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강제퇴거자들 ‘귀가의 경로’

되돌아온 사람은 전체 퇴거 대상자 45명 중 9명뿐 “이사하기 힘들고” “춥고” “꼭 돌아가야 할 이유가 없어서”
등록 2015-12-17 17:40 수정 2020-05-03 04:28

301호 ㄱ(84)이 하얀 종이에 4개의 문장을 썼다. 방문 앞에 붙인 뒤 큰 소리로 읽었다.
“땀이 있는 곳에 돈이 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친구가 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사회복지가 있다. 쪽방의 삶은 인생의 블랙홀이다.”
종이 하단엔 “김가나다 씀”이라고 적었다. 김가나다는 발명가 ‘백도라지’ 할아버지(제1070호 ‘개발의 환부를 걷다’ 참조)가 “1950년대부터 써온 우리말 이름”이다. 그는 한자식 이름을 “중국 사대주의”라고 믿었다.
“새로 입주하는 놈들이 ‘새 마음으로 새 삶을 살라’는 뜻에서 쓴 글이야. 각성하고 살란 소리야. ‘인생의 블랙홀’이란 단어를 쓴 사람이 없어. 문학이 뭐가 문학이냐. 삶의 시를 써야 문학 아니냐.”

보수공사 뒤 동자동 9-20에 재입주한 311호 ㄱ(맨 오른쪽)이 자신의 새 방(2**호)에서 옛 노숙 동료였던 지하 4호 ㅇ(새 방은 1**호·가운데)과 끼니를 끓이고 있다.

보수공사 뒤 동자동 9-20에 재입주한 311호 ㄱ(맨 오른쪽)이 자신의 새 방(2**호)에서 옛 노숙 동료였던 지하 4호 ㅇ(새 방은 1**호·가운데)과 끼니를 끓이고 있다.

홀로 도드라진 ‘노랑’

동자동(서울시 용산구) 9-20의 리모델링 공사가 끝났다. 지난 11월9일부터 새 입주민들이 방을 채우기 시작했다. 301호 ㄱ은 강제퇴거 전부터 9-20의 최고령 주민이자 최장기(18년) 거주자였다. 그는 강제퇴거에 불응했다. 끝까지 방을 비우지 않고 버텨낸 두 사람 중 한 명이다. 그의 방 천장에선 찢어진 벽지가 젓가락이 헤집은 생선 껍질처럼 너덜거렸다. 그의 방은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었다. 동자동 9-20 주민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견뎌왔는지를 공사되지 않아 ‘이질’이 된 방으로써 증언했다.

노랑. 가시 스펙트럼 576∼580nm(나노미터·10억분의 1m) 사이의 빛깔. 가장 눈에 잘 띄는 원색. 무채색 건물로 가득한 동자동에 샛노란 건물이 하나 생겼다. 잿빛이던 9-20이 보수공사를 거치며 노란색을 입었다. 홀로 도드라졌다.

건물 구조도 바뀌었다. 공사 전 모두 46개이던 방이 공사 뒤엔 51개로 늘었다. 1층 교회를 쪼개 방 2개를 만들었고, 4층 방 5개를 재분할해 7개로 늘렸다. 지하 창고도 방 하나가 됐다. 검은 매직펜으로 써넣었던 방 번호는 플라스틱 표찰로 대체됐고, 세면장(Wash)과 화장실(W·C)은 영어로 표기됐다. 화장실엔 좌변기가 설치됐다. 출입구 위엔 ‘해 뜨는 집’이란 이름도 붙었다.

“게스트하우스로 바꿔 이익을 실현하겠다”던 건물주는 지난 9월 용도변경을 포기(제1084호 ‘몇 명이 돌아올지 알 수 없다’ 참조)했다. 퇴거 거부 주민들이 제기한 공사중지가처분을 법원이 받아들이자 쪽방을 유지키로 했다. 서울시가 건물주와 4년 임대계약을 체결(서울역쪽방상담소에 위탁 운영)한 뒤 새 입주민을 받았다. 방값은 평균 1만원을 올리는 선에서 책정했다. 퇴거당한 주민들이 원할 경우 입주 우선권을 부여했다.

9-20의 강제퇴거 대상 주민은 45명(지난 2월4일 퇴거공고 직후 사망한 1명 포함)이었다. 그들 중 12월11일 현재 재입주한 사람은 9명(20%)이다. 퇴거에 응하지 않은 4명이 포함된 수다. 4명 중 2명(301호 ㄱ·203호 ㅂ)은 건물주와 공사업체의 퇴거 종용에도 끝까지 건물 밖으로 짐을 빼지 않았다. 다른 2명(106호 ㄱ·303호 ㅂ)은 법원 결정 뒤 방 보수를 위해 19-**(9-20으로부터 60m 거리)로 잠시 거처를 옮겼다. 그들의 짐에 숨어 있다 19-** 방에서 기어나온 바퀴벌레들도 두 달 뒤 9-20의 본래 방으로 귀환했다.

