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박멸
주제 박멸
무대 서울시 용산구 동자동,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5가
인물 박철관(78·가명), 김형구(56·가명)
내용 박철관은 동자동에 산다. 김형구는 퇴계로(서울시 중구)에 산다. 박철관은 동자동에서 동자동으로 이사했다. 김형구는 남대문로5가에서 퇴계로로 이사했다. 박철관은 김형구를 모르고, 김형구도 박철관을 모른다. 그들의 청춘은 서로 다른 시기에 속했고, 그들의 기억은 서로 다른 길 위에 분포한다. 평생 만난 적은 없으나, 평생 ‘쌍둥이 삶’을 살았다. 국가가 ‘정화’를 선언할 때마다 해로운 벌레처럼 제거됐고, 도시가 ‘정비’를 추진할 때마다 고장 난 부품처럼 치워졌다. 도시의 찬란은 가난한 동네로 동정 없이 진격했고, 가난한 그들은 찬란에 떠밀려 예외 없이 쫓겨났다. 가난한 ‘쌍생’이 가난한 땅에 이르러 가난하게 박멸되고 있다.
▶지난 연재 보러가기(아래)
① 딱지
② 이주
③ 이주2
④ 곡절
⑤ 그놈
⑥ 한양
⑦ 귀가
⑧ 순례
⑨ 일기
박철관이 풀 위에 소주를 뿌렸다. 나무를 베어낸 숲에서 푸른 잡초가 땅을 뚫고 봄을 맞았다. “60년 만에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었”다. “오늘(4월18일) 아니면 살아서 다시 올 일 없을 텐데 술이라도 부어주고” 싶었다. “이 섬(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출신이라면 누구라도” 그 풀밭에 술 한잔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땅을 덮은 잡초가 황량하고 황폐한 밭을 이뤘다. 박철관은 가게에서 사온 붉은 사과를 잡초밭 초입에 놓았다. “도둑놈의 새끼들.” 그가 참고 있던 욕을 뱉었다. “말뚝이라도 박고 이름이라도 써놨어야지, 나쁜놈들.”
‘원생공동묘지’는 묘지인지 평지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묘의 봉분인지 땅의 굴곡인지도 알기 힘들었다. 나무를 베어 숲과 구분했을 뿐 돌보지 않은 잡초밭 아래에서 신원미상의 뼈들이 달그락거렸다. 섬을 탈출(중노동과 인권유린으로 정확한 수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도망치다 사망)하다 숨진 원생들이 쓰레기처럼 매립됐다. “모두 내 동지들”이라며 박철관은 낮은 숨을 쉬었다. 탈출에 실패했다면 그도 그 잡초 아래 있을지 몰랐다. 묘지 옆 소나무가 바닷바람에 쓸리며 가지를 흔들었다.
김형구는 잊기 전에 틈틈이 적었다. 1960년 1월2일생. 지금부터 46년 전 악마의 소굴로 끌려가 겪었던 몸서리쳐지는 10여 년간의 기억들을 적어봅니다. (…)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머리를 빡빡 밀어버리고 ‘장군의 방’이라는 데로 집어넣는데 (…) 식사 후 내무반에서 주기도문, 사도신경, 국민교육헌장, 원훈 암기. 이 시간부터 죽음의 시간. 몽둥이를 들고 중간 부분을 외우라 하여 어물거리면 호박 깨지는 소리가 퍽퍽. 구타. 기합. 지옥이 따로 없음. (…) 영양실조와 피부병으로 온몸에 고름이 줄줄 흐르고 (…) 밤만 되면 신입들이 잡혀오고 기를 꺾기 위해 폭행이 시작되고. (…) 열중쉬어 자세로 이십 대 중반의 소대장이 (열두 살인 내) 가슴을 백 대 때리는데 쓰러지면 등짝을 발로 찍고 얼굴을 발로 차 앞니가 깨졌다. 한 달 가까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고 온 가슴은 새까맣게 멍이 들어 살아남은 것도 기적이었다. 송○○라고 나보다 두 살 많은 친구는 아침식사 집합하러 가는 도중에 쓰러져 죽었다.
