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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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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가장 가난한 자들의 도읍

대한민국 국민도 외국인도 아닌 멍에를 쓰고 살아온 무적자들… 성본도 주민등록증도 없던 이들이 국민 되길 갈망하며 깃든 ‘실재하지 않는 땅’
등록 2015-10-29 18:36 수정 2020-05-03 04:28
1년  추적연재


가난의  경로


⑥ 한양
주제  한양
무대  서울시 용산구 동자동 9-20, 동자동 9-××,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418-×× 일대
인물  김문호(가명), 강봉수(가명), 정철식(가명), 이형구(가명), 이대수(가명), 박상제(가명)
내용  동자동 9-20 주민들이 집단 이사 간 건물에서 몇 달 전 무연고자 한 명이 사망했다. 존재하는 땅의 일원으로 살지 못했던 그는 존재하지 않는 땅의 사람으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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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딱지
② 이주
③ 이주2
④ 곡절
⑤ 그놈


서울시 용산구 동자동 9-20의 쪽방 보수공사가 거의 마무리되고 있다. 페인트 벗겨진 건물 외벽도 노란색으로 다시 칠했다. 건물주는 퇴거를 거부한 주민들의 공사중지가처분이 받아들여지자 게스트하우스로의 용도변경을 포기했다. 이르면 10월 말부터 재입주가 시작될 예정이다. 건물은 보수됐으나 흩어진 주민들의 삶이 다시 꿰매질진 알 수 없다.

서울시 용산구 동자동 9-20의 쪽방 보수공사가 거의 마무리되고 있다. 페인트 벗겨진 건물 외벽도 노란색으로 다시 칠했다. 건물주는 퇴거를 거부한 주민들의 공사중지가처분이 받아들여지자 게스트하우스로의 용도변경을 포기했다. 이르면 10월 말부터 재입주가 시작될 예정이다. 건물은 보수됐으나 흩어진 주민들의 삶이 다시 꿰매질진 알 수 없다.

‘한양 김씨’의 시조가 죽었다.

병문안 3시간 전 김문호(1961년생 추정·가명)는 화장됐다. 그의 상태를 살피러 병원을 찾은 지인은 그의 안녕 대신 사망을 확인했다. 심폐소생술은 소용없었다고 의료진은 말했다. 소지품에선 충북 청주 쪽 연락처가 나왔다. 전화를 걸었으나 받는 사람이 없었다. 시조가 죽자 대도 끊겼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 그는 떠나버렸다. 동자동 9-20의 강제퇴거 주민 9명(전체 45명 중 단일 주소지 최다)이 9-××로 흘러와 고였을 때 김문호는 없었다. 그는 9-××에서 3년을 살았다. 9-20 지하 6호 ㅇ(64), 지하 7호 ㅇ(63), 지하 8호 ㅁ(63), 지하 9호 ㄱ(79), 지하 10호 ㄱ(80), 101호 ㄱ(63), 104호 ㅇ(64), 202호 ㄱ(78), 302호 ㅊ(59)이 당도한 건물에서 그는 이미 기억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101호 ㄱ(63)과 202호 ㄱ(78)은 김문호가 살던 층에 방을 얻었다. 그들은 그곳에 존재했던 김문호의 한때를 의식하지 못한 채 남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떠나고 도착하는 것이 일상으로 되풀이되는 공간에서 떠난 자의 자취를 도착하는 자가 더듬을 의무는 없었다.

성도 본도 없는 ‘무적자’의 죽음

김문호는 ‘추정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1961년생으로 추정됐다. 그의 성(姓)도 추정이었고, 그의 고향도 추정이었다. 추정된 것들에 바탕한 그의 인생도 추정 위에 축조됐다. 흐릿한 것들을 부여잡고 평생을 살았던 그에게 선명한 것은 오직 가난과 질병뿐이었다.

지난해 12월20일 김문호는 숨을 멈췄다. 그는 폐의 기능을 잃었다. 병원 입원과 노숙, 쪽방 생활을 오가다 뼈만 남도록 말라갔다. 그는 신속하게(사망 5일째) 가루가 됐다. 연고자가 없을 때 이뤄지는 자치단체의 ‘가족찾기’(최소 14일)도 생략됐다. 찾아도 찾을 인연이 없음을 국가는 이미 2008년 입증했다.

‘김’으로 지칭됐고, ‘문호’라고 불렸다. 무연고자 김문호는 ‘무적자’였다. 연고의 기초인 성과 본(本)이 없었다. 그는 국민으로 등록되지 않고 살았다. 대한민국의 등록 국민이 되려면 그는 반드시 누군가의 후손이어야 했다. 혈구와 혈장으로 이뤄진 피에 계통과 질서를 부여하는 성본 없인 국가라는 상상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없었다. 성본을 새로 만들려면(상자 기사 참조) 이 땅에서 피로 연결된 관계가 전무함을 확증받아야 했다. 그 확증이 죽은 김문호의 장례를 당겼고, 그의 떠남을 아무도 배웅할 수 없게 했다.

