레 진드기가 있다. 아침에 작은 벌레 한 마리 생포. 2015년 10월18일. 방에 벌레 진드기가 한 마리 잡혔는데 손가락으로 눌러 죽이니 피가 빨간색을 띠우고(띠고) 있다. 항상 불안하다. 이놈에(의) 벌레.

새 집은 동자동 9-20으로부터 직선거리 4km 떨어져 있다. “뿔뿔이 찢어지면 고독사로 죽는다”는 생각에 6명은 한 건물에 들었다. 동자동을 떠나며 그들이 막막해했던 것은 4km의 ‘거리’가 아니라 가늠되지 않는 ‘거리감’이었다. ‘모두가 가난한 동네’에서 모여 살던 그들은 ‘일부만 특히 가난한 동네’에서 혼자 사는 것이 두려웠다. ‘옆방에서 누가 죽었는지는 아는 쪽방촌’에서 그들은 ‘옆집에서 누가 죽어도 모르는 빌라촌’으로 이사했다. 고독사는 앞으로 닥칠지도 모르는 미래가 아니라, 그들이 ‘고독생’을 살며 늘 지켜봐온 현재였다.

빈과 부의 격차가 시각으로만 감지되는 것은 아니었다. 옛 동네와 새 동네 사이엔 청각적 단절이 있었다. 악귀처럼 싸워야 내 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의 동네와 침범받지 않는 공간에서 안온한 사람들의 동네는 소리의 크기로 구분됐다. 동네에서 매입임대주택은 두 개 건물(지하 1층에 지상 4층)뿐이었다. 그들처럼 홀몸인 수급자들이 살았고, 가난한 학생과 저임금 노동자들이 깃들었다. 조용한 동네였다.

양진영은 어린 시절 넝마주이로 ‘걸밥’을 먹었고, 청년 땐 북파공작원과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장년기엔 원양어선을 타고 전세계의 바다 위로 떠다녔다(제1070호 ‘개발의 환부를 걷다’ 참조). 새 동네의 주민들은 동자동에선 볼 수 없던 “쌩쌩한 물건들”을 내다버렸다. 양진영은 침대와 매트리스를 주워 방에 놓고 사용했다. 그날부터 몸이 가렵고 따가웠다. 진드기인지 빈대인지 깨알만 한 벌레들이 온몸을 물어뜯었다. 눌러 죽이면 똑 하고 붉은 피가 터졌다. 스트레스로 살이 10kg 빠졌다. 빼먹을 것 없는 방에 와서 피까지 빨아먹는 놈들이 그는 미웠다. 침대와 매트리스를 내다버렸다. 한 달 동안 매일 청소하고 빨래했으나 벌레는 제거되지 않았다. “저것들을 퇴치하든 내가 동자동으로 돌아가든 결판을 내겠다”며 24시간 불을 켜놓고 벌레를 잡았다.

양진영이 버린 침대·매트리스를 성덕윤이 주워갔다. 동자동 9-20에서 가장 높은 층(401호)에 살았던 성덕윤은 연희동 ××-××의 가장 낮은 층(지하 2호)으로 내려갔다. 월세가 지상(보증금 50만원·17만2천원)의 절반(보증금 50만원·9만8천원)인 지하방을 그는 동자동 동료들을 제치고 서둘러 계약했다.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년) 때 이라크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그는 뒷목에 권총을 겨눈 민병대에게 회사 차를 빼앗기고 살아남았다. 진드기인지 빈대인지 깨알만 한 벌레들이 지하 2호에서 번식하며 그를 깨물었다. 성덕윤도 침대·매트리스를 저주하며 주워온 곳에 다시 갖다버렸다.

조만수의 방은 양진영의 맞은편(104호)이었다. 동자동 9-20에선 양진영의 아래층(109호)에 살았다. 조만수는 매주 목요일 새벽마다 집을 나서 백석역(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에서부터 26.3km의 ‘짤짤이’(제1095호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순례’ 주인공) 길을 걸었다. 몸무게를 3kg쯤 회복한 양진영이 104호에 놀러갔을 때 조만수는 다리를 긁고 있었다. 양진영이 버린 침대와 매트리스 위에서 조만수의 야윈 다리가 붉었다.

가난의 경로는 해충의 경로였다. 이사하는 짐에 묻어 바퀴벌레들도 이사했다. 누군가 버린 물건들은 가난한 사람의 집으로 옮겨졌고, 그 물건들이 버려지고 주워지는 차례를 밟아 벌레들도 따라갔다. 피를 빠는 것들과 피를 빨리는 자들은 대개 같은 동선 위에 분포했다.