새 방을 구해 이주했다 되돌아온 강제퇴거 주민은 결국 5명뿐이다. 박수광(61·가명)은 11월10일 재입주 뒤 열흘 만에 건물 안 계단에서 실족사했다. 강제퇴거 전 살던 방(박수광의 옆방)에 짐을 푼 유민식(48·가명)은 박수광의 사망 전날 그의 방에서 소주를 마셨다.

돌아오는 이유와 돌아오지 않는 이유

311호 ㄱ(54·퇴거 전 방 번호)은 박수광이 세상을 떠난 날 돌아왔다. 퇴거에 불응하던 그는 건물주가 전기를 끊은 당일(6월23일) 밤 깜깜한 복도에서 넘어져 출혈·입원했다. 퇴원 뒤엔 9-**(10m 거리)에서 살았다. 젊어서 봉제 노동자였던 그는 1980년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워커 발로 까이고 곤봉으로 쌔려 맞으며” 살아남았다. 노숙 시절엔 무당을 따라 인왕산을 오르내리며 “굿당에 돗자리 깔아주고 음식 차려주면서” 밥을 얻기도 했다. 2**호로 방을 옮겨 재입주한 그는 지하 4호 ㅇ(63·퇴거 전 방 번호)의 방도 구두계약을 해줬다.

1**호로 돌아온 지하 4호 ㅇ은 311호 ㄱ과 노숙 동료였다. 독립문(서대문구)·사직동(종로구)에서 함께 거리잠을 잤고 한때 인왕산 굿당 관리도 같이 했다. 지난해 10월 말 점심밥을 먹고 돌아온 그가 방문을 열었을 때 전날 밤 찾아와 잠자리를 얻었던 또 다른 노숙 동료(56)는 차갑게 죽어 있었다(제1059호 ‘사람 사는 쪽방마다 죽겠다·죽는다·죽었다’ 참조).

지하 10호 ㄱ(80·퇴거 전 방 번호)은 지하 **로 귀가했다. 강제퇴거 뒤 9-**(2m 거리)에서 살았다. 그는 어릴 때 미군 하우스보이로 일하며 생을 구했고, 젊어선 고급 요정에서 ‘뜨르르한 인간들’(제1070호 ‘개발의 환부를 걷다’ 참조)의 술시중을 들었다.

공사 중엔 퇴거 주민뿐 아니라 동네 이웃도 건물을 들여다보며 방값을 계산했다. 골목 건너 전세 2천만원짜리 방에 사는 부부까지 지하 1호 방에 관심을 보였다. 정작 재입주가 시작되자 그들은 기존 방을 떠나지 않았다. 퇴거 주민의 80%(36명)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사하는 게 너무 힘들거든.”

강제퇴거 초기 밤새 건물을 지키며 철거에 대비했던 211호 ㄱ(53·45m 거리로 이사)은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방값만 맞으면 다시 온다”던 208호 ㅇ(60)도 9-*(40m 거리)에 머물렀고, “지금 사는 방이 너무 좁아 완공되면 바로 재입주한다”던 103호 ㄱ(61)도 9-**(2m 거리)에 그대로 있다. 지하 5호 ㅅ(80) 할머니는 9-20 때보다 월세가 7만원이나 비싼 방(크기는 더 작음·40m 거리)에 살면서도 “거긴 너무 시끄럽다”며 귀가할 뜻이 없었다.

“겨울이 오는데 너무 추워.”

지하 9호 ㄱ(79·2m 거리의 9-**로 이사)은 ‘퇴거 불응 최후의 5명’에 속할 만큼 완강하게 저항했다. 겨울 앞의 그는 추위가 무섭다고 했다. 쪽방 건물은 밤 10시부터 아침 8시까지만 난방을 했다. 개별 방에선 난방을 켜고 끌 수 없었다. 9-**는 전기패널을 깐 바닥 위에 자갈을 올리고 시멘트를 발랐다. 천천히 덥혀지고 서서히 식었다. 9-20은 전기패널 위에 장판만 깔았다. 급하게 끓고 빨리 식었다. 난방이 되지 않는 오후 3시께 9-**의 방은 여전이 따뜻했지만 9-20의 방바닥은 차가웠다.

그 방이 아니라 ‘그 방 즈음’으로

‘미귀가자들’이 재입주해야 할 뚜렷한 이유가 9-20에 없었다. 그들에게 쪽방은 몸을 누이는 집이었지만 반드시 돌아가야 할 집은 아니었다. 가난한 자들은 작은 충격으로도 산개한 뒤 꼭 그 방이 아니라 ‘그 방 즈음’으로 돌아왔다. 어떤 일이 있어도 되돌아가야 할 본래의 자리가 없다는 것이 가난한 자들이 흩어지는 방식이었다. 돌아갈 이유는 없으나 완전히 멀어질 수도 없다는 것이 가난한 자들이 모이는 방식이었다. 가난한 자들은 가난한 방 주위를 인공위성처럼 맴돌며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노란 페인트가 덧칠한 건물 벽에서 잿빛이 변함없이 선명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