박철관은 섬으로 끌려갔다. 1950년 12월 할아버지가 흥남부두에서 배를 태웠다. 가족을 북에 두고 혼자 부산에서 피란했다. 자갈치시장에서 생선 대가리를 주워 깡통에 끓여 먹고 살아남았다. 1950년대 후반이었으며 10대 후반이었다고 기억한다. 인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 방공호에서 자다 ‘후리가리’(일제단속)를 당했다. 배에 실려 ‘선감도’(1942년 일제가 조선소년령을 발동해 만든 ‘부랑아 감화원’을 1946년 경기도가 넘겨받아 1982년까지 운영)로 운반됐다. ‘할당’을 채우기 위해 경찰은 가족 있는 아이들까지 잡아넣었다. 염전 노동은 허기진 십 대가 감당할 일이 아니었다. 빡빡머리에 하얀 단체복을 입고 도망가면 섬 주민들이 붙잡아 ‘선감학원’에 넘겼다. 그는 6개월 만에 섬을 탈출했다. 일주일에 한 번 들어오는 보급선에 숨어들어 목숨 걸고 바다를 건넜다. 넝마주이, 구두닦이, 장의업, 수감생활, 거리노숙을 거쳐, 한 평 방 동자동 9-20 201호에 닿았다.
그들은 철거되고 퇴거됐다김형구는 ‘복지원’으로 끌려갔다. 1968년 반포된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운 뒤였다고 기억한다. 부산 서면에서 극장 구경하던 김형구(당시 국민학교 5학년)를 번쩍 들어 차에 실은 사람은 박인근(원장)이었다. 집에 보내달라는 그를 구타하며 ‘형제복지원’(1975년 제정된 내무부 훈령에 따라 1987년까지 ‘부랑인 선도’를 이유로 감금·폭행)으로 데려갔다. 1976년 탈출하다 붙잡혀 사흘을 굶으며 두들겨 맞았다. 출퇴근하는 ‘작업장 아저씨’에게 몰래 약도를 주고 집에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한 달 뒤 큰누나와 작은아버지가 그를 찾아왔다. 8년 만(1978년)에 형제복지원을 나와 버스를 타자 다섯 정거장 만에 집에 닿았다. 항구에서 어선 경비를 서고, 주먹들과 싸우고, 쇠를 깎다 왼손 검지가 파이고, 강남 개발 때 덤프트럭 뒤에서 “오라이 오라이”를 외치고, 방범대원과 경찰을 때려 구치소에 갇혔다가, 한 평 방 남대문로5가 2××번지 106호에 깃들었다. 박철관의 방과 김형구의 방은 직선으로 560m 거리에 있었다.
박철관이 동자동에 도착했을 때 “환부를 도려내고 새살을 붙이는 정형수술”( 1984년 9월29일치)의 한가운데로 그의 삶도 흘러들었다. 동자동(남대문경찰서 북동쪽)과 남대문로5가(남대문경찰서 뒤쪽)는 옛 이름 ‘도동’(도동1동이 동자동으로 편입)과 ‘양동’으로 불리며 서울의 정면이자 이면을 구성했다. 두 동네는 남산 진입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봤다. 한국전쟁 직후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사람들이 맞닥뜨리는 서울의 첫 얼굴이면서 무허가 판잣집들이 밀집한 ‘도시의 후미’였다. 1955년 7월 박철관처럼 전쟁을 피해 월남한 22가구가 도동에서 비를 맞으며 밤을 새웠다. 그들이 몸을 의탁하던 “적산가옥에 집주인이 ‘집달리’를 데려와 조속 퇴거를 명령”했다. 1958년 8월10일 판잣집 철거를 반대하는 주민 800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 앉아 결사반대를 외쳤다. 동자동 9-20의 사용승인은 1968년 8월에 났다. 다섯 달 전 중구청 공무원들이 철거정지가처분 결정이 내려진 동자동 건물을 밤에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승인 석 달 뒤엔 서울시의 강제철거로 동네 주민 42가구 200여 명이 노숙했다.
