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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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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특별’해진 ‘일반’인 유가족들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 세월호 특별법 재합의안 수용 발표 뒤 쏟아진 관심…

잊지 않겠다던 세상은 한켠에서 죽음마저 차별하고
등록 2014-09-19 14:51 수정 2020-05-03 04:27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32일이 되던 지난 8월25일. 거의 모든 국내 방송과 신문들이 이들에게 집중했다. 연신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들. 마치 아주 오랫동안 고대하고 있었다는 듯이 모두가 이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여야가 재합의한 특별법안에 대해 일반인 유가족들은 수용함을 천명합니다.”

함부로 ‘이해한다’ 하지 말라

1968년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현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서 열린 제1회 무역박람회 개막식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 모습(왼쪽). 서울디지털산업단지가 조성된 초기였던 1967년 전경. 한국산업단지공단 제공

1968년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현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서 열린 제1회 무역박람회 개막식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 모습(왼쪽). 서울디지털산업단지가 조성된 초기였던 1967년 전경. 한국산업단지공단 제공

그랬다. ‘일반인 유가족 대책위’는 여야의 재합의안을 거부하고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특별법을 요구하며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하던 경기도 안산 단원고 희생자 유가족들 중심의 가족대책위와 다른 입장을 밝혔다. 기다렸다는 듯 보수 성향의 언론들이 유가족들 사이에 입장이 갈렸다며 대서특필했다. 수많은 신문과 방송이 경쟁하듯 일반인 유가족들과의 인터뷰를 실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이해할 만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도대체 일반인 유가족들이 누구냐’는 등 엇갈린 의견들로 분분했다. ‘세월호 참사의 철저한 진상 규명과 또 다른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 특별법이 반드시 제정돼야 한다. 국회는 유가족들의 고통을 가중할 뿐인 정쟁을 멈추고 조속히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강조했지만 이 말은 들리지 않았다.

일반인 유가족, 이들을 처음 만난 건 7월 중순이었다. 참사로 고통을 겪고 있지만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진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숨죽인 목소리를 알리겠다며 시작한 활동이 한 달여 됐을 즈음이다. 당시 제대로 된 특별법의 제정을 촉구하며 서울 여의도 국회와 광화문 앞에서 유가족들이 농성을 시작했고 일반인 유가족들도 의견을 모아 동참하고 있었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매일 국회본청과 광화문 앞 농성장을 함께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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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 첫날부터 국회와 광화문 그리고 인천 분향소를 오가며 일반인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일반인 유가족들 사정을 좀 아세요? 무슨 말을 해드릴까요? 얘기를 다 하려면 3박4일이 걸리는데.” 농성장에서 처음 만났던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 대책위 이정석 총무는 함부로 ‘이해한다’ 하지 말라고 했다. 별별 사람들이 찾아와 ‘이해한다며 도와주겠노라’ 했지만 대부분 일반인 희생자와 유가족의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반복할 뿐 참사 이후 일반인 유가족이 겪어온 아픔에 진정으로 공감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고 했다. 미안했다. ‘단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며 함께하겠다’고 다짐했지만 다가섬은 늘 한두 발씩 부족했기에 찔린 마음이 뜨끔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희생자와 실종자 수는 304명이라고 알려졌다. 이들 중 단원고 학생과 교사 등이 아닌 ‘일반인’으로 분류되는 희생자와 실종자는 43명이다. 그 유가족은 39가족이다. 일반인 희생자들의 사정은 너무도 다양하다. 6~7살 어린아이부터 70대 어르신까지 연령대 폭도 넓고, 서울·경기·인천·제주 등 연고지도 각기 다르다.

명백하게 소외된 일반인 희생자들

가족의 유일한 소득원으로 고교 졸업 뒤 내내 부모·형제를 부양하던 착한 딸, 치매 앓는 노모를 모시며 결혼도 미뤘던 효심 깊은 아들, 대학을 휴학하고 부모님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 아르바이트를 했던 금쪽같은 외동아들, 아내와 자식을 위한 것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던 든든한 남편, 한평생 자식을 위해 살아오다 모처럼 친구들과 여행을 가던 부모님, 남편 하나 믿고 먼 타국까지 와서 가정을 이뤄 새로운 터전에서 행복을 일구러 가던 이주여성과 그 가족, 온 가족의 축복 속에 아름답고 소중한 사랑의 언약을 맺으려던 두 연인, 멀리 고향을 떠나온 외로움과 노동의 힘겨움을 이겨내며 사랑하는 연인과의 소박한 꿈을 키워가던 재외동포 이주노동자 등…. “일반인 유가족분들 얘기를 듣고 있으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애환이 여기 다 있어요.” 이정석 총무를 비롯해 일반인 유가족 대책위의 임원들은 그동안 유가족들이 털어놓은 수많은 사연을 조금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듣고 위로하며 도왔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랬어요. 일반인들은 다들 살 만큼 산 사람이 아니냐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유가족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깊은 상처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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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나고 3일 뒤에야 전남 진도에 갔어요. 하필 막내동생 결혼식이 그 주말에 예정돼 있었거든요. 여행 즐겁게 마치고 돌아오겠다고 하셨는데. 그때 못 가시게 말렸어야 했는데….” 이 총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는 환갑을 맞은 초등학교 동창들과 제주 여행을 가던 길이었다. 결혼식을 포기하려던 동생을 설득해 형식만 갖춰 식을 치르고 바로 진도로 갔다. 맏이였기에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런데 진도체육관과 팽목항에서 맞닥뜨린 상황이 간신히 참아내고 있던 그를 견디기 힘들게 했다. 유가족에 대한 지원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실종자 수색 활동과 사망자 주검 수습, 그리고 장례 처리에서조차 일반인은 명백하게 소외돼 있었다. 정부 관계자 어느 누구도 일반인 유가족들에게 와서 안내해주지 않았다. 주검 수습과 장례 절차마저 희생 학생들에게 지원되는 과정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기억해두었다가 일반인 희생자들에게도 그에 준한 지원을 해달라고 항의해야 했다. 정부의 수습대책이나 유가족 지원책은 고사하고 언론과 시민사회의 관심조차 일반인 희생자와 유가족에게는 닿지 않았다. 한 사회단체가 유가족들에게 사용하라고 여러 개의 텐트를 설치했지만 일반인 유가족들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며칠을 사정하고 또 항의를 하다 기자대기실로 배정된 텐트에 무작정 들어가 버티면서 겨우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때 거기 있던 분들은 다 알 겁니다. 아예 처음부터 일반인 희생자들은 없는 걸로 취급됐어요.”

