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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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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순례

동자동 9-20 퇴거 주민의 ‘짤짤이’ 경로. 돈과 밥을 찾아 오랜 세월 구축한 길… 월별·요일별·시간별로 가지 치며 이어지고 끊기고
등록 2016-01-01 21:02 수정 2020-05-03 04:28
1년  추적연재


가난의  경로


⑧ 순례
주제  귀가
무대  서울·경기 일대
인물  조만수(58·가명)
내용  조만수는 동자동 9-20(서울시 용산구)에서 5월21일 강제퇴거됐다. 현재 서대문구 매입 임대주택에 산다. 퇴거 주민의 80%가 직선거리 100m 안에서 이사할 때 그는 용산구 밖(4km 거리)으로 거처를 옮긴 7명에 속했다. 그는 매주 목요일 ‘어떤 길’에 오른다. 2015년이 사위어가는 12월 새벽 조만수가 집을 나섰다. 방을 나서는 주인의 기척에 강아지 ‘뽀삐’가 깨어 짖었다.
▶지난 연재 보러가기(아래)
① 딱지
② 이주
③ 이주2
④ 곡절
⑤ 그놈
⑥ 한양
⑦ 귀가


서울의 한 무료급식소에서 가난한 노인들과 시민들이 밥을 먹고 있다. 정용일 기자

서울의 한 무료급식소에서 가난한 노인들과 시민들이 밥을 먹고 있다. 정용일 기자

인간의 줄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줄의 머리가 먹이 앞으로 접근할 때마다 줄의 꼬리도 빠르게 감응했다. 줄어든 사람만큼 수축했다가 늘어난 사람만큼 금세 팽창했다. 허기의 감각은 느슨해지는 법이 없었다.

“고기 나오는 건 귀신같이 알아서.”

조만수가 혼잣말을 뱉었다. 꼬리에서부터 올라온 그가 머리가 되어 배식대 앞(아침 7시19분)에 섰다. 커다란 국자를 들고 국물을 젓던 남자와 짧은 눈길을 섞었다. 30분 전쯤 지하철 안에 있던 그에게 ‘한 단어 문자’가 날아왔다.

“뼈다귀.”

시간과 경쟁하며 먹다

‘국자’가 타전한 정보였다. 건너뛸 수 없는 식단이 조만수를 백석(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으로 이끌었다. 뼈, 다, 귀, 세 글자는 ‘길 위의 사람들’ 손으로 길 위의 동료들에게 빠르게 전파됐다. 고기가 나오지 않을 때보다 갑절은 많은 사람들(70~80명)이 A교회 지하식당 입구에서 줄을 이뤘다. ‘소식통들’이 길에 뿌린 전언이 그들의 코스를 연장하거나 단축했다. 교회 배식을 도우며 밥을 얻는 국자는 조만수에게 누구보다 빠른 정보를 쏴줬다.

조만수가 널찍한 쇠그릇에 얼굴을 묻고 뜨거운 국밥을 넘겼다. 밥을 담은 그릇에 국을 부은 음식을 그는 국을 뜨지도 밥을 씹지도 않고 국밥 일체로 마셨다. 하아, 하아, 하아아. 식힐 틈 없이 목구멍으로 욱여 넣어진 음식이 내장의 탄성을 밀어올렸다. 먹어야 하는 일은 언제나 다급하고 팽팽한 숙제로서 그들을 괴롭혔다. 그들은 시간과 경쟁하며 먹었다. 돈이든 밥이든 때를 놓치면 손 위에도 뱃속에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의 현재는 그가 살면서 놓쳐온 수많은 것들로 설명됐다. 조만수는 첫술을 뜬 지 5분여 만에 식당을 나왔다. 1층으로 올라가 로비에서 다시 줄의 꼬리가 됐다. 교회에서 나눠주는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조만수의 ‘짤짤이’(종교기관 등을 찾아다니며 구제비를 받거나 식사를 해결하는 일) 코스는 백석에서부터 시작됐다. 서울과 경기의 경계를 넘나들며 코스는 그물처럼 얽히고, 뻗거나, 가지쳤다. 전국에 몇 개의 코스가 존재하는지 조만수도, 그의 동료들도, 행정기관도 알지 못했다. 가난했던 시절부터 더 가난한 사람들이 돈과 밥을 찾아 오랜 세월 걸으며 구축했을 것이라고 조만수는 다만 추측했다. ‘구제비’(종교기관 등이 방문하는 홈리스에게 주는 소액의 돈) 지급 기관 밀집 권역들 사이를 최단 거리로 연결한 뒤 길의 처음과 중간과 끝에 무료급식소를 배치하며 코스들은 구성됐다.