한 달 만에 동자동으로 재이사 2015년 10월11일. 동자동에서 연희동으로 이사 온 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외로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이대로 이 한세상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못다 한 것이 너무 많아…. 이 깡통 같은 삶.
연희동 매입임대주택으로 이사 온 동자동 9-20 퇴거 주민들이 각자의 방으로 짐을 나르고 있다.

연희동 매입임대주택으로 이사 온 동자동 9-20 퇴거 주민들이 각자의 방으로 짐을 나르고 있다.

양진영은 “동자동에서 나가면 햇볕 드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 연희동의 원룸은 남대문·동자동의 쪽방들과 비교 불가했다. 동자동 방보다 5배(5~6평 남짓)쯤 크고, 방마다 개별 화장실이 있으며, 작은 베란다도 딸려 있다. 양진영에겐 “이런 방에서 살아본 지 25년 만인지 기억도 안 나는 크기”였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예요?” 이사하던 날 트럭에서 짐을 내리는 6명을 쳐다보며 한 주민이 물었다. 주민은 입주 상황을 살피러 온 LH 직원에게 항의했다. “(임대주택에) 이사 오는 사람들이 밤마다 술 먹고 소리 지른다”며 불편한 마음을 표했다. “우리는 고급한 사람들이에요.” 조만수가 웃는 표정을 지키며 말했다. 그들을 맞는 불편한 시선에 그들의 마음도 불편해졌다. “동네가 맑아.” 성덕윤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맑은 동네’에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고정국의 방(103호)은 양진영의 방과 대각선으로 마주 봤다. 고정국은 집에서 밥을 해먹지 않았다. 매일 무료급식소를 찾아다니며 끼니를 해결했다. 연희동으로 이사하면서 그의 ‘밥길’이 고돼졌다. 서울역과 접한 동자동에선 이동이 수월했는데, 연희동에선 지하철역까지 별도 버스비가 들었다. 수급자인 그에게 ‘상수’가 된 추가 교통비는 큰돈이었다. 그는 방 대신 밥을 택했다.

고정국은 이사 한 달 만에 동자동(9-20으로부터 직선거리 80m 거리의 5-×)으로 되돌아갔다. 둘째 달 월세 납입일 하루 전날이었다. 거주 약정 기간(2년)을 채우지 못해 임대주택 보증금도 포기했다. 그는 연희동에 있을 동안 이삿짐을 풀지 않고 살았다. 동자동으로 재이사하는 날 ‘동자동 출신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알리면 못 가도록 잡을 게 뻔하니까 동자동에 미리 방 얻어놓고 조용히” 짐 싣고 떠났다.

‘더 나은 방’을 얻어 나간 뒤 동자동의 ‘더럽고 좁은 방’으로 되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깨끗한 동네에서 정을 못 붙이는 사람들”이었다. ‘단절된 좋은 집’보다 ‘부대낄 누군가’가 다급한 이들이었다. 주거환경은 개선돼도 그들 삶의 신산함은 개선되지 않았다. “동네를 떠나면서 혼자 섬이 돼버린 사람들”이 “원수처럼 싸우면서도 얼굴 맞댈 이웃들이 있는 동네”(우건일 사랑방마을공제협동조합 이사장)로 돌아왔다. 방이 커지고 햇볕을 얻었으나, 온기는 따라 부풀지 않았다. 햇볕도 양진영의 축축한 외로움을 말려주진 못했다.

2015년 9월27일. 명절 한가위 추석이지만 쓸쓸하고 외롭다. 어느 곳도 갈 수 없는 나 자신이 미웁다(밉다). 연희동 우리 집 사람들 내 방에 불러놓고 송편, 포도, 빵 몇 가지 준비해놓고 외로움을 달랬다. 나보다 더욱 외로운 분들 마음이 찡하고 서글퍼 (각자 방으로) 돌아간 다음에 울었다.고립감과 외로움과 우울증

조만수와 고정국은 동갑이었고 단짝이었다. 동자동 9-20에서 방문을 열면 복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방 안이 훤히 보였다. 두 사람은 연희동에 와서 방을 붙였다. 고정국의 이사 사실을 몰랐던 조만수는 그의 귀가를 기다리며 이틀 동안 집 앞에서 서성였다.

