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 에필로그
▶지난 연재 보러가기(아래)
① 딱지
② 이주
③ 이주2
④ 곡절
⑤ 그놈
⑥ 한양
⑦ 귀가
⑧ 순례
⑨ 일기
⑩ 박멸
2015년 초 ‘작은 사건’ 하나가 발생했습니다. 서울 용산구 동자동 9-20 쪽방 건물 방마다 전원 퇴거요구 딱지가 붙었습니다. 주민들은 저항했으나, 건물주는 완강했습니다. 퇴거는 강행될 것이었고, 주민들은 흩어질 것이었습니다.
건물 보수를 앞세운 강제퇴거는 가난한 동네에서 반복해 벌어지는 일이었고, 건물 보수를 위해 삶의 붕괴를 감내해야 하는 일은 가난한 사람들이 되풀이해 겪는 숙명이었습니다. 강제퇴거는 주민들에게 느닷없이 닥친 충격이었지만, 그들의 가난을 형성하며 동자동 9-20으로 이끈 익숙한 길이기도 했습니다. 강제퇴거라는 ‘사건’은 가난한 자들의 ‘일상’이었습니다.
강제퇴거란 ‘사건’은 가난한 자들의 ‘일상’쪽방을 대하는 정치와 자본과 언론의 ‘관습’이 있습니다. 유력 정치인들은 ‘쪽방 숏’을 연출하며 민생탐방을 시작합니다. 연말이 되면 대기업 사장단은 그룹 로고가 박힌 옷을 입고 쪽방촌에서 ‘사랑’을 기증합니다. 한 뼘 방에 갇힌 주민들은 가득 찬 물건들에 치여 옴짝달싹 못한 채 눕거나 앉아 있습니다. 쪽방을 떠올릴 때마다 연상되는 이 이미지들은 ‘연출’이 이뤄질 때마다 언론을 통해 포착되고, 전파되며, 고착돼왔습니다.
언론은 사건과 일상을 구분합니다. 사건은 ‘기사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지만, 일상은 ‘이야깃거리’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사건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일은 신문의 ‘귀한 지면’과 방송의 ‘비싼 화면’을 얻기 어렵습니다. 그 메커니즘을 아는 누군가는 스스로 사건이 되고자 단식을 하고, 누군가는 하늘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며, 누군가는 자신의 목에 줄을 매거나 몸에 불을 붙입니다.
사건과 일상엔 위계가 부여됩니다. 언론은 누군가의 일상을 사건으로 만들어주지만, 누군가의 사건은 일상으로 대하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발화되지 않은 속마음까지 읽어 사건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언론이지만, 누군가의 전 생애를 뒤흔드는 사건을 없었던 일처럼 외면하는 것도 언론입니다.
쪽방 주민들의 사건은 그들의 힘만으론 ‘사건화’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앉을 수 없는 방에 정치인이 들어와 손을 잡거나, 재벌 임원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고 물품을 나줘줄 때, 쪽방의 공고한 일상은 특별한 사건이 됩니다. 화재가 발생해 사람이 죽거나, 추위와 더위에 허덕이는 장면이 필요하거나, 명절에도 고향을 찾지 못하는 외로움을 보도해야 할 때, 언론은 쪽방을 사건으로 채택합니다. 정치와 자본과 언론은 ‘가난의 상징’으로 쪽방을 소비해왔습니다. ‘가난한 이미지’의 수요가 있을 때마다 ‘가난의 전시장’으로서 쪽방은 공급돼왔습니다. 쪽방은 가난을 표상하기도 하지만, 가난을 가리는 껍질이 되기도 합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가난한 동네에 살아서 가난한 것일까. 가난해서 가난한 동네에 사는 것일까. 가난해서 강제퇴거를 당하는 것일까. 강제퇴거를 당해서 가난한 것일까. 첫째·셋째 질문은 현재를 살피면 알 수 있습니다. 둘째·넷째 질문은 과정을 따라가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쪽방 건물은 방마다 한 가구의 집입니다. 동자동 9-20은 45가구가 사는 45개의 집이었습니다. 강제퇴거가 끝나면 지하 1층·지상 4층짜리 건물 한 채가 거대한 철거촌으로 변하는 ‘사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태는 사건 이후에 있습니다. 강제퇴거는 사건이지만 사건의 전과 후는 일상입니다. 사건은 수습되지만 일상은 수습되지 않습니다. 쫓겨나는 사건보다 무거운 사태는 쫓겨난 뒤의 삶입니다. 가난은 강제퇴거란 사건에 있지 않고 강제퇴거 이후의 일상에 있습니다. 사건에 초점을 맞추면 보도는 강제퇴거에서 그치고 맙니다. 사건 뒤 일상에 주목해야 강제퇴거와 가난과의 관계를 좇아갈 수 있습니다. “가난의 뿌리는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머무는 곳으로 이끈 길들과 그 길을 찌르는 뾰족한 돌멩이들 틈에 박혀 있”(제1070호 ‘개발의 환부를 걷다’ 참조)습니다.
