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이주2
주제 부서진 방
무대 서울 용산구 동자동 9-20
인물 지하 5호 ㅅ(80), 지하 9호 ㄱ(79), 203호 ㅂ(53), 302호 ㅊ(59), 311호 ㄱ(54)
내용 1년 탐사취재 ‘가난의 경로’는 협업 프로젝트다. 문자만으로는 포착하지 못하는 가난의 다층을 영상과 사진과 그림이 길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 이 글은 ‘가난의 경로’ 번외편이다. 그동안 촬영한 영상에 문자를 입히고, 2회 ‘이주’ 편(제1064호 ‘쪽방에서 난 길은 쪽방으로 통한다’ 참조)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보탰다. 연재 기사를 온라인에 띄울 때마다 글과 맞물린 하이라이트 영상을 공개할 예정이다. 프로젝트가 끝난 뒤 낱개의 영상은 하나의 영화로 옷을 바꿔 입을 것이다.
▶지난 연재 보러가기(아래)
① 딱지
② 이주
이삿짐들이 좁은 방을 몽땅 먹어치우고 복도로 흘러넘쳤다.
“어느 쪽으로 누우실 거예요?”
짐을 날라준 우건일(사랑방마을공제협동조합 이사장)씨가 지하 5호 ㅅ(80)에게 물었다.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으며 ㅅ이 난감해했다.
어김없이 큰 가방이 한 개씩“아무리 연구해도 (공간이) 잘 안 나와.”
쪽방 주민들의 짐은 최소화돼 있다. 생활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들만 허락된다. 벽 넓이 2m 미만의 방에 ‘장식과 소유를 위한 물건’이 들어와 앉을 틈은 없다. 절대적으로 적은 ㅅ의 살림살이가 절대적으로 좁은 방에 부려져 상대적으로 많아 보이는 착시를 일으켰다.
직사각형 트렁크가 ‘논쟁거리’였다. 트렁크의 자리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다. 이사를 도운 이들은 선반을 짜서 위에 올리자고 했다. ㅅ은 갈등했다.
“선반에 얹으면 무거워서 내가 못 내리는데.”
동자동 주민들의 방엔 어김없이 큰 가방이 한 개씩 있다. 이사할 때마다 그들의 작은 살림이 가방 하나에 꾸려져 방과 작별했다. 트렁크는 ㅅ을 떠나지 않고 곁을 지켜온 ‘가장 오랜 존재’였다. 그의 가난한 길에 동행하며 그가 끝내 버리지 못한 것들을 트렁크는 품어 옮겼다. “내 인생(※3회 ‘곡절’에서 계속)을 소설책으로 내면 읽고 우는 사람 많을 거야.”
5월28일 ㅅ이 지팡이를 짚고 이사(※영상 이야기)했다. 9-20에서 직선거리로 40m를 움직였다. “동자동에서만 30년을 살아서 딴 데 가면 질(길)도 못 찾아.” 옮겨간 건물은 그가 2005년까지 20년을 살았던 곳이다. 10년 전 건물주는 보수공사를 이유로 그를 내보냈다. 10년 뒤 ㅅ은 똑같은 이유로 9-20에서 쫓겨나 자신을 쫓아낸 곳으로 돌아갔다. 가난의 경로는 철거와 강제이주의 무한궤도 속에 갇혀 있다.
이사한 방의 월세는 21만원이다. 9-20 지하방은 14만원이었다. 49만원 수급비에서 7만원은 거금이다. 7만원에 값할 만큼 ㅅ에겐 새집이 미덥지 않다. “공동세면장이 잘 넘쳐서 대야 물을 확 쏟아버릴 수도 없고 채소를 마음대로 씻기도 어렵다”며 그는 걱정했다. ㅅ은 평생 잠잘 곳을 걱정하며 살았다. “이젠 바라는 거 없어. 잠자리 걱정만 더 안 했으면 좋겠어.”
냉장고 옆에 트렁크를 놓았다. ㅅ이 냉장고 문을 열자 문이 트렁크에 받혔다. 냉장고가 배를 절반밖에 드러내지 못했다.
“노숙? 미친놈아, 그럼 수급비도 끊겨”9-20 건물 앞이 조용해졌다. 건물 앞 골목은 방을 나온 주민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한 뼘 방에 사람을 들이기 어려운 주민들은 골목에서 만나고, 대화하고, 다퉜다. 강제퇴거로 주민들이 떠나면서 그들의 말과 목소리도 따라 이사 갔다.
