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곡절
주제 곡절
무대 대한민국 근·현대 80년, 서울 용산구 동자동 9-20
인물 301호 ㄱ(84), 201호 ㅂ(78), 108호 ㅇ(66), 311호 ㄱ(54), 지하5호 ㅅ(80), 지하10호 ㄱ(80), 204호 ㅇ(61), 401호 ㅅ(62), 303호 ㅂ(45)
내용 역사는 무심히 스치거나 거칠게 얽어매며 그들의 삶에 불자국처럼 앉았다. 한국 근·현대사의 난폭한 파고에 휩쓸릴 때마다 그들은 출렁이며 부서졌다. 동자동 9-20으로 흘러들어왔다 흘러나간 사람들이 자신의 흐름을 이야기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사실과 허구가 등 맞댄 곳만 진실의 거처는 아니다. 기록 없는 자들의 역사는 기록을 지배하는 자들의 기억으로 대체돼왔다. 길에 부려져 그저 살아왔을 뿐인데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방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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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딱지
② 이주
③ 이주2
가난의 뿌리는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머무는 곳으로 이끈 길들’과 그 길을 찌르는 뾰족한 돌멩이들 틈에 박혀 있다.
동자동(서울 용산구) 9-20은 1968년 8월 사용승인을 받았다. 지하 1층과 지상 4층으로 지어 건축면적 86.31m²와 연면적 400.59m²를 얻었다.
사용승인 7개월 전 김신조가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24부대(민족보위성 정찰국) 특수요원 31명이 청와대로 진군(1·21 사태)했다. 그들은 한국군 군복을 입고 서울에 닿았다. ‘CIC 방첩단’으로 위장해 2열 종대로 행군했다. 자하문고개에서 종로경찰서장(최규식)의 검문에 걸렸다. 시내버스 한 대가 다가와 서장의 지프차 뒤에 멈췄다. 124부대는 서장을 쏘고 버스에 수류탄을 던졌다.
301호 ㄱ: 순경, 쪽방 돈키호테, 백도라지“사람들은 나를 ‘쪽방 돈키호테’라고 하는데 ×같은 소리지. 그냥 ‘백도라지’라고 불러. 백도라지가 인삼 다음으로 좋은 거야.”서울시경 순경 ㄱ(84·당시 36)은 “북한산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두 줄로 행군하는 부대를 발견하고 무전기로 보고”했다. “뒷줄의 한 명을 잡아 확인하라는 지시”가 하달됐다. 무전을 끊자마자 종로경찰서장이 도착했고 시내버스가 뒤따라 섰다. 총알이 발포됐고 수류탄이 날았다. ㄱ은 땅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경찰서장은 즉사했다. 124부대원 28명이 사살됐고, 1명(김신조)은 생포됐으며, 2명은 도주했다.
9-20 사용승인 석 달 뒤인 1968년 11월, 서울 중구 도동1가(옛 지명·1975년 동자동 편입)의 42가구 200여 명이 길가에서 잠을 잤다. 서울시의 판잣집 강제 철거 탓이었다. 29년 뒤 9-20 301호에 ㄱ이 입주했다. 29년 전 땅바닥에 엎드리며 그는 무서웠다. 벽이 뚫리고 전기가 끊긴 9-20 건물에서도 지금 그는 밤마다 “무섭다”고 했다(상자 기사 참조).
“사람들은 나를 ‘쪽방 돈키호테’라고 하는데 ×같은 소리지. 그냥 ‘백도라지’라고 불러. 백도라지가 인삼 다음으로 좋은 거야.
내가 신문에 난 사람이야. 사금채취기를 만들었어. 이걸 알아야 돼. 내가 세계 최초로 무연료 발전기를 만들었어. 엘렉트릭 볼케이노. ‘전기활화산’이야. 그것만 만들면 전기혁명이 일어나. 레이저탱크도 만들 수 있어. 당연히 군대도 줄일 수 있지. 제작비가 없어서 그 돈 만드느라고 18년 동안 쪽방에 있는 거야.
마누라하고 애들이 미국에 있어. 1992년에 가족들 데리고 이민 갔어. 도착하자마자 못 살겠어. 나만 다시 돌아왔어. 서울역에서 노숙하다가 9-20으로 왔지. 발전기 시범가동을 할 때까진 미국에 못 가. 아들은 미국에서 발전기 돌리면 되지 않냐고 하는데 미친 소리지. 그러면 난 친미파가 돼. 친일파만 나쁜 놈인가. 내가 이렇게 애국심을 갖고 사는데 대한민국이 안 알아줘. 발명인들 이렇게 푸대접하고 무슨 창조경제야. 개××들.”