“형님, 거기 가봤어요?”

녹두색 점퍼를 입은 남자가 조만수에게 말을 걸었다. “밥맛이 괜찮아요.” 그는 최근 다니는 코스의 무료급식소를 조만수에게 추천했다. 그는 눈에 띄게 젊었다. 짤짤이 코스는 노인들만 걷는 길이 아니었다. 사람이 길에 부려지는 이유는 나이 때문이 아니었다.

조만수와 ‘녹두 점퍼’가 백석역으로 뛰어들었다. 무료 밥을 급행으로 삼킨 사람들이 그들을 앞지르거나 뒤로 처졌다. 지하철이 들어오자 남자들이 탑승구 양쪽으로 쪼개져 달렸다. 백석역을 기점으로 짤짤이 코스는 두 개로 갈라졌다. 빵과 먹을 것이 필요한 사람들은 대화역으로 이동했다. 원당역 코스를 택한 사람들은 1천원쯤 돈을 더 모을 수 있었다. 조만수와 녹두 점퍼는 아침 7시40분 원당행 지하철을 타서 7시53분에 하차했다.

시·도 경계를 넘나들며 얽힌 짤짤이 코스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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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는 지역이 아니라 요일별로 짜였다. 구제비든 밥이든 매일 주지 않았다. 배고픈 자들은 수도권 전역을 뒤져 돈과 밥을 구할 곳을 요일별로 찾아 이어붙였다. 조만수는 북쪽으로 대화(고양시 일산서구), 동쪽으로 신설동(서울시 동대문구), 남쪽으로는 모란(경기도 성남시 중원구)이나 신갈(경기도 용인시 기흥구)까지 코스를 바꿔 오갔다.

녹두 점퍼는 조만수가 7년 전 용산역 노숙인촌에서 살 때 만났다. 그곳에서 조만수는 ‘박스집’을 지어 몸을 밀어넣거나 비닐과 천 쪼가리를 막대기로 받쳐 지붕을 삼았다. 갑자기 안 보이는 얼굴이 생기면 세상 뜬 줄 알아먹는 공간이었다. 녹두 점퍼는 “새파란 젊은 놈”으로서 “다 죽어가는 사람들” 틈에 섞여 살았다.

그들은 쉼 없는 속보로 걸었다. 짤짤이 코스는 쉬엄쉬엄 걸으며 밥도 먹고 돈도 받는 길이 아니었다. 정해진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밥도 돈도 얻을 수 없는 길이었다. 교회나 성당·사찰은 그들을 ‘어느 때고’ 기다려주는 곳이 아니었다. “지난여름 300원 받으려고 10리 길을 걸었는데 결국 늦어버린” 조만수는 “땀을 질질 짜며 죽을 기분”이었다. 그는 배식·구제비 지급 시간과 지하철 시간표를 줄줄 꿰었다. 이동시간과 현장 도착시간을 정확히 배분해야 ‘죽을 기분’을 줄일 수 있었다. 그들의 걸음도 노동이었다.

“노가다야.”

조만수가 밭은 숨을 골랐다. 코스 종료 지점에 이를 때쯤 다리에 마비가 오는 날이 많아졌다. 그는 걸으면서 기도했다. “가난하고 병든 제가 먹고살 수 있도록 다리라도 튼튼하게 해주십쇼.”

