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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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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부검될 수 있는 사인이 아니었다

동자동 9-20 강제퇴거자 중 첫 사망자 발생… 재입주 열흘 만에 실족사…철거되고 내몰리는 삶 반복하다 생애 마쳐
등록 2015-12-17 17:31 수정 2020-05-03 04:28
1년  추적연재


가난의  경로


⑦ 귀가
주제  귀가
무대  서울시 용산구 동자동 9-20
인물  박수광(61·가명), 유민식(48·가명)
내용  동자동 9-20 앞으로 펼쳐진 ‘가난의 경로’에서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 방문에 ‘퇴거 요구’ 딱지(2월4일)가 붙은 지 9개월 만에 9-20은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새 입주민을 받기 시작(11월9일)했다. 강제퇴거 주민 9명(퇴거 불응 주민 4명 포함)도 재입주했다. 그들 중 한 명이 건물 안에서 ‘실족사’했다. 그와의 생전 인터뷰와 사고 목격자들의 증언을 모아 ‘귀가’ 직후 멈춰버린 그의 마지막을 좇았다.
▶지난 연재 보러가기(아래)
① 딱지
② 이주
③ 이주2
④ 곡절
⑤ 그놈
⑥ 한양


강제퇴거됐다 재입주한 지 열흘 만(11월20일)에 사망한 박수광(61·가명)씨의 신발(복도 왼쪽 아래 감색 신발)이 주인 없이 방치돼 있다.

강제퇴거됐다 재입주한 지 열흘 만(11월20일)에 사망한 박수광(61·가명)씨의 신발(복도 왼쪽 아래 감색 신발)이 주인 없이 방치돼 있다.

옆방 문 앞에서 뒹구는 신발로부터 유민식(48·가명)은 짧은 눈길을 거뒀다.

“뭣하러 방에서 기어 나와가지고.”

코끝을 반대로 둔 감색 운동화 두 짝이 문 앞에 방치 혹은 유기돼 있었다. 주인을 따라가지 못한 낡은 신발은 뒤꿈치가 꺾인 모습으로 육신 없는 주인의 몸을 기억했다. 유민식은 꺾인 신발에서 평생 꺾인 채로 걷다 갔을 한 남자의 궤적을 읽었는지 모른다. 유민식이 뒤꿈치 꺾인 신발을 벗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열흘은 너무 짧았다.

한 칸짜리 계단에서 넘어져 절명

11월20일 박수광(61·가명)이 세상을 떠났다. 동자동 9-20에 재입주한 지 꼭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오전 11시께 그는 건물 밖으로 나오다 복도와 출입구 사이의 한 칸짜리 계단에서 넘어졌다. 머리를 부딪혔고 의식을 잃었다. 동네에 와 있던 방문 간호사가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옮겼으나 소생하지 못했다.

그는 9-20에서 퇴거당한 사람들 중 첫 번째 사망자(209호 ㄱ은 강제퇴거 전 사망)가 됐다. 그가 실족해서 죽음에 이른 것인지, 그의 오랜 병이 실족을 부른 것인지, 목격자들은 알지 못했다. 이웃들은 “평소 자주 쓰러지던 사람”으로 그를 기억했다.

“방에 있는데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려요. 나와보니까 건물 입구 쪽에 넘어져 있더라고요. 간호사가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을 때 구급차가 왔어요.”

9-20의 새 입주민 ㅊ(53)이 ‘무심한 목격담’을 읊었다. 거리 생활을 오래한 그는 “몸 추스를 곳이 필요해” 동자동 ㄱ여인숙에 투숙한 뒤 값싼 방을 찾아 9-20에 들었다. “죽은 지 며칠 만에 눈에 띄는 사람도 많은데 바로 발견돼서 다행”이란 이웃도 있었다. 죽음이 흔한 동네에서 혼자 죽어 발견되지 않는 주검이 적지 않았다.

박수광의 사망 열흘 뒤(11월30일) 동네 사람들이 그의 방을 정리했다. 전날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받아온 새 이불(기증 물품)이 포장 비닐도 뜯지 않은 채로 있었다. 신분증과 의료 기록 등을 수습했고, 쓸모를 찾기 어려운 것들은 고물 줍는 주민에게 내줬다. 냉장고·텔레비전과 박수광의 몸을 감싸보지 못한 이불은 다음 입주자를 위해 남겨뒀다.