7월10일 현재 동자동(서울시 용산구) 9-20 주민 45명 중 40명이 이사했다. 5명만 남아 방을 지키고 있다.
지난 6월22일 남은 주민들과 건물주가 만났다. 주민들은 이주비(200여만원)를 요구했다. 건물주는 퇴거가 완료되면 이미 나간 사람들을 포함해 10만원씩 지급하겠다고 했다. 의견은 모아지지 않았고 건물주는 이튿날 전기를 끊었다. 냉장고의 음식이 녹아내렸고, 건물은 불빛 없이 어둠에 싸였다. 이날 311호 ㄱ(54)은 깜깜한 복도를 걷다 넘어져 상처를 입고 입원했다.
7월1일 인부들이 병원에 입원한 주민 2명의 방문을 떼며 공사를 시작했다. 지하 1층 지상 4층의 건물 안에 48개의 공간을 품었던 방은 5개의 방만 남기고 방의 형태를 잃었다. 인부들이 벽을 깨는 동안 떠나지 않은 5명은 건물 밖에서 망연하게 서성였다. 하루 공사가 끝나면 그들은 폐허 더미로 들어가 촛불을 켠다. 주민들은 공사중지 가처분을 법원에 신청했다.
이주한 40명 중 27명(67.5%)이 동자동 안에서 움직였다. 이들의 100%가 쪽방으로 이사했고, 모두 직선거리 100m 안에 새 방을 얻었다. 이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도 결과(26명 이주 당시 상황은 제1064호 ‘쪽방에서 난 길은 쪽방으로 통한다’ 참조)는 바뀌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경계 안에 스스로를 가둔 듯 그들의 이주는 예측 가능한 경로를 그리고 있다.
연희동(서울시 서대문구) 매입임대로 이사했던 101호 ㄱ(58)은 두 달이 채 안 돼 동자동으로 돌아왔다. 그는 “임대주택 생활비(월 수급비 49만원으로 방값과 수도세·전기세·가스비 별도 납부)가 너무 많이 들고 친한 사람들이 있는 동자동이 그리웠다”고 했다.
남북은 적대함으로써 공생했다. 1·21 사태 직후 예비군과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됐고 교련 교육이 시작됐다. 박정희는 북파 부대들을 만들어 보복을 준비했다.
당시 10대의 ㅇ(61)은 기골이 장대했다. 키 185cm에 몸무게가 100kg을 넘었다. 근로재건대(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정권이 경찰 관할하에 편입시켜 관리하던 넝마주이 조직) 대장이 ‘선글라스 낀 남자’에게 그를 넘겼다. 강원도 양구로 실려갔다. 땅굴 파서 생활하며 북파공작원으로 길러졌다. 10개월 만에 탈영했고, 잡혀서 죽도록 맞았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총에 맞았다.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보호감호제도를 시행했다. 그해 삼청교육을 마친 ㅇ은 풀려나지 못했다. 보호감호자로 전환돼 자신이 갇힐 청송보호감호소 독방을 지었다. 2010년 ㅇ은 동자동 9-20 204호에 짐을 풀었다.
“‘선서! 본인은 금번 요원으로 선발된 것을 영예롭게 생각하고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국가와 민족에 헌신적으로 봉사할 것을 선서합니다.’ 이 말(북파공작원 요원수칙) 평생 못 잊어요. 양담배 딱 물고 요원 하나가 말했어요.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국가에 충성하라’고요. 1979년 삼청교육대로 끌려갔을 땐요. 교관들이 ‘너흰 좀벌레’라며 곡괭이로 후려치고 발로 밟았어요. 밤에 드르륵 총소리가 난 뒤 다음날 보면 사람 몇이 안 보여요. ‘영광’ 어쩌구 하지만 다 ‘좀벌레’ 취급한 거예요.