6월9일 건물주가 인부들을 데려와 쇠망치로 빈방을 부수었다. 9-20의 3층과 4층이 대형 해머에 허물어졌다. 방과 방 사이의 벽이 뚫리고 방과 복도 사이의 벽이 무너졌다.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 공간에서 깨진 벽돌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폐허는 한 칸씩 영역을 넓히고 방은 하나둘 쫓겨났다. 공동세면장의 수도가 막혔고 공동화장실의 문이 떨어져나갔다. 6월11일 9-20 주민과 시민사회단체는 서울시청 앞에 모여 ‘강제철거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5월26일(‘가난의 경로’ 2회 마감 당시 집계) 이후 10명(6월16일까지)이 추가로 짐을 뺐다.
“내가 방 얻어서 좆 빠지게 짐까지 날라줬잖아.”
6월1일 201호 ㅂ(78)은 옆방 202호 ㄱ(78)을 반강제로 이사시켰다. 퇴거 논란이 벌어진 뒤 202호 ㄱ은 주변 사람들에게 “노숙하겠다”고 이야기해왔다. “미친놈아, 그럼 수급비도 끊겨.” 201호가 역정을 냈다. 주거지가 없어진 사실이 확인되면 수급자 자격을 박탈당한다. “그놈 인생이 불쌍해 그냥 둘 수 없었던” 201호가 빈방을 수소문했다. 202호에게 수급비를 찾아오게 한 뒤 직접 방을 구해 계약까지 해줬다. 201호가 “죽지도 않고 명만 길다”며 202호를 타박했다.
310호 ㄱ(60)은 새꿈어린이공원 뒤에 방을 구했다. 두 달치 모은 수급비 80만원을 도둑맞아 “6월 말까진 죽어도 못 나간다”던 그가 결국 가방을 쌌다. 지하 8호 ㅁ(63)도 이사했다. 법·제도에 해박한 그의 ‘과거’를 두고 주민들 사이에선 ‘검사설’과 ‘변호사설’이 분분했다. 한국전쟁 때 가족을 잃고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연명했던 지하 10호 ㄱ(80)도 떠났다. 며칠 전 지팡이를 짚고 뻥 뚫린 방들을 바라보던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며 한숨지었다. 4층에 혼자 남았던 402호 ㄱ(71)도 35번지 쪽으로 갔다. 때 묻은 매트리스와 빈 고추장통, 뒤꿈치 닳은 등산화가 빈방에서 ‘그가 없는 풍경’을 구성했다. 206호 ㅂ(57)과 208호 ㅇ(60)도 방을 옮겼다.
떠난 자들의 발걸음은 반경 100m를 넘지 못했다. 줄자로 반지름 100m짜리 원을 그린 뒤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둔 듯했다. 지하 11호 ㅂ(63)만 500~600m 떨어진 남대문로 쪽으로 이사했다. 가난한 자들의 이주는 물웅덩이에 속한 물방울 같았다. 돌멩이에 맞아 튀어오른 물방울들은 멀리 날지 못하고 웅덩이로 흘러 되돌아온다.
304호 ㅇ(60)과 305호 ㅈ(69)은 208호 ㅇ(60)이 이사한 곳으로 갔다. 지하 5호 ㅅ이 같은 건물에서 그들을 만났다. 지하 1호 ㄱ(63), 지하 6호 ㅇ(64), 지하 8호 ㅁ, 지하 10호 ㄱ, 104호 ㅇ(64), 202호 ㄱ도 각기 흘러 한곳에서 합쳤다. 205호 ㅂ(74)·206호 ㅂ·207호 ㅇ(76)이 공원 뒤 한 건물로 모였고, 골목 모퉁이집엔 201호 ㅂ과 309호 ㅇ이 깃들었다. 연희동 매입임대로 옮겨간 6명(101호 ㄱ·109호 ㅊ·204호 o·401호 ㅅ·403호 ㄱ·404호 ㅇ)도 한 주택에서 이웃이 됐다. 한번 고인 가난은 흩어져도 다시 모여 고인다. 가난이 비가시적인 것은 고여들기 때문이다.
떠나는 이유와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다르지 않았다. 떠나는 자는 가난해서 떠났고, 남는 자도 가난해서 남았다.
9-20 46개의 방 중 10여 개의 방(6월16일 현재)만 깨지지 않고 시간을 견디고 있다. 지하 2개(7호·9호), 1층 1개(106호), 2층 1개(203호), 3층 4개(301호·302호·303호·311호) 방에 8명이 남아 있다. 이주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이 방 안에서 껍질 잃은 애벌레처럼 웅크렸다.