“일 년을 살고 이 년을 살아도 서로 얼굴도 모르는 동네에 와서” 조만수는 우울증이 심해졌다. 고정국이 동자동으로 돌아간 뒤엔 “죽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나 같은 쓰레기는 자다가 눈을 안 떴으면 좋겠다” 싶어 자살을 고민하기도 했다. 보건소에서 치료약을 처방받았지만 우울증은 가시지 않았다. “갑자기 갑갑해지고 무의식적인 욕”이 튀어나와 “임자 잘못 만나면 사고 칠 것 같은 두려움”에도 휩싸였다. 동자동에서 온 사람들도 “다들 독고다이”가 돼갔다. 집 안에 숨어들면 얼굴 보기 어려웠다.

“마음의 불덩어리를 털어내며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 그는 시장에서 강아지를 한 마리 샀다. 교회에서 주는 교통비를 모아 값을 치렀다. 건강이 나빠져 일주일간 병원에 입원하면서 강아지를 양진영에게 맡겼다. 이튿날 양진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먹이를 너무 많이 줘서 그런가….” 양진영이 강아지의 죽음을 전했다.

퇴원한 조만수는 길거리에서 폐컴퓨터들을 주워와 방에 쌓았다. 무작정 해체해 재조립하기를 되풀이했다. 알 수 없이 엉킨 회로를 들여다보며 그 속에서 길을 잃을 때가 오히려 편안했다. ‘뽀삐’가 온 뒤에야 마음의 날이 조금 가라앉았다. “같이 밥 먹을 생명체”가 생겨 안심이 됐다. 강아지 뽀삐는 동자동에서 2만원을 주고 데려온 ‘마로’의 새끼였다. 마로 주인 김(69)씨도 동자동 9-20 106호에서 6년을 살다 골목 맞은편으로 이사 갔다. 양진영은 마로를 “커피 마시는 개 ‘마르고 닳도록’”이라고 불렀다. 지난해 봄 9-20 주민들은 입구에 앉아 건물주의 강제퇴거 집행에 대비했다. 그때마다 마로는 양진영의 무릎 위로 뛰어올라 그가 마시던 종이 커피를 핥아 먹었다.

2014년 9월3일. 대학병원에서 장애 진단서가 나왔다. 왠지 더욱 외롭고 소외된 기분이다. 아픈 곳이 너무 많다. 뇌질환, 간질(경기), 어지러움증, 골다공증, 간·폐질환, 만성기관지염, 수면장애, 고혈압, 당뇨병…. 병명이 10가지가 넘는다.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2015년 11월7일. 기온이 뚝 떨어져 많이 추워졌다. 오늘은 어지러움 증세가 더 심하고 잠자리에서 경련도 있고 꿈자리가 심하다. 이 고통의 시간을 얼마나 더 견뎌낼 수 있을까.

양진영은 아침에 18알의 약을 먹는다. 점심 땐 4알, 저녁 땐 17알을 삼킨다. 하루 40여 알의 약이 식도를 거쳐 그의 위에 이른다. 동자동 쪽방에 있을 때 뇌전증(간질)이 발작하면 그는 탁자 밑으로 몸을 집어넣어 스스로를 가뒀다. 위험한 행동인지 아닌지를 발작 중에 따질 수는 없었다. 붙들어줄 사람 없는 그의 경련을 좁은 방이 잡아줬다.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면 몸이 엉망이 돼 있었다. 세면장에서 쓰러진 뒤 병원에서 정신이 들거나, 계단에 얼굴을 들이받고 모서리에 눈을 찍었다. 재래식 화장실에 한쪽 발이 빠진 채 눈을 뜨기도 했다. 이빨도 땅에 부딪혀 앞니 두 개만 남았고, 틀니를 했으나 틀니마저 깨져 강력본드로 붙여 사용했다. 과거 온갖 방법을 동원했던 그의 자살 시도는 죽음이 몰아붙이는 공포 때문이었다. 가난할수록 아팠고, 아플수록 죽고 싶었으며, 죽으려 할수록 몸이 망가졌고, 몸이 망가질수록 가난해졌다. 가난한 자의 무한궤도였다.

그는 동자동에서 ‘평이하게’ 아팠다. 주민들은 예외 없이 최소 서너 개 이상의 병을 안고 살았다. 헷갈리지 않기 위해 삼시 세 때 먹는 약 종류를 종이에 써 벽마다 붙였다. 달력엔 병원별·질병별로 진료 날짜를 표시했다. 주검으로 발견된 주민이 ‘치워진’ 방에선 병원 처방전과 진료 기록이 수북했다.