한양. 그 땅으로 뻗은 길은 가난했다. 자기 앞에 부려진 길을 47년‘가량’ 걷고서야 김문호는 한양에 이르렀다. 추정한 정보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국가는 한양을 본으로 내렸다. 선조를 갖지 못한 김문호는 시조가 됐다. ‘한양 김씨’의 시조(한양을 본으로 삼은 모든 김씨의 시조란 뜻은 아님)로서 죽기 전 7년 동안만 그는 국민(2008년 주민등록)이었다.

“그냥 내버려둬.”

강봉수(1981년생 추정·가명)의 아버지 최씨가 짜증을 냈다. 새벽 인력시장에 나간다던 강봉수는 하루(지난 9월16일) 종일 허리를 말고 누워 있었다. “아파서 아침부터 저러고 있다”며 아버지가 문을 닫아걸었다.

강봉수는 ‘미상’의 출처를 가졌다. 부모도 미상이었고, 미상 번지에서 출생했다. 갓난아기였을 때 서울시 은평구의 보육원에 버려졌다. 강봉수는 누군가의 기억과 조합으로 구성된 사람이었다. 이름은 원장이 지었고, 생년도 원장의 회고에 의존했으며, 월일은 광복절에서 가져왔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보육원에서 나온 뒤 15살 때부터 영등포 쪽방에서 살고 있다. ‘동거 아버지’ 최씨가 영등포로 강봉수를 데려왔다. ‘고아원에서 막 나오는 애를 불쌍해서 키웠다’고 최씨는 동네 사람들에게 알렸다. 입양 절차는 밟지 않았다.

‘추정되는 자들’의 땅으로

강봉수는 2003년 2월 서울가정법원의 허가로 ‘한양 출신’이 됐다. 2004년 3월엔 서울남부지방법원의 결정으로 호적(현 가족관계등록)을 얻었다. 일가를 이룰 권리를 받았으나, 한양 땅에 그가 이룬 일가는 없다.

한양은 어느 왕조의 도읍이 아니다. 정치·경제를 둘러싼 각축과 쟁탈의 중심지도 아니다. 한양은 ‘추정되는 자들의 영토’며 존재하지 않는 땅이다. 한양은 문서에서만 실재하고, 한양에 적을 둔 자들은 서류로만 파악되며, ‘동향인’끼리도 서로의 있고 없음을 모른다. 실재하지 않는 땅에 기원을 둔 자들은 자기 삶의 실제가 과연 실재하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강봉수의 동네 사람 정철식(1937년생·가명)과 이형구(1936년생·가명)는 철거 전(영등포동 618-×)에도 철거 뒤(영등포동 418-××)에도 같은 주소를 사용했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층층으로 쌓여 단일 번지에 200여 가구를 이뤘다. 2003년 서울시와 영등포구가 이 땅을 철거하자 두 사람은 직선거리 40m를 이동(제1064호 ‘죽음의 이유는 쪽방이라서’ 참조)해 다시 동일 주소지에 깃들었다.

“국민이란 아무런 증거도 없다”

그들은 ‘국민 된 증거’ 없이 살았다. 2002년 법원에 성본 창설 허가를 신청했을 때 정철식의 보증인들은 “무적자로서 주민등록상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증거가 아무것도 없다”고 썼다. 정철식은 경남 진양군(현 진주시)에서 났다. 스무 살(1957년) 때부터 부모와 연락을 끊고 전국을 떠돌았다. 주민등록제도(1962년 5월10일 실시)가 없던 시절 도민증으로 자신을 입증하며 살았다. 새 신분증을 만들 생각도 못하고 ‘노가다’와 노점상을 하며 연명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무렵 영등포 쪽방에 들어왔다. 쪽방 철거 1년 전 보상 대상자 파악 과정에서 그는 신원이 조회되지 않아 제외됐다. ‘무보상 철거민’이 된 그는 영등포를 떠나 종적을 감췄다. 2007년 영등포로 돌아왔을 때 그는 국민이 되길 열망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나고 살아왔지만 법상 대한민국 국민도 아니고 외국인도 아닌 멍에를 안고 살아왔다”고 재판부에 호소했다.