내가요. 간질이 있어요. 굶어서 생긴 건지 맞아서 생긴 건진 몰라요. 툭하면 쓰려져서 발작을 해요. 세면장에 쓰러져서 한쪽 발은 변기(재래식 공동화장실)에 빠져 있고, 눈은 모서리에 찍혀 있고, 이빨은 다 깨지고요. 헛것이 보일 때도 있고 환청이 들릴 때도 있어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나를 잡아다 홀딱 벗겨놓고 두들겨 패요. 누가 방문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도 들려요. 요즘은 한번 발작하면 몸이 다 풀리고 코로 피가 터져요.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2013년에 장기기증 서약을 했어요.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요. 그 많은 집들 중 내 집 한 칸이 없어요. 만날 죽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어요. 수면제도 먹고, 한센병 환자 피부약도 먹고, 한강다리에서 투신하고, 지하철 선로 위로 몸을 던지고. 기차에서 뛰어내리고…. 틈만 나면 죽으려드니까 몸이 많이 상했어요. 하루에 먹는 약만 40알이에요.”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가 ‘사회 정화’를 이야기했다. 108호 ㅇ(66)과 311호 ㄱ(54)은 ‘소탕’ 대상자가 됐다. 술자리 시비로 감옥에 갔던 108호 ㅇ은 출소 8개월 만인 1980년 7월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대가리 쳐들었다고 개 잡듯 맞거나 자다가 호흡곤란으로 죽는 사람들” 속에서 그도 담배 한 대 피웠다고 피가 낭자하게 맞았다.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던 311호 ㄱ은 팔의 문신 때문에 끌려갔다. 새기다 만 ‘용’자가 그의 팔뚝에 있었다. 개천의 용은 꿈꾸지도 않았다. “목이 너무 타서 이무기처럼 개골창에 대가리 처박고 물 마시다가” 곤봉에 맞아 머리가 터졌다.
ㅂ(78)은 ‘월남 동포’였다. 8살 때 ‘바람 찬 흥남부두’에서 혼자 배를 탔다. 전쟁으로 깨진 극장과 빈집, 공원과 지하철역을 떠돌며 평생 집 한 칸 가져본 적 없이 노숙했다. 9-20의 작은 방 201호에서 16년간 몸을 뉘었다.
“우리 시대는 힘들었단 말이야. 부산에 도착한 뒤부터 거리 인생이 시작된 거야. 자갈치시장에서 버린 생선 대가리를 주워다 끓여먹으면서 살아남았어. 부산으로 몰린 피란민들이 풀까지 다 캐먹어서 영도산이 새빨갰어.
서울 수복 뒤 ‘도둑 기차’ 타고 상경했다고. 용산 서부역 근처 빈 극장 영사실에서 잤어. 전쟁통에 비어 있는 집 아무 데나 들어가서 자고, 이가 드글드글 끓는 옷들 주워 입고. 청계천 용미교 밑에서 가마니 깔고 자다가 구두 하나 닦으면 그 돈으로 꿀꿀이죽 사먹고 하루 버티는 거야. 왕초가 하도 괴롭혀서 근로재건대에서 도망쳤지. 인천 자유공원에 가면 맥아더동상 있잖아. 동상 근처 바닥에 굴을 파고 열댓 명이 자고 그랬어. 여름엔 거리나 산에서 자고 추워지면 재건대 들어가고.
마흔 넘어서부터 신당동 장의사에서 먹고 자면서 오래 일했어. 하루에도 시신이 몇 구씩이나 들어와. 육십이 다 될 때까지 그러고 있는데 재개발을 한다잖아. 건물이 헐리면서 그냥 쫓겨났어. 다시 노숙 인생이야. 탑골공원 팔각정에서도 자고, 을지로입구 지하도에서도 자고.
전세든 월세든 평생 내 방을 가져본 적이 없어. 이 쪽방이 다야. 결혼한 적도 없고 여자는 만나본 적도 없어. 이 가난은 내 대에서 끝내야지. 거리에서 죽고 싶지 않아. 아무도 없이 숨넘어가는 고통이 엄청나. 내가 장례업을 해봐서 알아.”
지하5호 ㅅ: 광목치마 어머니, 포도 껍데기
생명을 귀히 여기는 전쟁은 없다. 이승만 정부는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과 경남 거창 양민 학살을 저지른 뒤 은폐·왜곡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앞장섰다. 신성모의 고향은 경남 의령이다.
부산에서 태어난 ㅅ(80)은 한국전쟁 때 의령에서 살았다. 동네에 신성모의 고향집이 있었다. “신성모가 집을 방문하는 날 군용차들이 도로 양쪽에서 라이트를 켜서” 길을 밝혔다. “신성모가 빨갱이 잡으려고 자기 집만 빼고 폭격한다”는 소문이 흉흉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유언비어는 신뢰를 잃은 권력에게서 배양된다. “평생 잠자리 걱정을 하며 살았던” ㅅ은 55년 뒤 동자동 9-20 지하5호에 깃들었다.