‘가난의 전시장’으로서 쪽방1년 동안 동자동 9-20 강제퇴거 주민 45명을 추적했습니다. 쓴 이야기보다 쓰지 못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따라가다 놓친 주민도 있고, 따라올 길을 이어준 주민도 있었습니다. ‘가난의 경로’를 동행하며 확인한 가난의 속성들이 있습니다.
가난은 모입니다. 강제퇴거로 흩어지기 전 모든 주민을 한 번 이상 만나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 시급했습니다. 층과 층, 방과 방을 옮겨다니며 그들의 삶을 기록할수록 드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왜 ‘이런 사람들’이 예외 없이 ‘이곳’에 모여 있을까. 서로 다른 연령대와 출생지와 사연을 가진 45명에게서 뚜렷한 공통점이 확인됐습니다. 고령층은 한국전쟁 때 고아가 됐거나 고아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부모가 있는 경우 극도로 가난했고 부모는 그들을 건사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가난은 가족관계를 끊어놓았고, 끊어진 관계는 주민 90% 이상을 중학교 미만 학력으로 묶었으며, 저학력은 ‘인맥’이라 불리는 것을 넘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노숙 경험자가 최소 77.5%에 달했습니다.
그들에게 뿌리가 없다는 것은 인연이 전무하다는 뜻이 아니라 관계를 틀어쥘 힘이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체제와 제도와 인식은 그들에게 동자동 외에 머물 곳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각자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걸어온 듯하지만, 신이 거대한 핀셋으로 집어 옮긴 것처럼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방 한 칸으로 찾아들었습니다. 그들을 만나며 ‘거주 이전의 자유’란 말을 믿지 않게 됐습니다.
가난은 고입니다. 극빈의 이동거리는 직선거리 100m를 넘지 못했습니다. 강제퇴거 뒤 1년 동안 주민 29명(64.4%)이 100m짜리 밧줄에 허리를 묶은 것처럼 동자동 안에서 움직였습니다. 한데 모인 가난은 작은 파동(강제퇴거)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졌고, 흩어졌으나 제 갈 길을 찾아가지 못한 가난은 모였던 곳으로 돌아와 다시 고였습니다. 사람은 어디든 갈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철거(퇴거)는 자석처럼 붙어다닙니다. 동자동 9-20의 주민 다수가 강제퇴거를 중복 경험했습니다. 10년 전 강제퇴거로 쪽방에서 쫓겨난 지하 5호 ㅅ은 10년 뒤 강제퇴거의 운명을 되풀이했고, 9-20에 닥친 강제퇴거는 109호 ㅊ에겐 3번째 내몰림이었습니다. 분명 가난은 철거와 강제퇴거를 거치며 순도를 더하고 있었습니다.
정치가 불의할수록 가장 약한 자들부터 가난해집니다. 근로재건대에 붙잡혀 ‘부랑아’로 관리된 사람(106호 ㄱ, 108호 ㅇ, 201호 ㅂ 등)이 흔했고, 삼청교육대(108호 ㅇ, 204호 ㅇ, 311호 ㄱ 등)에 끌려가 죽음을 넘나든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지탱해줄 끈이 허약할수록 불의한 현대사의 파동에 크게 휩쓸렸고 삶을 파괴당했습니다.