떠나거나 남거나, 이유는 가난해서“같이 죽어버리자고.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고.”
지하 9호 ㄱ(79)은 9-20에서 15년을 살았다. “공구리 비비고, 쓰레기 치우고, 만날 남의 밑에서 일하다가, 전세방까지 경매에 넘어가 날린 뒤” 동자동에 왔다. 6월1일 공동화장실 문이 뜯겨나갈 때 그는 건물주를 붙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앞으로 봐도 죽겠고 뒤로 봐도 죽겠는데 같이 죽어버리는 것밖에 할 게 뭐가 더 있어.” 건물주는 폭행 혐의로 그를 경찰에 신고했다.
지하 7호 ㅇ(63)은 이사할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그는 9-20에 망가진 곳이 있을 때마다 망치를 들고 다니며 고쳤다. 건물주가 떼어낸 화장실 문도 그가 다시 박았다. 그는 쪽방에서 홀로 죽은 사람들의 방을 치우고 망자들이 남긴 살림을 고물로 팔았다(제1059호 ‘사람 사는 쪽방마다 죽겠다·죽는다·죽었다’ 참조). 그도 지쳐 있었다.
“나가긴 나가겠는데 이사 갈 집 구하기 전엔 못 나가지.”
203호 ㅂ(53)은 무허가 판자촌이나 비닐하우스촌을 알아보고 있다. 10대 때 그의 가족은 가리봉동의 무허가 건물에 살았다. 서울 전역에서 철거가 한창이던 1980년대의 경험과 기억에 그는 기대를 걸고 있었다. “쪽방에서 몇십 년을 살았는데 희망이 없어요. 무허가 땅이 있으면 판자 세워서 집 짓고 살려고 해요. 그거라도 지키면서 살고 싶어요.”
허가받지 못한 그의 꿈은 허약한 판잣집보다 더 허무하게 무너질 듯싶었다.
3층은 폭격 맞은 땅처럼 보였다. 쇠망치의 타격으로 파괴된 방들 사이에서 남은 주민의 절반(4명)이 없는 듯 있었다. 전선들이 실핏줄처럼 늘어진 천장 틈으로 물방울이 핏방울처럼 뚝뚝 떨어졌다. 311호 ㄱ(54)이 맞은편 방의 쓰레기 더미에 오줌을 눴다.
“돈이 있어야 방을 알아보지.”
그의 몸엔 의지 한 조각 남아 있지 않았다. 같이 지내던 남자(42)도 보이지 않았다. 철거가 시작되면서 어디론가 떠났다고 했다. 노숙 시절 만난 동생이 갈 곳 없이 떠돌자 ㄱ은 혼자 눕기도 비좁은 방을 쪼개 동생을 들였다.
요양병원에서 돌아온 302호 ㅊ(59)은 절망 속에 누워 지냈다. 그의 팔다리 두께는 뼈의 굵기와 차이가 없었다. 당뇨합병증으로 혈관이 막혀 걷질 못했다. 누군가의 등에 업혀 수차례 병원에 실려갔다. 방에 꼼짝 못하고 누워 있을 땐 욕창으로 몸에 구더기가 슬기도 했다. 그는 “죽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그의 방엔 빈 소주병이 그득했다. “죽으려고 한 달하고 닷새 동안 밥 안 먹고 술만 먹었는데도 죽질 않아.”
길의 끝자락, 고이는 가난ㅊ은 “밥은 굶을 수 있지만 노숙은 무섭다”고 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여관방 밖에서 ‘아줌마 방 있어요?’ 묻는 거야. 내 방이 없으니까 그 말을 해야 하는데 그 소리 하기가 끔찍하게 싫어. 내가 차범근이하고 서울 경신고등학교를 같이 다녔어. 모르겠어. 내 끝이 왜 이런지….”
건물주가 한 달 방값을 대납하는 조건으로 이사를 조율하고 있다고 서울역쪽방상담소 직원이 그에게 전했다.
‘길의 상흔’을 온몸에 새긴 사람들이 길의 끝자락에서 이웃을 이루며 살다, 흩어져, 다시 고이고 있다. 그들에게서 돋은 가난의 뿌리는 그들이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머무는 곳으로 이끈 길들’과 그 길을 찌르는 뾰족한 돌멩이들 틈에 박혀 있다.
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영상 이창민 감독 liberachang@gmail.com
*1년 추적 ‘가난의 경로’ 영상
*3회 ‘곡절’에선 한국 현대사의 파고에 차이고 쓸려온 9-20 주민들의 ‘인생길’과 그 길을 찌른 돌멩이를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