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이주
주제 이주
무대 서울 용산구 동자동 9-20,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69-××
등장인물 101호 ㄱ(58), 109호 ㅊ(59), 204호 ㅇ(61), 401호 ㅅ(61), 403호 ㄱ(56), 404호 ㅇ(67)
줄거리 세입자들의 퇴거 불응이 계속되자 9-20 건물주는 ‘가장 약한 고리’를 앞세워 개별 압박에 나선다. ‘결사반대’를 외치던 주민들도 하나둘 방을 비우기 시작한다. 5월26일 아침부터 뜯고 부수고 찢는 소리가 9-20 건물을 흔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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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딱지
가난한 방들이 내장을 드러냈다.
여미고 추슬러 허기를 채웠던 좁은 방들에서 문짝이 떼어졌다. 창문이 뽑혔고, 선반이 주저앉았다. 벽지가 피부처럼 벗겨져 너덜거렸다. 방을 구성해온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해체됐으며, 정·동맥과 실핏줄이 끊겼다. 묽은 핏물처럼 방에서 가난이 배어나왔다.
“빨리 나가라는 거지.”
지하 1호 ㄱ(63)이 “나쁜 놈들”이라며 말끝을 갈았다. 그는 공동화장실 수도꼭지에서 끌어온 물로 피어오르는 먼지를 죽였다.
쪽방은 1평 방마다 1개의 집이다. 5층짜리 건물 안에서 한 사람의 삶을 지탱해온 집들이 썩은 무처럼 뽑혀나갔다. 동자동 9-20 건물이 철거촌으로 급변하고 있다. 건물주의 ‘전원 퇴거 요구’ 딱지가 붙은 지 3개월 만이다.
철거촌으로 급변하는 9-20 건물1호, 2호, 3호, 7호, 8호, 9호.
1층 9개(교회 제외) 방 중 6개 방의 내부가 박살 났다. 4호, 5호, 6호 방에선 거주가 계속됐다. 방문을 가진 방보다 잃은 방이 더 많은 공간에서 폐허와 생활이 공존했다. 105호는 ‘퇴거 사태’(제1059호 ‘여기서 나가면 갈 데가 없다’ 참조) 초기 가장 먼저 9-20을 떠난 ㅁ(48·9-15로 이사)의 방이다. 뜯길 운명이었던 빈방이 304호 ㅇ(60) 덕에 생명을 연장했다.
“머리가 핑 돌아서….”
평생 병원을 오간 그는 열흘 전에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퇴원했다. 304호 대신 105호에 누웠다. 그가 비운 304호는 누수가 심했다. 지키는 자 없이 뜯겨나갔다. 3층에선 10호가 운명을 같이했다. 10호에 살던 ㄱ(60)은 307호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10호도 물에 점령된 방이었다. 4월 중순 7호가 비었을 때 ㄱ이 옮겨왔다. 더 나은 삶의 공간을 찾아가는 ‘작은 이주’가 9-20 안에서도 무시로 벌어졌다.
“씨바, 이왕 망가진 인생인데 어쩌라고.”
ㄱ은 “6월 말(집주인이 정한 시한은 5월 말)까지는 죽어도 못 나갈 처지”였다. 두 달 수급비를 모은 돈 80만원을 며칠 전 잃어버렸다. 지난 3월 건물주(“방을 비우는 사람에겐 두 달치 월세를 이주비 명목으로 안 받겠다”)에 항의하며 주민들은 월세를 모아 동자동사랑방에 맡겼다. 그 돈을 찾고 수급비 아낀 돈을 합쳐 이불 틈에 끼워뒀다. 밖에 나갔다 온 사이에 ‘전 재산’이 사라졌다. “방 구할 돈”을 잃어버린 그는 “다 포기했다”.
ㄱ의 ‘내부 이주’는 ㅈ(71)의 ‘외부 이주’ 때문에 가능했다. ㄱ의 ‘307호행’ 일주일 전(4월 중순) ㅈ은 천주교 수녀들의 도움을 받아 충북 음성 꽃동네로 떠났다. ㅈ이 살던 방은 막걸리병이 주인인 땅이었다. 그는 밥을 먹지 않았다. 막걸리를 밥 대신 마시며 좁은 방 안에 빈병을 난지도처럼 쌓아올렸다. 수백 개의 막걸리병과, 썩은 빵과, 상한 김치와, 담배꽁초와, 벗은 양말과, 각종 쓰레기들이 찌든 이불과 뒤엉켜 천장을 향해 죽순 자라듯 솟았다. 방 전체를 쓰레기 더미에 내주고 그는 한 뼘 방바닥에 웅크린 채 벽을 안고 잤다.
