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춘의 햇볕 아래서 장미 꽃송이들이 시위하듯 빨갛게 터졌다.
영등포역을 끼고 도는 담벼락 끝에서 5월의 쪽방촌은 푸르렀다. 푸른 철조망이 푸른 침엽수림을 둘러싸고 푸른 하늘을 향해 시퍼렇게 솟구쳤다. 철조망을 타고 몸집을 불린 장미 넝쿨들이 안과 밖을 나누며 ‘구별짓기의 첨병’이 되고 있었다. ‘붉게 익은 아름다움’은 잘 가꾼 녹지를 누군가로부터 지키느라 가시를 세운 채 소비됐다.
나무의 땅엔 본래 사람이 살았다. 서울시와 영등포구는 2003년(영등포본동)과 2005년(영등포동) 두 차례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의 거처를 부수고 녹색을 펼쳤다. 2005년 제559호(쪽방 사람들, 가도가도 반경 1km!)는 이렇게 보도했다.
“2003년 10월27일 새벽 6시. 영등포 쪽방 50년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이날 서울시와 영등포구는 영등포1동 618-5 일대 쪽방 200여 동(1545m²)에 철거반을 투입해 건물을 허물었다. 영등포역으로 향하는 철로변은 70년대 중반 ‘시설녹지’로 지정된 시유지로, 쪽방을 허물고 남은 터에 나무와 풀을 심기 위해서였다. (…) 공사는 2004년 1월에 끝났고, 쫓겨난 사람들은 3개월치 생활비로 계산된 주거이전비(420여만원)나 임대아파트 입주권 가운데 하나를 받고 뿔뿔이 흩어졌다. (…) 영등포구는 이르면 올해 5월께 영등포2동 422 일대 쪽방 60여 가구(1702m²)를 추가 철거할 계획이어서 이곳 쪽방은 다시 한번 깊은 정적에 빠져 있다.”당시 은 영등포본동(옛 영등포1동) 쪽방 철거민들의 ‘2년 뒤’를 추적했다. 철거민 114명 중 집주인 24명을 뺀 90명을 대상으로 했다. “추적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발견됐다”고 기사는 썼다. 34.4%인 31명이 바로 옆 영등포동(옛 영등포2동) 쪽방으로 옮겼고, 11.1%인 10명이 골목 건너 문래동에 있었다. 영등포본동의 얼마 안 남은 미철거 쪽방으로 간 사람은 2명이었다. 집단 철거로 방이 품귀한 영등포역 주변을 떠나 도림동과 한강성심병원 쪽으로 각각 4명과 3명이 이동했다. 4명이 노숙인이 됐고, 2명이 사망했다. 공공임대아파트로 간 사람은 5명뿐이었다. 1명이 병원에 입원했고, 9명이 타 지역으로 움직였으며, 19명은 추적에 실패했다. “놀라운 사실”을 기사는 이렇게 요약했다. “대다수가 무너진 옛집으로부터 반경 1km를 벗어나지 못했다.”
보도 뒤 10년이 흘렀다. 은 10년 전 71명의 오늘을 재추적했다. 가난해서 가난한 땅에 살다 가난하게 철거된 사람들의 ‘가난의 궤적’을 좇았다. 2005년 조사를 지원했던 김형옥 영등포쪽방상담소장(당시 간사)의 도움을 다시 받았다. 상담소가 2003년부터 2014년까지 집계해온 ‘영등포 쪽방 주민 사망자 명단’부터 훑었다. ‘충격적 결과’가 확인됐다.
71명 중 3분의 1을 넘는 주민들(35.2%)이 10년 새 세상을 떠났다. 전체 142명의 사망자 중 25명이 영등포본동 철거민이었다. 등포여서가 아니라 쪽방이어서 죽음은 찾아왔다. 죽음은 지역보다 공간(제1059호 사람 사는 쪽방마다 죽겠다·죽는다·죽었다 참조)에 조응했다. “과한 술로 간이 상한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 연고자 없이 고독사했다”고 김 소장은 전했다.
다섯 번째 철거 뒤엔 120여 개만 남게 돼유길천(가명)은 영등포본동 철거 뒤 영등포동 쪽방으로 옮겨간 31명 중 한 명이다. 철거는 그의 삶에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영등포동으로 이주한 지 2년 만에 그는 또다시 철거(2005년 5월부터 진행된 영등포동 철거사업)로 집을 잃었다. 영등포동 철거 시작 직후(2005년 6월6일) 그는 당뇨 합병증으로 가난한 삶을 마감했다.