원당역에서 450m를 걸어 B사찰에 도착(아침 8시)했다. 비구니 스님이 작은 플라스틱 통에서 300원을 꺼내 선착순으로 나눠줬다.

구제비 금액은 코스별로 편차가 컸다. 기관에 따라 최소 300원에서 최대 1천원까지 줬다. 코스를 완주했을 때 화요일(약 3천원), 수요일(약 5500원), 목요일(약 8800원), 금요일(5천~8천원)마다 손에 쥐는 돈이 달랐다. 종교기관들이 쉬는 월요일은 코스 구성 자체가 불가능했다. 코스마다 지급 주기가 격주 1회 혹은 매월 1회인 곳들도 끼어 있었다. 매주 치밀한 계산 뒤 코스를 선택해야 오차를 줄일 수 있었다. 과거 날마다 짤짤이를 뛰었던 조만수도 이젠 힘에 부쳤다. 구제비가 가장 많이 모이는 목요일과 금요일 위주로 다녔다.

아침 8시15분 C성당에 도착해 대기했다. 성당 벤치가 짤짤이 일행으로 가득 찼다. 무리에 섞이지 못한 사람들은 성당 정문 밖을 돌았다. 25분을 기다려 컵라면 하나씩을 받았다(8시40분). 길은 성당에서 340m 떨어진 D교회로 연결됐다. 먼저 닿은 사람들이 가방과 신문지 따위로 길바닥에 줄을 세워 순서를 찜했다. 차례에서 밀려 아무것도 받지 못했던 경험이 그들을 학습시켰다.

쉼 없는 속보로 걷는 ‘노가다’

“이 꼴로는 못 가지.”

머리가 하얗게 센 남자가 조만수에게 며칠 뒤 있을 조카 결혼식 얘기를 꺼냈다. “부끄럽거든.” 그는 웃는 듯 우는 듯했다. C성당을 나오면서 마시기 시작한 ‘모닝 막걸리’ 한 병을 다 비웠다. 조만수가 위로하듯 자조하듯 말했다. “난 7~8년 전에 큰누나 죽었다는 이야기 듣고도 못 가봤다.”

‘부잣집에 태어났다면 이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라고 조만수는 짤짤이를 할 때마다 생각했다. 그는 자라면서 어머니 젖을 먹지 못했다. 가난한 어머니는 그를 낳고도 젖이 바짝 말랐다. 동갑내기 친구의 어머니한테 얻은 젖으로 그는 살아남았다. 4살 땐 조카를 갓 출산한 형수의 젖을 받아 마셨다. 조만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식당에 나가 돈을 벌었다. 어머니는 피를 토하고 죽었다. 어머니 같은 형수가 아프다는 소식에도 연락하지 않았다.

9년 전 서울역에서 막 노숙을 시작했을 때 조만수는 배는 고픈데 어떻게 얻어먹어야 할지 몰라 역사 바닥에 앉아 울었다. 처음 보는 남자가 다가와 빵을 먹인 뒤 데리고 다니며 짤짤이 코스를 가르쳤다. 조만수는 최근 서울시청 지하도에서 그 “은인”을 봤다. “은인”은 짤짤이도 다니지 못할 만큼 몸이 망가져 거리잠을 자고 있었다. 조만수는 빵과 2만원을 주고 왔다.

“성공했다~으.”

덩치가 씨름선수만 한 젊은 남자는 목청도 쩌렁했다. 방금 500원을 받은 교회에 되돌아가 500원을 더 챙긴 뒤 자랑했다. 그의 뒤에서 한 목소리가 야단쳤다. “너 같은 놈이 ‘따당’(구제비 중복수령을 일컫는 은어) 쳐서 구제비 끊기면 어떡할 거야.” 덩치도 지지 않았다. “그럼 안 받으면 되지.” 남자가 타박했다. “너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피해 가잖아. 넌 그것까진 생각 못하지?”