“나는 술꾼들처럼은 안 먹어. 생각나면 한 모금씩 마시는 거야. 빈병 모으는 건…, 가게에 가져가면 한 개에 20~30원씩은 쳐주니까.”(3월24일 인터뷰)
ㅈ은 캔꼭지를 가득 채운 자루 2개를 싸안고 꽃동네로 갔다. 요양원이 고물상에 팔고 받은 돈을 ㅈ에게 줬다. 그 돈을 아껴가며 ㅈ은 몰래 막걸리를 마신다. “우리 요양원이 산골짜기에 있는데 몇 번 사라져서 한참을 찾아다녔다. 그때마다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맹동면에서 혼자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5월28일 요양원 관계자)
5월26일 하루에만 16개의 방에 황폐가 가득 찼다. 사람 살던 곳이 거주 불가능한 ‘공가’로 바뀌었다. 벽을 뚫고 지붕을 헐어 잔류 주민들의 퇴거를 압박하는 철거용역의 방식과 닮았다. 9-20의 남은 자들은 떠난 자들의 폐허를 바라보며 날마다 갈등할 것이다. 공가 404호의 야윈 방에 기어든 살찐 바퀴벌레가 누군가의 발에 밟혀 내장을 쏟은 채 말라가고 있었다.
“잔챙이들부터 내려.”
닷새 전(5월21일) 404호 ㅇ(67)은 새벽부터 바빴다. 가장 젊은 403호 ㄱ(56)이 4층에서 3층까지 짐을 옮기면 ㅇ과 401호 ㅅ(61)이 계단에서 받아 1층으로 내렸다. 무거운 짐을 들고 오르내리기엔 소아마비로 한쪽이 짧은 ㄱ의 다리가 버텨주지 못했다. 수염 덥수룩하던 ㄱ의 턱이 이날따라 말끔했다.
101호 ㄱ(58)과 109호 ㅊ(59)도 짐을 싸서 건물 밖으로 날랐다. ㄱ의 방이 비워지자 벽선마다 박힌 수십 개의 못이 드러났다. 못과 못을 비닐테이프가 이어 빨랫줄을 형성했다. 벽마다 마권 구매표들이 메모지 대용으로 붙어 있었다. 그가 휘갈긴 문장이 주인 떠난 빈방에 남아 닷새 뒤 찢겨나갔다. “로또 1등 돼서 노숙자 인생을 떠나자! 벗어나자! 해방되자!”
그가 옆방 102호에 보관했던 이삿짐을 들어 옮겼다. 102에 살던 ㅅ(66)은 4월27일 서울시 공무원이 건물주의 입장(“복도를 깨고 화장실을 부수고 단전·단수하겠다”)을 전한 날 곧바로 방을 뺐다.
“가방 엄청 많아.”
등에 자기 가방을 멘 303호 ㅂ(45)이 ㅊ의 가방을 나르며 말했다. “109호에서 산 지 6년 만에 가방 2개가 12개로 늘었다”며 ㅊ이 웃었다. ㅂ은 9-20의 최장기 거주자 2명 중 1명이다. 18년 전 입주할 때도 최연소자였고, 18년이 지난 지금도 가장 어리다. 그의 가방엔 건설현장 작업복이 들어 있다. 집이 불안해진 뒤부터 그는 일하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아침부터 동자동이 떠들썩했다. 연희동(서울시 서대문구) 매입임대주택(한국토지주택공사가 다가구주택을 매입해 저소득층 가구에 저가 임대하는 주택)으로 6명이 ‘집단 이주’하는 날이다. 101호, 109호, 204호, 401호, 403호, 404호는 퇴거 논란 직후 매입임대를 신청했다. ‘흩어지고 싶지 않다’는 소망으로 한 건물에 들어가도록 ‘선처’됐다. 204호 ㅇ(61)이 차에 짐을 올리며 말했다.