연락이 닿지 않을 줄 알았던 가족이 이날 9-20을 찾았다. 15년 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딸들이 아버지의 한 뼘 방에 들어가 오열했다. 딸들은 사망 이튿날 아버지의 주검을 인수해 장례를 치렀다. “가족이 죽은 아버지를 버리지 않아 그래도 덜 아프겠다”고 누군가 말했다. 지난 2월 박수광과 친했던 9-19 ㅊ(56·남)이 떠났을 때 그의 가족은 시신포기 각서를 쓰고 연락을 끊었다.

박수광의 딸들은 경기도 성남에서 와서 성남으로 돌아갔다. 성남인 이유를 박수광은 살아 있을 때 정돈되지 않는 기억을 훑어 이야기했다(4월 인터뷰).

박수광은 1954년 경북 영천에서 나서 1971년(당시 17살) 상경했다.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그는 동대문상가를 오가며 품을 팔았다. 사흘 일하면 밀가루 반 포대를 받았다. 그해 그가 일하던 점포가 바스러졌다. 박정희 정부는 1969년부터 서울의 판자촌들을 강제철거했고, 철거민 십수만 명을 거둬 경기도 성남(옛 광주군)에 뿌렸다.

“정부가 철거된 점포한텐 땅을 준대서 가게 주인을 따라 광주까지 갔어. 산등성이 땅 20평이야. 멀쩡한 점포 빼앗기고 껌값을 받은 거야. 동대문 점포 철거되고 남은 나무 기둥을 싣고 갔는데 도저히 다시 못 짓겠어. 나무만 1만원 받고 팔고 천막 치고 살았어. 준다던 일자리는 고사하고 수도도 없고 버스도 안 다녀. 분양권은 불법 전매되고. 누군들 가만있을 수 있겠어.” 철거민 수만 명이 도시를 점거하며 폭발(1971년 8월 ‘광주 대단지 사건’)했다.

그가 성남에 남아 붙든 생계의 끈은 양복 일이었다. 옷 만드는 기술을 배워 맞춤 양복점을 냈으나, 기성복으로 대체되는 시대를 이기지 못했다. 양복점 간판을 내리고 세탁소 간판을 올렸지만, 가라앉은 인생까지 끌어올리진 못했다. 빚쟁이에게 쫓겨 가족을 남겨두고 사라진 그가 10여 년 전 동자동의 작은 방 앞에서 신발을 벗었다. 가난해서 얻은 겹겹의 질병이 그를 따라와 한방에서 기숙했다. 동대문에서도, 성남에서도, 동자동에서도, 요약될 수 없는 한 사람의 생애가 ‘철거되고 내몰리는 삶의 반복’으로 요약됐다.

방으로 얽힌 두 사람

11월19일 밤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유민식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고, 시계 시침은 23시 근처에 가 있었다. 방문을 열자 박수광이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쥔 채 서 있었다.

“머리가 아파 죽을 것 같아. 소주 한 병만 사다줘.” 옆방에 살았지만 자주 말을 섞는 사이는 아니었다. 강제퇴거 전 그들은 사는 층이 달랐다. 9-20에서 나온 뒤 박수광이 아는 체했을 때 유민식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날 밤 박수광은 “밥을 도저히 넘길 수 없다”고 했다. “소주라도 안 마시면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다”고도 했다. 유민식이 소주 한 병을 사들고 박수광의 방에 앉았을 때 이미 소주병 5개가 비어 있었다. 동네 사람 한 명이 찾아왔다. 좁은 방이 3명의 몸으로 잔뜩 부풀었다.

얽히고설키는 일에 반드시 의지가 필요한 건 아니다. 친밀하지 않았을지 모를 두 사람의 방은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긴밀했다.

11월10일 박수광은 동자동 9-20 1**호로 돌아왔다. 지난 6월 말 방을 뺀 뒤 5개월여 만이었다. 그는 끝까지 퇴거에 응하지 않은 주민들(4명)을 빼면 가장 먼저 귀가한 강제퇴거자였다. 그가 9-20에서 나와 이사한 곳은 직선거리 40m 떨어진 9-*이었다. 지하 5호 ㅅ(80)과 208호 ㅇ(60), 305호 ㅈ(69)이 서로의 경로를 의식하지 못한 채 같은 번지로 스미었다.