“내 인생을 소설책으로 내면 읽고 우는 사람 많을 거야(제1076호 ‘한 칸 방, 나의 가장 나종 지닌 것’ 참조). 이모 외할머니가 우리 아버지한테 엄마를 중신 섰는데 아버지가 쳐다보지도 않더래. 키가 작다고. 아버지가 장가 안 가겠다며 다듬잇돌을 안고 마루에서 굴러떨어졌대. 엄마가 시집간 지 3일 만에 땟거리가 떨어지더래. 땅 한 뙈기 없어도 아버지 몸이 성하니까 머슴이라도 살 줄 알았는데 일을 안 하는 거야. 할아버지도 문지방만 베고 누워서 끙끙 앓기만 하고. 엄마가 일해서 푼돈이라도 벌어오면 아버지가 빼앗아서 화투로 날려버리고. 내가 태어나서 젖도 안 뗐을 때 아버지가 엄마를 내쫓았어.
2살 때 헤어진 엄마를 19살에 처음 만났어. 누런 광목치마 저고리를 입고 날 보러 왔더라고. 삶은 고구마 5개를 수건에 싸와서 나한테 줘. 엄마는 새 남편을 만나서 애를 하나 낳았는데 그 남편도 죽어버렸어. 내가 엄마 집에 가봤더니 항아리 하나가 있어. 엄마가 보리 이삭을 주워 방아를 찧어놨어. 아끼느라 먹지도 않고 모아둔 거야. 보리쌀이 허연 게 너무 좋아. 내가 두 되를 몰래 퍼서 가져왔어. 엄마가 그렇게 아꼈던 건데, 나도 너무 배가 고팠으니까.
아버지는 엄마 내쫓고 중(스님) 딸한테 장가를 갔어. 새엄마한테 밥을 달라고 못했어. 영양실조에 걸려서 배가 풍선처럼 부풀었어. 배가 너무 고파 길거리에서 뭐든 주워 먹었어. 논에 사는 고동 삶아먹고 버린 껍데기 있잖아. 돌로 깨서 남아 있는 내장을 꺼내 먹었어. 포도 껍데기, 참외 껍데기도 주워 먹고. 하도 자꾸 먹으니까 아버지가 쥐를 잡아 구워먹였다니까.
나이 열여덟에 시집갔어. 7살 많은 남자한테 아버지가 그냥 보냈어. 남편이 부대 주변을 맴돌았어. 군부대 노무자로 일하면 돈 많이 번다면서. 주머니에 작은 거 하나만 들고 나와도 짭짤하다는 거야. 그러다 남편이 사라졌어. 살았는지 죽었는지 영영 연락이 끊겼어. 전쟁 직후여서 남편이 호적이 없었어. 이혼이고 뭐고 할 것도 없어. 혼인신고도 못했으니까.”
신성모 대신 사건을 수습한 이기붕은 이승만 정권의 2인자로 부상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시대였다. 정치인과 깡패가 경계를 섞었다. 요정 밀실에서 정치권력과 정치깡패가 붉은 얼굴로 정치와 의리를 논했다. 이기붕도 서울 시내 최고급 요정 ‘대하’를 드나들었다.
지하10호 ㄱ(80)은 대하의 웨이터일 때가 있었다. 1959년 세금 포탈로 구속적부 심사를 받던 대하 마담 김복희는 “3천여만환에 이르는 국회와 행정부처의 외상값 때문에 세금을 내지 못했다”며 외상장부를 읊었다. 자유당 11만1천환, 국회 10만1천환, 내무위 56만8천환, 농림위 11만9천환…. 청진동 요정 ‘새집’은 대하보다 한 급 낮았다. 새집에서 일하면서 ㄱ은 정치주먹 이정재와 김두한의 시중을 들었다.
“하우스보이 알아요? 내가 그거 하면서 안 죽고 살았어요. 미군들 숙소 청소해주는 거예요. 전쟁통에 군부대가 가만 안 있잖아요. 미군부대가 북진하면 실직하고 퇴각하면 다시 취직하고. 군부대 옆에 파둔 땅 구덩이에서 자면서 얼어 죽지 않고 견뎠어요.
오산 미 공군기지에서 하우스보이도 하고, 식당일도 하고, 스낵바에서 아이스크림도 팔았어요. 기지촌 ‘양공주들’도 보고 있으면 눈물 났어요. 피란 나와서 먹고살려니까 별수 있나요. 우리가 그랬잖아요.