“뿔뿔이 흩어지면 고독사로 죽는 거야.”
작별은 무감하게 끝났다. 떠나는 자들을 보내며 남은 자들도 자신이 떠날 날을 계산했다. 트럭은 30분(4km)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6명의 짐이 1t 트럭 두 대를 채우지 못했다. 조용한 빌라촌이 그들의 ‘새 마을’이었다. 매입임대는 2개 건물이었다. 6명이 각자 계약한 방의 문을 땄다. 동자동 9-20에서 가장 높은 층에 살았던 401호와 404호가 연희동에선 가장 낮은 층으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월세가 지상의 절반(보증금 50만원·월세 9만8천원)인 지하방을 서둘러 찜했다. 9-20에서 단짝이었던 101호와 109호는 연희동에서도 1층에 방을 붙였다. 204호가 1층 건너편 방을 잡았다. 다리가 불편한 403호만 혼자 떨어져 3층으로 올라갔다. 그의 절룩이는 삶을 이용해온 ‘보이지 않는 자들’(*4회 ‘그놈’ 편에서 계속)이 있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예요?”
6명을 쳐다보던 연희동 주민이 물었다. “LH에 이사오는 사람들이 밤마다 술 먹고 난리”라며 불만을 표했다. ㅊ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우리는 고급한 사람들이에요.”
그들을 맞는 불편한 시선에 그들의 마음도 불편해졌다. 404호 ㅇ이 뒤돌아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누가 저희한테 밥이라도 달랄까봐.” 401호 ㅅ이 말했다. “이제 동자동이 조용하겠구나.”
동자동 아니면 매입임대나 노숙인 요양시설9-20의 방들이 빠르게 빠지고 있다. 3개월을 버틴 주민들의 심리선이 4월 말부터 급격히 흔들렸다. 주민들은 5월 초부터 진행된 건물주의 개별 압박에 하나둘 무너졌다. 5월2일 건물주는 주민들을 모은 뒤 외부인의 참관을 차단한 채 ‘결정’을 요구했다. 무기는 돈과 ‘각개격파’였다. ①5월 말까지 방을 비울 경우 4월 월세를 면제하고 5월 방값을 하루 5천원씩 깎아주겠다. ②계속 거주하는 자는 밀린 두 달치 월세와 매달 21만4천원(6월부터·기존 14만~16만원)을 내라.
한 달 수급비가 49만원인 주민들에게 밀린 방값 일괄 납부와 5만~7만원 월세 인상은 쇳덩이처럼 무거웠다. 이날 27명 참석자 중 13명이 5월31일까지 퇴거를 약속하며 서명했다. 불참했거나 서명하지 않은 주민들은 이후 방문을 두드리는 건물주 쪽과 개별 대면해야 했다.
5월26일까지 이주했거나 이주할 예정인 주민들은 전체 46명 중 26명이다. 8명(30.7%)이 동자동 밖으로 이사했다. 연희동 매입임대 이주자 외에 2명이 더 있다. 천호동(서울 강동구)으로 이사한 308호 ㅈ(63)은 본래 9-20 방에서 자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는 천호동 찜질방에서 숙식하며 건설현장에서 노동했다. 최근 그는 9-20의 물건들을 하나둘 천호동으로 옮겼다. 다른 한 명은 충북 음성 꽃동네로 간 307호 ㅈ(71)이다.
용산구 안에서 이동한 사람은 14명(53.5%)이다. 동네를 바꾸지도 않았고, 길을 건너지도 않았다. 모두 동자동 안에서 움직였다. 이동거리를 계산해보면 ‘놀라운 통계’가 나온다. 14명 모두 직선거리 100m를 넘지 못했다. 3명(지하 1호 ㄱ·지하 6호 ㅇ·104호 ㅇ)이 5m 이내(2m 거리의 옆 건물 9-19)로 이사했다. 50m 안에서 새 방을 찾은 사람은 10명이다. 9명의 위치는 9-20 건물이 있는 동자동 ‘쪽방 메인 골목’에서 아래위로 고도만 바뀌었다.