가난한 동네는 극적으로 노출되고 가난한 사람은 극적으로 사라집니다. 동자동은 가난을 드러냄으로써 존재하는 동네입니다. 도시의 밝음과 맑음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도 어둡고 탁한 것들을 몰아넣은 땅은 부각되고 조명받습니다. 가난한 땅을 공인하는 행위는 가난하지 않은 영토와 경계짓는 일이기도 합니다. 가장 가난한 동네에서 관심을 끌던 사람들은 동네를 벗어나자마자 ‘숨은 그림’이 됩니다. 동자동에서 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이 서대문구 매입임대주택으로 이사한 뒤엔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됐습니다. 가난하지 않은 동네에서 가난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 존재로서 존재 가능합니다. 101호 ㄱ은 동자동으로 돌아가서야 다시 ‘보이는 사람’이 됐고, 그의 단짝 109호 ㅊ은 서대문구에 남아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가장 가난한 동네란 ‘명성’은 사적 인프라가 됩니다. 주거 조건이 나아져도 동자동을 떠나기 싫어하는 주민이 많았습니다. 동자동이 가난한 동네로 소비되면서 얻는 ‘이득’이 있었습니다. 기업이나 사회복지단체의 지원이 관행적으로 집중되면서 주민들은 반찬이나 쌀이라도 얻을 수 있는 ‘행운’을 기다렸습니다. 매입임대주택으로 나간 사람들이 호소하는 불편도 동자동보다 못한 ‘사적 복지체계’였습니다.
가난의 경로는 해충의 경로입니다. 서대문구 매입임대주택으로 이사한 204호 ㅇ이 동네에서 버려진 매트리스를 주워 쓰다 진드기가 옮았습니다. 그가 버린 매트리스를 동자동 동료 401호 ㅅ이 가져간 뒤 그의 몸도 진드기에 뜯겼습니다. 그 매트리스를 다시 자기 방으로 나른 109호 ㅊ이 그 위에 앉아 붉은 몸을 긁었습니다. 동자동 9-20의 퇴거 거부자 303호 ㅂ이 공사를 위해 근처 쪽방으로 옮겼을 때 바퀴벌레들이 그의 짐에 묻어 따라갔습니다. 그가 9-20으로 되돌아와 307호에 재입주하자 그의 방은 화재 뒤 잿더미처럼 검은 곰팡이에게 점령당했습니다. 피를 빠는 것들과 피를 빨리는 자들은 같은 동선 위에서 살아갑니다.
끊어낼 수 없는 일상과 어떻게 대결할 것인가그들의 가난은 빨래 같았습니다. 평생 철거와 강제퇴거를 반복하며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쫓겨다니는 삶은 빨면 빨수록 너덜너덜해지는 낡은 천조각 같았습니다. 빨아서 색깔을 바꾸고 냄새를 지워도 찢긴 구멍은 기워지지 않았습니다. ‘가난의 경로’ 탐사보도가 가난을 소비하고 대상화해온 시선을 극복했다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의도와 달리 ‘가난의 겉’만 오히려 강화했을지도 모릅니다. 과정은 부산했지만 결과는 옹색합니다. 이 세계가 퇴치했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결코 멸절되지 않는 ‘가난의 속’은 그 부끄러움을 딛고 계속 탐구돼야 합니다. 스스로 다시 묻습니다. 언론은 ‘세기적 사건의 충격이 아닌, 끊어낼 수 없어 무서운 일상’과 어떻게 대결할 것인가.
탐사보도 ‘가난의 경로’가 영화로도 제작되고 있습니다. ‘가난의 경로’는 1년 추적 연재를 시작할 때부터 영화 프로젝트를 병행했습니다. 문자만으로는 포착하지 못하는 가난의 다층을 영상이 보완할 수 있길 바라며 전문 다큐멘터리 제작진과 협업해왔습니다. 연재 기사와 함께 공개된 하이라이트 영상들은 머지않아 온전한 영화로 옷을 바꿔 입을 것입니다.
같은 공간을 취재하고 같은 사람을 좇으며 같은 시간을 건너왔지만 기사와 영화는 각자의 시선으로 독립적인 작업을 해왔습니다. 현재 영화는 올 하반기 완성을 목표로 후반 작업 중입니다. 영화가 완성되면 문자 매체와 영화가 결합한 탐사보도의 새 영역을 개척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창민 감독은 가톨릭 사제의 길을 걷다 다큐멘터리 연출가가 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2014년 사진가 김영수를 통해 기억과 재현, 역사에 질문을 던지는 다큐멘터리 영화 을 연출했습니다. 현재 다큐멘터리 창작집단 ‘L336’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가난의 경로’ 영화 제작진은 다음과 같습니다.
연출 이창민, 프로듀서 조민석, 촬영 오현진, 조연출 이지영·오현경, 제작 아남네시스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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