김형구가 남대문로5가에 이르렀을 때부터 그 땅의 운명을 따라 그의 방도 지워질 운명에 처했는지 모른다. 1970년대 양동(부정적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1980년 7월 남대문로5가로 개칭)은 “폭력과 도난과 우범자들이 들끓는 난장판”( 1977년 12월23일치)으로 묘사됐다. “수도 서울의 얼굴에 먹칠하는 곳”이었고, “가출한 청소년들이 악의 소굴로 빠져”드는 장소였다. 돈벌이가 급한 어린 여성들이 몸으로 생계를 잇는 서울 최대의 집창촌도 양동에 있었다. 양동·동자동 일대의 2600명 주민을 광주대단지(경기도 성남)로 이주시키는 것이 1970년 중구청의 ‘새봄 새 사업’으로 홍보됐다. 힐튼호텔에서 1985년 국제통화기금(IMF) 총회가 예정되자 주차장 건설을 위해 주변 판자촌·집창촌이 정리당했다. 1950년대 이후 계속돼온 철거-개발-이주의 역사 위에 2015년 박철관·김형구의 강제퇴거의 경로가 얹혔다.
박철관의 방문 앞에 노란 퇴거 딱지(2015년 2월)가 붙었다. 안전진단 결과 건물 노후화로 위험등급을 받았다며 건물주는 전원 퇴거를 요구했다. 게스트하우스로의 리모델링이 숨은 이유였다.
매일 점심시간이면 판자촌을 허물고 들어선 고층 빌딩에서 직장인들이 쏟아져나왔다. 동자동 쪽으로 길을 건너 9-20이 접한 골목 아래까지 왔다. 그들은 밀물처럼 밀려와 밥을 먹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식사가 끝난 그들은 동자동에 머물지 않았고 쪽방 골목길을 오르지도 않았다. 그들이 밟지 않는 골목의 좁은 방 안에서 박철관은 하나의 찬으로 혼자 밥을 먹었다. 직장인들이 먹는 동자동 식당 밥을 박철관은 비싸서 사먹지 못했다.
점심 손님들이 빠져나간 골목에서 중국 관광객들이 캐리어를 끌며 게스트하우스를 찾았다. 동자동에만 값싼 게스트하우스가 5곳 있었다. 3곳은 가난한 사람들이 머물던 쪽방과 여관을 용도변경했다. 동자동에 게스트하우스가 생긴 시기를 주민들은 2013년 전후라고 기억했다. 중국 관광객(2012년 283만6982명→2013년 432만6869명)이 일본 관광객(2012년 351만8792명→2013년 274만7750명) 수를 뛰어넘으며 폭증한 때와 겹쳤다. 동자동 9-20 강제퇴거도 이 흐름 위에서 발생했다. 가난한 동네로 관광과 세계화가 진입하며 가난한 자들의 주거를 흔들었다.
그들은 고작 그렇게 움직였다김형구의 방문 앞에 하얀 퇴거 공고(2015년 10월)가 붙었다. 안전진단 결과 건물 노후화로 위험등급을 받았다며 건물주는 전원 퇴거를 요구했다. 도시환경정비사업이 숨은 이유였다.