구제비도 경기를 탔다. 코스를 완주하면 하루 3만원을 얻던 ‘호시절’도 있었다. 2009년 금융위기 직후 금액이 절반 이하로 토막났다. 교회나 성당이 구제비를 중단할 때마다 코스에 구멍이 생겼다. 서둘러 받으려고 교회 앞에서 무단횡단 하다 사고가 나면 구제비 지급을 끊는 경우도 있었다.

덩치의 호주머니에서 이날 받은 동전들이 쩔그렁거렸다. 정신장애 3급인 그는 돈을 받을 줄만 알고 쓸 줄 몰라 늘 호주머니가 요란했다.

코스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소재 교회들을 훑으며 나아갔다. F교회(오전 9시53분·500원)→G교회(오전 10시5분·500원)→H교회(오전 10시25분·1천원) 순서로 짧게는 260m에서 길게는 4.3km를 걸어 닿았다.

규모가 큰 H교회에선 화장실도 사용하고 떡진 머리도 감았다. I교회(오전 10시46분)에서 받은 봉지라면은 한쪽 귀퉁이가 잘려 있었다. 라면을 모아 술로 바꾸지 못하도록 교회가 짜낸 방법이었다. 봉지라면을 끓여 먹을 장소도 기구도 없는 거리 홈리스들은 I교회를 들르지 않고 곧장 J교회(오전 11시)로 향했다.

조만수가 행신동(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J교회 식당에서 점심밥을 받았다. 지역 독거노인들이 먼저 와서 밥을 먹고 있었다. 코스의 절반 지점에 밥맛 좋은 무료급식소가 있으면 힘이 났다. 조만수는 식판의 돼지고기를 덜어 식탁 맞은편 남자의 밥 위에 올렸다. 국자가 돼지고기를 씹었다. 그도 백석에서 행신까지 와 있었다. 국자는 수급자가 아니었다. 볼펜을 판 돈과 짤짤이해서 번 돈으로 쪽방 숙박비를 댔다.

“행렬 간격의 길이가 각자의 자존”

국자 옆에서 덩치가 밥덩이를 입에 욱여넣었다. “저놈이 바보 같아도 결혼식장에선 식권 두 장씩 꼬박꼬박 받아오더라고.”

‘흰머리’가 조만수에게 귀띔했다. 흰머리와 덩치는 토요일마다 결혼식장을 돌며 평소 못 먹는 고급 음식을 먹었다. 일면식 없는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주고 하객을 가장해 식권을 받았다. 조만수도 한때 주말마다 결혼식장에 ‘밥 먹으러’ 다녔다. 식장에서 동자동 사람들이나 옛 노숙 동료들을 꽤 만났다. 최근엔 폐회로텔레비전(CCTV) 감시가 심해져 결혼식장 투어는 그만뒀다. 할머니들의 식사가 계속되는 동안 ‘조만수들’은 5분 만에 식판을 비우고 일어섰다.

풍산역(경기도 고양시 풍동)행 탑승 시간을 놓쳐 언짢았다. 오전 11시45분까지 닿아야 1천원을 받을 수 있는 코스가 날아갔다. 풍산역엔 낮 12시13분에야 도착했다. 권역 간 장거리 이동은 지하철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 2~3차례만 지하철을 타도 그날 짤짤이 해서 번 돈의 절반이 사라졌다. 돈 안 내고 타는 ‘말할 수 없는 기술’이 그들 사이에 통용됐다.

“쓸모없겠네.”

흰머리가 지하철 계단에서 주운 팔찌를 살피더니 조만수에게 건넸다. 팔찌 이음새를 유심히 보던 조만수가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연결 부위가 금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를 주울 때가 있었다. 떼어 편지봉투에 1년 동안 모은 뒤 금은방에 팔면 10만원쯤 벌 수 있었다. 동자동 9-20에서 조만수의 위층에 살던 204호 ㅇ(61)도 한때 이 코스에 동행했다. 그는 짤짤이 내내 쇠붙이나 구리선을 주워 가방에 쟁였다가 고물상에 팔았다. 길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의 시선은 늘 땅바닥을 향해 있었다.

