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아입지 못한 옷처럼 그의 방만 거무튀튀하고 냄새났다.
건물을 가득 채운 시멘트 냄새를 뚫고 그 방의 냄새가 후각을 찔렀다. 18년 동안 한 뼘 방에 차곡차곡 퇴적된 냄새가 301호 ㄱ(84·제1070호 ‘개발의 환부를 걷다’ 참조)의 존재를 구성하고 증명하는 듯했다. 방 밖으로 넘쳐흐르던 그의 짐들은 302호로 떠내려가 있었다(10월23일 현재). 주민 45명 중 43명이 방을 빼는 동안 그의 살림 절반이 이사한 곳은 1m 건너 옆방이었다. 빈 사발면 그릇, 찌그러진 페트병, 알맹이 없는 라면 봉지, 원형을 가늠할 수 없는 기계 부품들이 302호에서 먼지에 절어 수북했다.
“딴 데로 안 나가서 다행이야. 여기서 끝내야지.”
난지도처럼 쌓인 짐 더미에 몸을 묻고 ㄱ은 안도했다.
지울 수 없는 얼룩처럼동자동 9-20의 내·외부가 옷을 바꿔 입고 있다. 건물주가 정한 최초 퇴거 시한(3월15일)으로부터 7개월 만에 리모델링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 7개월 동안 9-20은 격변했다. 지난 5월26일 내벽을 깨고 허무는 해머의 타격(게스트하우스로의 용도변경 공사)이 건물을 흔들었다. 6월23일 건물주는 전기를 끊으며 퇴거 불응 주민들을 압박했다. 버티지 못한 주민들이 차례로 떠나고 7월부턴 5명만 남았다. 불빛 없는 복도에서 넘어진 311호 ㄱ(54)은 머리를 다쳐 입원(이후 9-××로 이사)했다. 단수가 단행됐고 화장실에선 파리가 끓었다.
반전은 법원에서 나왔다. 퇴거 거부 주민들이 제기한 공사중지가처분이 9월7일 받아들여졌다. 재판부는 건물주의 조처가 “주민의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생활을 침해한다”고 결정했다. 보수·철거 공사와 출입문 폐쇄, 출입 방해, 단전·단수 등의 행위를 금지했다.
건물주는 용도변경을 포기했다. 쪽방을 유지하되 서울시에 건물 전체를 임대해줄 것을 요청했다. 공사가 끝나면 서울시와 건물주는 4년 임대계약을 체결하고, 서울시는 서울역쪽방상담소에 건물 운영을 위탁할 예정이다. 공적 성격이 강화된 9-20의 월세는 평균 15만원(보증금 없고 수도·전기요금 등 포함)으로 묶인다.
공사의 성격도 쪽방 보수로 바뀌었다. 게스트하우스를 만들 목적으로 부수고 쪽방으로 되돌리는 과정에서 건물은 날림으로 땜질됐다. 방문과 방문 사이의 간격과 복도 바닥에서 방 문턱까지의 높이가 모두 다르다. 턱이 높은 방의 문이 복도 천장 대들보에 닿아 개폐가 불가능해지자 대들보에 닿는 부분만큼 쇠톱으로 잘라냈다. 석고보드로 세운 벽은 서울시의 지적을 받고 시멘트 블록으로 대체됐다.
서울시가 9-20 임대해 위탁 운영9월14일 퇴거를 거부하던 106호 ㄱ(78)이 동자동 19-××로 짐을 옮겼다. 9-20의 운명이 ‘쪽방 존속’으로 결론 나자 공사가 마무리될 수 있도록 방을 비웠다. 부엌을 사이에 둔 2개짜리 방 중 그는 왼쪽 방을 썼다. 함께 7개월을 버틴 303호 ㅂ(45)이 며칠 뒤 오른쪽 방으로 들어왔다. 공사가 끝나면 그들은 9-20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9-20엔 301호 ㄱ과 203호 ㅂ(53)만 남아 공사를 견디고 있다. 203호 ㅂ은 건물주에게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개별 소송 중이다.
10월 말께 공사가 끝나면 재입주가 시작된다. 서울시는 퇴거 주민들이 원할 경우 우선 입주하도록 배려한다는 계획이다. 7개월을 돌아 9-20은 원점에 서고 있다. 주민과 건물주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 시간의 끝에서 ‘가난의 길’은 다시 이어지고 있다. 몇 명이 되돌아올지 알 수 없다.
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