가난한 자의 무한궤도2015년 11월6일. (동자동) 사랑방서 10만원 생활자금 대출. 집에 와서 삶의 질 향상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 기역(억)으로는 어릴 적 쌀밥이 그렇게 먹고 싶어 논으로 이삭을 주우러 가서 많이 주워서 집에 갖다주었다. 방아(앗)간에서 탈곡하여 집에서 보리쌀 위에 쌀을 안쳤는데, 아버지 한 그릇 푸고 나머지는 보리쌀하고 ??(섞)어서 밥을 먹게 대였(되었)다. 한숨만 가득 차서 그다음부터 절대 이삭 주우러 가지 않았다. 2015년 11월7일. 눈만 뜨면 한숨이 나온다. 건강이 안 좋아 하고 싶은 일도 못하고 정부에서 주는 생활 자금으로 아끼고 또 아끼고 하지만 항상 부족하다.

엄장호(지하 3호)는 동자동 9-20에서 성덕윤과 같은 층(4층)에 살았다. 연희동에서도 두 사람은 같은 층(지하 3호)을 쓴다. 동자동에서처럼 연희동 방에서도 육감적인 미녀들이 그의 벽에서 다리를 꼬거나 누워 있었다. ‘가족 모델’이 사이좋게 둘러앉아 화목한 밥을 나누는 사진이 미녀들 사이에서 어색하고 그리웠다. 그는 같이 밥 먹을 가족이 없었다.

지난해 초겨울 엄장호는 얼굴로 돌진하던 날벌레 한 마리를 손으로 쫓으며 말했다. “이 동네 벌레는 이 계절에도 사람한테 막 대들어. 우리가 힘없는 인간인 줄 아는 거지.”

연희동으로 이사한 첫날 그와 양진영은 가스비와 전기세부터 걱정했다. “지하방이니까 비 오는 날만 잠깐 보일러 켜서 습기 제거하고 꺼야지.”(엄장호) “타이머 잘 맞춰서 자동으로 꺼지도록 해야지 그냥 두면 큰일 나요.”(양진영)

겨울이 깊어질 때 성덕윤은 말했다. “보일러 트는 방법을 시방도 몰라요.” 엄장호가 받았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보고 틀어야지. 난 가스비 5만원 이상 나오면 안 낼 거야. 못 내. 어떻게 내.”

겨울이 치솟던 2016년 1월 조만수의 방에서 양진영과 조만수가 토론을 벌였다. “가스비·전기세 무서워서 동자동으로 다시 갈까봐.”(조만수) 강제퇴거 전 동자동 9-20의 월세(보증금 없음) 15만원엔 공과금이 포함돼 있었다. 연희동 매입임대주택에선 월세와 가스비·전기세·수도세는 별도였다. “절약해서 살아야지.”(양진영) “더 절약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조만수) “불 안 켜고라도 살아야지.”(양진영) “전기세 많이 나올까 전구도 하나만 달았어.”(조만수) “촛불 켜고라도 살아야지.”(양진영) “가스비 아까워서 부루스타(휴대용 버너) 쓴다고.”(조만수)

방 밖에선 최용구(동자동 9-20 거주 당시 403호)가 느리게 계단을 올랐다. 그는 한쪽 다리가 10cm 짧았다. 태어날 때부터 절룩이며 평생을 살았다. 사출업체에서 일하다 프레스기에 눌려 손가락 3개를 잃었다. 남들은 쉽게 움켜쥔 것들이 그의 듬성한 손가락 사이로 물처럼 빠져나갔다. 파악할 수 없는 수의 집단이 최용구의 이름을 도용(제1077호 ‘잡히지 않는 그놈들’ 주인공)해 차를 사고, 돈을 빌리고, 회사를 만들었다. 동자동에서부터 따라온 추심 독촉서들이 새 집에서 다시 쌓이고 있었다. 최용구의 머리로는 계산 불가능한 액수의 채권이 “죽을 때까지”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의 연희동 방은 301호였다. 그의 눈앞에 3층 계단이 빙벽처럼 가팔랐다. 동자동을 떠난 뒤에도 그와 그들은 각도를 줄이지 않는 빙벽에서 변함없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영상 이창민 감독 liberachang@gmail.com

*1년 추적 ‘가난의 경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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