‘슬픔과 아픔의 무게는 다를 수 없다’

가족 잃은 슬픔으로 경황조차 없었던 이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면서 어렵게 알게 된 서로의 정보도 공유했다. 처음 인천에 연고가 있던 희생자 유가족을 중심으로 시작된 모임이 빠르게 커졌다. 소식을 들은 유가족의 도움 요청이 전국에서 들어왔다. 참사 한 달여가 지날 무렵 함께하기로 한 유가족이 모여 우여곡절 끝에 ‘세월호 참사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 대책위원회’를 만들 수 있었다. 대책위는 일반인 희생자와 유가족의 사정을 하나하나 챙겼다. 지역과 상황은 달랐지만 참사 이후 유가족들이 겪고 있는 아픔은 모두 비슷했다. 희생자 유가족으로서 온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었다. 정부가 긴급지원 대책을 내놨지만 지방자치단체에 따라, 또 담당자에 따라 그 기준이 달랐다. 어이없는 차별 앞에 대다수의 일반인 유가족이 고개를 떨궈야 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가장을 잃어 당장의 삶을 걱정해야 하는 유가족조차 마찬가지였다. 부모의 부담을 덜고자 2박3일간 11만7천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하다 희생된 19살, 20살 두 청년의 죽음은 승무원이라는 이유로, 또 정직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부도 선박회사도 모두 책임을 회피했다. 정부가 안산에 설치한 정부합동분향소에도 처음엔 일반인 희생자의 영정이 함께 있지 못했다. 청와대가 유가족을 만나는 자리에도 일반인 희생자의 유가족은 초대받지 못했다. 교육부가 추진한 희생자 추모관에 안치될 대상에서도 일반인 희생자는 빠져 있었다. “학생들은 교육 연장선에서 참사를 당한 희생자지만, 일반인은 교육 목적이 아니라 생계나 여가 목적으로 탑승한 것이라는 말이 정부 관계자들의 입에서 공공연히 나오는 지경이었는데 뭘 더 말하겠어요.”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족의 슬픔과 아픔의 무게는 각기 다를 수 없다.’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대한민국 국민인 일반인 희생자들의 죽음을 차별하지 말라.’ 참사 뒤 37일이 되던 5월22일, 일반인 유가족 대책위의 첫 공식 기자회견은 사회의 무관심에 대한 애타는 토로였고 정부의 차별에 대한 울분의 항의였다. 언론이 관심을 보였고 정부도 연락을 해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세상의 관심은 이내 잦아들었고 정부의 대답은 늘 이해할 수 없는 변명이었다. ‘구조’는 하지 않고 ‘구경’만 하더니 ‘지원’은 하지 않고 ‘지침’만 내밀었다. 그렇게 삶과 죽음을 가르더니 또 그렇게 삶과 죽음에 값을 매긴 것이다. 그 지침엔 ‘일반인용’이라 적혀 있다. “저희는 ‘특별’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냥 ‘일반’인 거죠.” 가족을 잃은 슬픔보다 더 큰 아픔으로 몸서리쳐야 했던 이유다.

유가족 두고 편 가르는 가벼운 혀

그렇게 ‘일반’이 되어버린 이들에게 최근 갑자기 ‘특별’한 시선이 쏟아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4개월을 훌쩍 넘기는 동안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관심이라 어리둥절하다. 지난 8월 말 기자회견을 전후로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들이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정작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남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유가족들을 두고 어느새 편을 갈랐다. 비난, 지지, 폄하에 왜곡까지…. 그날의 기자회견으로 ‘일반인 유가족’의 존재가 세간에 확실하게 인식됐다는 것 하나만은 분명한 듯하다. “아이러니죠.” 이 총무의 말에 쓴웃음이 배어 있다.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반’으로 편 갈려져 차별받아야 했던 사람들. 잊히지 않으려 애썼지만 잊혀지는 현실에 절망하고 늘 스스로를 위무해야 했던 사람들. 그런데 왜일까. 요즘 이들에게 쏟아지는 ‘특별’한 관심이 몹시 두렵다.

최현모 인권재단사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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