2005년 조사 때 철거보상금을 술로 바닥내고 노숙에 이른 사람이 4명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3명이 사망했다. 2006년 9월, 2009년 9월, 2011년 11월 차례로 호흡을 멈췄다.
1936년생인 ㅈ(남)은 평생 보따리 행상을 하며 살았다. 때수건과 면봉, 손톱깎이, 치약·칫솔 등을 짊어지고 다니며 팔았다. 그는 2013년 인천 월미도에서 가진 돈을 다 쓴 채 바다에 뛰어들었다. “신변 비관”으로 그의 죽음은 정리됐다.
지팡이를 짚고 문래동 쪽에서 걸어온 ㄱ(72)이 5월26일 오전 장미 철조망 앞에 앉아 숨을 골랐다. “허리에 쇠토막 8개를 박아서 뻐걱뻐걱한다”며 고장 난 허리를 두드렸다. ‘허리 둘레 12년짜리’ 나무들이 땅을 점령하기 전 ㄱ은 ㅈ의 옆집에 살며 함께 행상을 다녔다.
영등포역 쪽방촌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영등포본동과 영등포동, 문래동으로 갈린다. 철거민들은 20~50m만 움직여도 3개의 행정구역을 넘나든다. 이동했으나 이동하지 않은 것과 같다. 철거민 25명은 가난에 결박당해 사실상 제자리에서 죽었다. 10년 전 무너진 집에서 반경 1km를 벗어나지 못했던 쪽방 철거민들은 10년 뒤에도 그 안에 있었다. 머리가 새하얗게 세고 이빨이 모두 빠진 ㄱ(74) 할머니는 철거 뒤 20m를 움직여 12년을 살았다. 망자들을 제외한 46명 대부분이 철조망 밖에서 철조망 안의 옛 집터를 바라보며 세월을 견뎌왔다.
영등포 쪽방촌의 역사는 ‘철거의 역사’다. 1980년대 말 고가도로 건설과 2000년대 녹지 조성 등을 목적으로 네 차례의 철거가 1평 집들을 훑어갔다. 1300여 개였던 쪽방이 540여 개로 줄었다. 문래동과 영등포본동의 남은 쪽방 440여 개도 2009년 정비구역으로 지정됐다. 다섯 번째 철거가 이뤄지면 영등포엔 120여 개 방만 남는다.
“주민들이 거듭된 철거에도 쪽방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더 나은 방으로 갈 돈이 없으니까.”
김 소장의 설명은 간명했다. 돈은 정주와 이주를 논증하는 가장 명확한 언어다. 무료급식소(광야교회·토머스의집)의 존재도 주민들을 끌어당긴다. 극빈한 사람들이 서울역과 남대문 쪽방촌으로 모여드는 까닭도 동일하다. 영등포 쪽방 철거 뒤 동자동(용산구) 쪽방으로 이사한 사람들도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물길을 타고 가난하지 않은 땅을 우회해 가난한 곳으로만 흐른다.
반전 없는 시간 “사람 사는 곳은 마찬가지”“월세(9만4천원)를 3개월 못 내면 임대계약을 해지한대요. 지금부터 3개월 뒤면 언제예요?”
5월26일 오후 동자동에서 강유진(36·가명·여성)은 만나는 사람마다 물었다. 10여 년 전 아버지의 폭행을 피해 집을 나온 그는 영등포 광야교회 쉼터에서 6~7년을 살았다고 했다. 동자동 9-3에 이사 온 뒤 2013년 ‘리모델링 논란’(서울시와 쪽방상담소의 쪽방 주거환경 개선사업 과정에서 2 개 건물 주민 30여 명이 리모델링을 이유로 집에서 내몰리는 사태 발생) 때 방을 비웠다. 현재 그는 서울 신림동의 매입임대주택에 산다. 그는 “먹을 게 없다”며 얼굴에서 근심을 지우지 못했다.
장성춘(가명·남)은 영등포동에서 2010년 동자동으로 회귀했다. 영등포 쪽방촌에 가기 전 그는 동자동과 남대문 쪽방에 살았다. 그는 “사람 사는 곳은 마찬가지”라고 했다. 가난한 그가 찾아갈 수 있는 ‘사람 사는 곳’도 정해져 있었다.
반전 없는 시간이 흘렀다. 영등포 쪽방 주민들을 이끌어온 ‘가난의 지도’가 동자동에서 다시 그려지고 있다. ‘영등포본동의 12년’ 궤적이 동자동 9-20에서 내몰린 주민들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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