26명의 주거 형태를 살피면 ‘이주의 질’도 보인다. 용산구 내 이사는 전원(14명) 쪽방에서 쪽방으로의 이동이다. 동자동 밖으로 나간 경우도 매입임대나 노숙인 요양시설이다. 2건의 ‘예외적 이주’가 있다. 210호 ㅊ(60)은 벌금(폭행죄) 낼 돈이 없어 교도소에서 노역 중이다. ㅊ은 최근 지인을 통해 201호 ㅂ(78)에게 ‘7월20일 출소’ 사실을 알리며 짐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35m 떨어진 새집으로 이사(5월25일)할 때 ㅂ은 ㅊ의 소지품을 가방에 넣어 옮겼다. 건물주는 ㅂ의 이삿날 ㅊ의 방을 부수었다. 209호 ㄱ(74)은 죽어서 서울시립승화원 추모의집(무연고·제1059호 ‘사람 사는 쪽방마다 죽겠다·죽는다·죽었다’ 참조)에 안치됐다.
26명이 그린 ‘가난의 지도’는 선명한 사실을 말해준다. ‘가난의 길’에서 아무도 이탈하지 못했다. 사람은 어디든 갈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은 정해져 있다.
2013년 6월에도 동자동의 두 건물(35-145·9-3)에서 강제퇴거 사태가 있었다. 서울시와 쪽방상담소가 쪽방 주민들의 주거 개선을 목적으로 진행한 사업이 주민들을 내쫓는 결과를 낳았다. 옮길 집을 구하지 못했던 ㅇ은 공원에서 자다가 취객에게 맞아 입원했다. ㅈ은 남대문 쪽방에서 일세로 거주하거나 노숙했다. 당시 피해 주민 중 이름과 소재가 확인되는 16명 전원이 쪽방과 매입임대(1명)에서 살고 있다.
매입임대 당첨되고도 “길 찾아가기 무서워”9-20의 205호 ㅂ(74)과 207호 ㅇ(76)은 35-145에서 집을 구했다. ㅇ은 6명과 함께 연희동 매입임대에 당첨됐으나 “그 복잡한 길을 찾아가기 무서워” 입주를 포기했다. 지하 5호 ㅅ(80)은 9-3으로 이사했다. 9-3은 서울시 ‘리모델링 퇴거 사태’가 있었던 건물이면서 ㅅ이 2005년까지 20년을 살았던 곳이다. 바뀐 건물주가 보수공사를 이유로 거주자들을 내몰던 10년 전 ㅅ은 9-20 지하로 내려갔다. 10년 뒤 9-20에서 쫓겨나는 ㅅ은 자신을 쫓아낸 곳으로 되돌아갔다.
가난한 자의 철거(퇴거)는 순환한다. 누군가 쫓겨난다. 시간이 흘러 다른 곳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흘러와 쫓겨난 자의 자리를 채운다. 쫓겨난 누군가는 간신히 정착한 공간에서 다시 쫓겨나 과거 쫓겨난 곳을 찾아 의탁한다. 가난해서 철거(퇴거)를 당하는지, 철거(퇴거)를 당해 가난한 것인지, 원인과 결과가 경계를 흐리는 곳에서 가난은 순도를 더한다.
연희동 매입입대로 이사한 ㅊ(109호)은 2000년대 중반 월곡동(서울 성북구) 여인숙에서 살다가 리모델링 공사로 강제 퇴거당했다. 마포시장(서울 마포구) 뒤편 여인숙이 철거됐을 땐 거리로 부려져 노숙했다. 9-20에서의 퇴거는 그의 세 번째 ‘내몰림’이었다.
가난은 집을 껴입었을 때 모습을 드러낸다. 도처에 흩어진 가난한 낱개의 세포들이 집으로 흘러들어 가난의 육신을 구성한다. 9-20에 모여 고였던 가난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낱개가 된 그들이 다시 흘러 닿는 곳에도 가난이 있을 것이다.
“미국?”
‘방을 빼면 자식들이 있는 미국으로 가냐’고 누군가 301호 ㄱ(84)에게 물었다. “내 발명을 인정받아야 가든지 말든지 하지. 창조경제? 발명인을 이렇게 푸대접하고 창조는 무슨 놈의 창조야? 이 개새끼들아.”
‘쪽방 돈키호테’의 목소리가 9-20 건물을 쩌렁하게 울렸다.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4회 ‘곡절’에선 한국 현대사의 파고에 차이고 쓸려온 9-20 주민들의 ‘파란만장한 인생 드라마’를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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