정철식은 2008년 3월 ‘한양 정씨’로 주민등록됐다. 평생 때수건과 면봉, 손톱깎이, 치약·칫솔 등을 짊어지고 다니며 팔았다. 그는 2013년 인천 월미도 앞바다에서 주검으로 떠올랐다. 국민 자격을 얻은 지 5년 만에 닥친 그의 죽음은 ‘신변 비관 자살’로 처리됐다. ‘수급비 모은 돈을 다 쓰고 떠나려 한 것 같다’는 경찰의 전언이 동네에 퍼졌다. 아까웠던 것인지, 쓸 줄 몰랐던 것인지, 주머니에서 나온 현금이 꽤 됐다. 정철식의 행상엔 이형구(2003년 2월 ‘한양 이씨’로 성본 창설)가 동행했다. 1년 뒤 이형구는 친구를 따라 ‘영원한 동행’에 나섰다.

한양의 바깥은 사회보장의 불모지다. 한양에 입성하지 못한 무적자들은 황폐 속에서 주름진다.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고, 은행 계좌를 만들 수 없으며, 장애등록과 사회복지시설 입소가 불가능하다. 임대아파트를 신청할 수 없고, 선거권을 행사할 수도 없다. ‘유적자들’에게 허락된 모든 국민 대우로부터 ‘비국민 무적자’는 제외(기초생활수급의 경우 무적자에게도 임시번호를 발급해 혜택)된다.

정철식·이형구의 행상 동료 이대수(1940년생·가명)는 오른쪽 팔뚝 아래가 없다. 장애 판정을 받지 못한 채 의수를 끼고 보따리 장사를 했다. ‘기록 없는 자’가 된 이유도 정확히 모르고 살아왔다. 그는 경주 혈통이 되고 싶어 했다. 아버지의 본을 경주라고 기억했다. 법원은 ‘경주는 불가하다’며 한양에 속하길 권했다. 경주 이씨의 후손이 되려면 생사도 확인되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 부자관계를 입증해야 했다. 그는 2003년 9월 ‘한양인’이 됐다.

무적자들이 한양 성곽으로 진입하려면 신원조회를 통과해야 한다. ‘무적의 세계’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동정보다 의심을 받는다. 주민등록증 없이 수십 년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경찰은 중국 범죄자들이 국내 정착을 위해 성본 창설을 악용(2011년 12월 경찰의 ‘중국 살인 혐의 수배자들 검거’ 발표 등)하는 건 아닌지 확인한다. 간첩 여부도 검증받는다. 영등포 쪽방 주민 박상제(1932년생·가명)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 보상 협의 과정에서야 자신이 ‘미확인 국민’이란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국민으로 확인받는 날’을 그리며 지난 시간을 진술했다. “평양에서 출생해 한국동란 때 북한 인민군으로 참전했고,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전향해 대한민국에서 생활해왔다….”

고령일수록 한양 가는 길(취적 절차)은 멀다. 정철식, 이형구, 이대수는 모두 의심받았다. 이형구의 신원조회에서만 무전취식 전과가 나왔다.

의심을 이겨야 등록을 얻는다

죽은 김문호가 적(籍)을 얻은 땅. 죽은 정철식·이형구와 살아 있는 강봉수가 품에 안긴 땅. 생사를 알 수 없는 이대수·박상제가 도달했을지 모를 땅. 그 땅에서 누구의 혈족도 되지 못한 자들이 자기 성씨의 첫 조상이 됐다. 그들은 시조가 되기 전에도 혼자였고 시조가 된 뒤에도 혼자였다. 가족과 소속과 출처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가난의 경로’를 따라 찾아든 가상의 땅은 안온하면서도 차갑다.

그 땅, 한양. 가장 가난한 자들의 도읍.

무적자  규모와  ‘국민  등록’  절차


성본  결정은  재판부  재량


‘무적자’의 정확한 규모는 파악되지 않는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0년대 중·후반 정부에 무적자 인권 개선을 수차례 권고했고, 행정자치부·보건복지부는 일제 조사(2005년 법무부는 민간단체 추정을 근거로 3만여 명 언급)를 벌이기도 했다.
대한법률구조공단은 2008년부터 2015년 7월 말까지 모두 761건(이후 가족관계등록 창설 소송 759건)의 성본 창설 소송을 지원했다. 사법연감에서 확인되는 2014년 가족관계등록(옛 호적) 창설은 1961건(노근리 사건·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제주 4·3 등 관련 특별법에 따른 가족관계등록 창설 모두 포함)이다.
무적자가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으려면 성본부터 만들어야 한다. 가정법원에서 허가받은 성본을 근거로 지방법원에 가족관계등록 창설을 청구한 뒤 자치단체에 주민등록을 신청한다. 부모를 알 수 없는 사람의 성본 결정은 가정법원 재판부의 재량에 맡겨져 있다. 서울을 본으로 신청한 경우 보통 ‘한양’으로 지정된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영상 이창민 감독 liberachang@gmail.com

*1년 추적 ‘가난의 경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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