내가 초등학교도 못 나왔거든요. 스무 살이 넘었는데 할 게 없어요. 유흥업소밖에 기댈 데가 없었어요. 술장사도 급이 있어요. 요정 급이 높으면 마담들 급도 높아요. 급 높은 마담과 친해야 돼요. 마담이 딴 데로 옮길 때 웨이터도 데려갈 수 있거든요. 괜찮은 ‘처사’(종업원)하고 일하면 마담도 편해요. 상부상조예요. 나도 마담들 많이 따라다녔지만 일류 마담 만나기가 쉬운가요. 나도 인기 있는 처사는 못 됐어요.
남들 가방 메고 대학 다닐 때 나는 조그마한 수첩 들고 교수들 술값 받으러 다녔어요. 운명이라고 생각했지만 배우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학생도 아니면서 좋은 강의다 싶으면 그냥 앉아서 듣는 거예요. 그들의 배움이 내 것이었다면 내 삶도 달라졌을까요. 내 인생 말할 게 뭐가 더 있겠소.”
303호 ㅂ: 용역, 철거민“망루에서 사람이 떨어져서 죽었어요. 그때 나도 선봉대였어요. 사람이 죽었는데 얼마나 겁났겠어요.”가난한 나라의 정치인들은 가난한 국민의 노동력을 수출해 외화를 벌어들였다. 포클랜드는 아르헨티나 내륙에서 500km 떨어진 섬이다.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의 권리를 주장하며 섬을 점령하자 영국이 무력으로 대응해 패퇴시켰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때 401호 ㅅ(62)은 원양어선을 타고 인근 해역에서 참치와 오징어를 잡았다.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라크 건설현장에서 ‘오일 달러’를 벌었다. 뒷목에 총을 겨눈 이라크 민병대에게 회사 차를 빼앗겼다. 1988년 후세인은 가스를 살포해 쿠르드족 5천여 명을 학살했다. 가스 살포 소식을 듣고 ㅅ도 이라크를 떠났다.
누군가의 집이 솟을 때 누군가의 집은 무너졌다. 누군가의 집을 부수고 세우면서 기업은 성장지표를 끌어올렸고 국가는 경제지표를 끌어올렸다. 철거용역 업체들은 대형 건설사 대신 손에 피를 묻히며 그들의 세계에 편입되길 꿈꿨다. 1997년 다원건설(옛 적준용역) 철거반원들의 폭력과 ‘너구리 작전’(방화)으로 전농동(서울 동대문구) 철거민 박순덕씨가 18m 망루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그날 철거용역 선봉대엔 27살 ㅂ(45)이 있었다. 충청도에서 상경한 그가 동자동 9-20 303호에 방을 얻은 직후였다. 303호에서 18년을 산 그는 이제 철거민이 돼 내쫓길 처지에 있다.
“전농동에서 난리가 났었어요. 전봇대에 모집공고를 보고 갔어요. 그냥 사람들 다 이사 나간 집을 부수는 줄 알았어요. 가보니까 사람들을 쫓아내는 거잖아요. 동물들한테도 그렇게는 못해요. 철거용역은 다원(건설)이었어요. 망루에서 사람이 떨어져서 죽었어요. 타이어 태운 연기 때문에 앞이 안 보였어요. 그때 나도 선봉대였어요. 사람이 죽었는데 얼마나 겁났겠어요.
1990년대 후반인데도 하루에 20만원도 주고 50만원도 줬어요. 위험한 현장일수록 많이 줬고, 같은 현장에서도 선봉대로 서면 금액이 세요. 앞에서 밀고 나가면 뒤에서 받쳐줘요. 몽둥이 하나씩 들고 빨간 모자 쓰고 사람들 내쫓는 거예요. 용역이라도 빨간 모자 안 쓴 사람은 마구 때렸어요. 나도 모자 안 썼다가 용역들한테 두들겨 맞았어요.
나도 미친놈이었어요. 모르니까 한 거예요. 사람 할 짓이 아니에요. 몇 번 가고 안 갔어요. 지금은 일당 100만원 준다고 해도 안 나가요. 9만원, 10만원 받고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게 떳떳해요. 요즘 일이 없어서 걱정이에요. 일이 있어도 언제 뜯길지 모르니까 방을 두고 못 나가요. 그때 철거민들 쫓아내던 내가 지금 철거민이 됐잖아요. 사람 인생이 돌고 도는 거예요.”
동자동은 가난해서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이 가난해서 모여든 동네다. 가난의 길을 밟아 9-20으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제거돼야 할 사람들처럼 다시 흘러나가고 있다.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영상 이창민 감독 liberachang@gmail.com
*1년 추적 ‘가난의 경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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