“내가 본래 천민으로 태어나서 천민처럼 살아온 것이냐”고 김형구는 자문했다. 평생을 따라다니는 불운의 정체를 그는 납득할 수 없었다. 남대문로5가 253번지 일대(1만3827.5m²)의 고층 빌딩 건설 사업이 그의 방을 철거 대상에 넣었다. 최고 높이 124.69m(지하 8층 지상 28층)의 6500억원짜리 공사를 위해 월세 35만원(2명이 절반씩 부담)짜리 쪽방 주민들이 쫓겨났다. 양동 시절부터 성을 팔며 밥을 벌었던 여성들이 나이가 쌓여도 손님을 받으며 철거구역 안에 있었다. ‘포주 할머니’가 된 여성들이 ‘아직은 영업하는 여성들’을 데리고 옆 골목 지하방으로 옮겨갔다. 윤정헌(61·가명)은 강제퇴거 직후 죽은 채 발견됐다. 그는 남대문로5가 쪽방에서 11년을 살았다. 단전·단수 뒤엔 홀로 방을 지키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단식투쟁을 했다. 그는 퇴거에 불응하며 방문을 잠근 뒤 거리에서 노숙했다. 지난 1월17일 아침 한 쪽방에서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박철관은 16년 살아온 방을 결국 비웠다. 동자동 안에서 직선거리 35m 떨어진 쪽방으로 이사했다. 9-20에선 없었던 보증금을 50만원 걸었고 월세가 3만원(15만원→18만원) 올랐다. 강제퇴거 1년 동안 동자동 9-20 주민 45명 중 29명(64.4%)이 동자동 안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 전원이 밧줄에 몸을 묶은 듯 직선거리 100m 안에서 움직였다. 김형구도 2년 살았던 방(해당 번지에서는 6년째)을 결국 비웠다. 260m 거리의 중구 퇴계로 쪽으로 짐을 날랐다. 철거구역 안에 살던 쪽방·고시원 주민 중 30명의 소재를 중구청이 파악했다. 그들 중 22명(73.3%)이 중구에 머물렀다. 8명은 용산구(4명)와 구로구(2명), 동대문구(1명), 종로구(1명)로 흩어졌다. 19명(63.3%)이 쪽방으로 이사했고 6명은 고시원에 방을 얻었다. 28명이 수급자였고 13명이 65살 이상 고령자였다.
동자동에서도, 남대문로5가에서도, 그들은 고작 그렇게 움직였다. 가난해서 쫓겨난 그들은 가난해서 멀리 가지 못했다. 그들을 도시에서 밀어내는 것이 가난이었지만 그들을 도시에 붙들어두는 것도 가난이었다. 밝고 맑은 도시는 자력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어두운 것들을 몰아 가둔 땅이 있어야 그들 없는 깨끗하고 찬란한 도시도 완성됐다. 불결한 전자가 사라지면 순결한 후자도 유지되지 못할 것이었다.
78년과 56년을 꾸려온 박철관과 김형구의 살림살이가 가방 하나에 욱여넣어질 만큼 바짝 말랐다. 박철관이 이사한 건물(동자동 7-*) 옆방에선 최중호(61)의 맞춤 양복이 주인 없는 방을 지켰다. 동자동 9-20에서 최중호는 210호에 살았다. 박철관은 이삿짐을 쌀 때 최중호의 가방까지 쌌다. 강제퇴거 때 구치소에 있었던 최중호는 박철관에게 가방을 부탁했다. 2015년 7월 출소한 최중호를 박철관이 옆방으로 불러 방값도 내줬다. 최중호는 3개월 뒤 ‘새 사건’으로 구치소에 재수감됐다. 지난 2월 그가 박철관에게 편지를 보냈다. 6월에 출소한다며 건물주가 방을 빼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그는 거듭 “말씀 잘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놈이 죽지도 않고 감방에서 부탁만 한다”며 박철관이 역정을 냈다. 그가 가파른 계단을 딛고 오른 3층 건물이 맞은편 빌딩 아래에서 싹둑 잘린 나무둥치처럼 웅크렸다.
‘박철관들’과 ‘김형구들’의 누적된 경로불의한 현대사가 박철관과 김형구의 가난을 키웠다. 그들의 가난을 변방으로 밀어내며 도시는 덩치를 키웠다. 수십 년 거듭된 ‘정비’와 ‘정화’로 동자동과 남대문로5가 주위엔 올려다보기도 벅찬 빌딩숲이 솟았다. 그 숲들이 강렬한 빛을 발산하며 어둡고 움푹한 쪽방을 굽어봤다. 박철관과 김형구가 숲을 헤치며 오간 길은 두 사람만의 경로가 아니었다. 50년 넘게 그 길을 밟아온 ‘박철관들’과 ‘김형구들’의 걸음이 2016년 박철관과 김형구의 가난한 경로 위에 누적돼 있다. 정치와 행정이 오랫동안 지워왔지만 ‘박철관들’과 ‘김형구들’은 완벽하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들은 닦아도 닦이지 않는 얼룩처럼 도시에 묻어 끝내 살아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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