풍산역에서 나오자 눈앞으로 짤짤이 행렬이 길게 펼쳐졌다. 가난이 만든 행렬은 시각적이었다. 어떤 길은 그 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누군가의 가난을 고스란히 노출시켰다. 한 사람의 보이지 않는 사정이 그가 속한 행렬로 가시화됐다. 행렬은 도로 옆으로 흘렀고, 아파트 사이를 통과했으며, 공원을 가로질렀다. 보는 눈이 많아질 때마다 간격이 띄엄띄엄해졌다. “간격의 길이가 (형렬에 속하고 싶지 않은) 각자의 자존”이었다. 조만수와 남자들이 무리지어 걸을 때마다 그들의 얼굴로 사람들의 시선이 꽂혔다. 수군거림도 들렸다.

자신의 가난을 전시해서라도 ‘부끄러움보다 무서운 배고픔’에 맞서는 일은 격렬한 순례였다. 얻어먹는 자들의 걸음도 벌어먹는 자들의 노동만큼 고단했다. 몸을 쓰고 기운을 소진해야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벌어먹는 자나 얻어먹는 자나 다르지 않았다. “몸이 힘든 것보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더 싫었던” 조만수도 굶주림 앞에서 부끄러움의 세포를 죽였다.

풍산역에서 시작하는 코스는 킨텍스 인근(고양시 일산서구)까지 도보로 이어졌다. L교회(낮 12시24분·500원+티셔츠 1장)→2.1km 거리의 M성당(오후 1시·500원)→1.1km N교회(오후 1시26분·500원)→530m O교회(오후 1시34분·500원)→3km P성당(오후 2시15분·1천원)→2.7km Q교회(오후 2시49분·1천원)….

꽁지머리. 하얀 수염. 밝은 미소. 그것들이 조만수의 얼굴을 구별지었다. ‘밝은 미소’는 조만수가 늘 웃는 표정이어서 좋다며 L교회가 붙여준 별명이었다.

조만수는 14살 때 대구에서 상경했다. “한 대롱(매혈) 뽑아주고 받은 돈으로” 기차표를 샀다. 2000년대 중반 월곡동(서울시 성북구) 여인숙에서 살다가 리모델링 공사로 강제 퇴거당했다. 마포시장(서울시 마포구) 뒤편 여관이 철거되며 쫓겨났을 땐 거리에서 살았다. 동자동 9-20에서의 퇴거는 그의 세 번째 내몰림이었다. 그때마다 국가는 어딘가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국가는 희미하고 개인의 고통은 선명한 사회에서 “이런다고 삶이 나아지진 않겠지만 죽지 않을 순 있겠다”며 의지해온 ‘이런 일’이 짤짤이였다.

26.3km 걸어 8800원과 밥 세끼

조만수는 가난한 순례길에서 사계절을 만났다. 봄의 새싹과 여름의 초록과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눈꽃을 그는 “하도 다녀서 눈 감고도 찾아가는 길” 위에서 목도했다. 겨울은 냉랭하고 황량했다. 온기를 얻는 데도 돈을 지불해야 하므로 그는 몸 녹일 따뜻한 공간을 허락받지 못했다. 그 혹독한 길이 추운 겨울과 추운 봄과 추운 여름과 추운 가을을 견디게 한 그의 ‘모든 온기’였다.

저녁 6시30분(서울시 동대문구 R고등학교에서의 무료 급식) 조만수의 짤짤이 길이 끝났다. 12시간10분 동안 26.3km를 걸었다. 자전거를 1.7km 탔으며, 지하철로 39개역을 이동했다. 교회 13곳과 성당 3곳, 사찰 1곳과 학교 1곳을 돌았다. 무료 식사 세끼, 라면 2개, 티셔츠 1개를 얻었다. 현금은 8800원이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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