박수광은 재입주 공고 하루 만에 9-20으로 짐을 옮겼다. 9-*의 방값(21만원)은 9-20에 살 때(15만원)보다 6만원 더 비쌌다. 고장 난 다리는 계단을 오르는 그의 체중을 이기지 못했다. 그는 9-* 3층에서 9-20 1층(보수공사 뒤 16만원)으로 방값 5만원과 고도 2개층을 낮춰 이사했다. “1층에서 이 방이 가장 좁아. 아직 이삿짐도 못 풀고 있어.”(이사 이튿날 인터뷰) 짐 박스가 모두 차지한 방에서 짐짝처럼 누운 그가 말했다.

박수광이 재입주한 날 유민식이 옆방으로 이사 왔다. 박수광이 옆에 와 있는 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는 다만 9-20에 살 때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왔을 뿐이다. 유민식은 강제퇴거 과정에서 9-20을 떠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지난 2월 건물주가 ‘퇴거 요구’ 딱지를 붙이기 직전 관리인의 종용으로 방을 비웠다. 유민식은 강제퇴거자들 중 가장 ‘복잡한 경로’를 그린 사람이기도 했다. 9-20을 떠난 뒤 도착한 곳은 25m 거리의 9-**(월세 17만원)이었다. 5월이 되자 그는 “건강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한 뒤인 8월 “방이 작다”며 5-*(9-20으로부터 80m 거리·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20만원)로 옮겼다. 두 달 뒤 “방값이 비싸” 9-**(2m 거리·월세 17만원)로 이사했고, 다시 11월 “계단 오르기가 힘들어” 9-20 1층으로 재입주했다. 그때마다 101호 ㄱ(80m 거리의 5-*)과 지하 6호 ㅇ·지하 7호 ㅇ·지하 8호 ㅁ·지하 9호 ㄱ·지하 10호 ㄱ·101호 ㄱ·104호 ㅇ·202호 ㄱ·302호 ㅊ(2m 거리의 9-**)의 길들이 그의 길과 겹쳐졌다. 그리고 9-20에서 유민식은 박수광을 다시 만났다.

“방 안에 가만히 있었으면 안 죽었을 텐데.”

유민식은 그렇게 생각했다. 11월20일은 수급일이었다. 기초생활보장 급여가 통장에 입금되는 날이었다. 박수광은 수급비를 받아 방값을 내기로 하고 입주했다. 수급비를 찾으러 가다 사고를 당했을 거라고 다른 주민들은 짐작했다.

귀가하자마자 주검으로 다시 떠나

유민식은 자신의 방에 9-20 퇴거 전 박수광이 잠시 의탁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지난 6월 건물주와 공사업체가 빈방을 부수면서 한 건물 안에서 폐허와 거주가 공존했다. 박수광은 누수로 방바닥에 물이 고이는 3**호를 떠나 유민식의 빈방으로 짐을 옮겼다.

박수광이 유민식의 방에 눕자마자 박수광의 방은 해머에 맞아 깨졌고 유민식의 방은 생명을 연장했다. 박수광이 국립중앙의료원에서 퇴원한 직후의 일이었다. 그때도 박수광은 “머리가 핑 돌아 바닥에 쿵 처박힌 뒤” 119 구급차로 실려갔다. “병원에서도 피를 많이 쏟았어. 뇌빈혈이라는데 쉽게 수술도 못하고 하소연도 못해.”(6월 초 인터뷰)

9-20으로 이사하는 날에도 박수광은 갑자기 옆으로 넘어졌다. 이사를 돕던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우건일 사랑방마을공제협동조합 이사장은 말했다. “실족이 아니더라도 몸의 기능이 다하고 있었던 것 같다. 머지않아 죽을 거라 스스로 이야기하곤 했다.”

귀가 열흘 만에 박수광은 주검이 되어 다시 떠났다. 원인이 파악되지 않는 실족으로 그는 절명했다. 가난은 부검될 수 있는 사인이 아니었다. 향년 61.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영상 이창민 감독 liberachang@gmail.com

*1년 추적 ‘가난의 경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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