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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방학숙제

김정일의 기관총 사냥, 그게 반공인가
등록 2012-07-16 18:10 수정 2020-05-02 04:26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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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충격적인 방학숙제가 뭐였더라. 국민학교 5학년 때였나. 여름방학이 시작하는 날, 탐구생활과 함께 등사지로 8절지 갱지에 찍어낸 인쇄물이 한 장씩 건네졌다. 방학숙제, 비상연락망, 소집일 등이 담긴 ‘두근두근’ 종이였다. 받아들고 절망했다. 여름방학 숙제로 ‘반공독후감 20편’이 떨어졌다. 그해 특별하게 북한이 사고쳤던 기억은 없다. 찾아보니 심심하면 날아들던 중공기가 한 대 불시착하기는 했는데 여름방학이 끝난 뒤였다. 중공기가 반공독후감 폭탄을 투하했을 리 없다는 얘기다. 선생님이 11살짜리들이 쓴 반공독후감 애독자였을 리도 없다. 그런데 왜 그런 숙제를 내줬을까.

시대가 시인을 호명한다더니. 나는 문방구로 향했다. “아줌마, 원고지 주세요. 그거 말고요. 거기 그거.” 11살짜리 소년이 달라고 한 ‘거기 그거’는 물경 200자 원고지 100장 묶음이었다. “소설 쓰냐?” 기자가 된 지금 이 말을 들으면 답하기 전에 살짝 고민될 수도 있겠다. 그때는 아니었다. “아뇨. 독후감요.” 반공서적이 참 많기는 했다. 그렇더라도 꿈 많은 소년이, 누구는 시골에 갔다가 첫사랑을 만나기도 했다는, 파충류 외계인 지구정복 극복 미국 드라마 가 한국을 휩쓸고 간 그 여름방학 내내, 하루에 한 편씩 반공독후감을 써야 하는 현실은, 좀 그렇지 않나. 전두환씨, 대답 좀 해보자.
꿩인지 뭔지 날아다니는 거 수백 마리를 하늘에 풀어주면 어디선가 미그기를 몰고 온 김정일이 기관총 사냥을 한다는 독후감이 있었던 거 같다. 나름 취미인데, 그게 왜 반공인지. 지금 생각해보면 익스트림 스포츠다. 새떼와 충돌한 비행기는 골로 간다. 어쨌든 꿩이 시속 300km로 편대비행을 하지 않는 한, 꿩떼를 지나친 지도자 동지는 다시 돌아오는 데 시간 좀 걸릴 듯했다.
중학생인 형에게는 당시 한국 산업 수준에 맞춘, 노동집약형 방학숙제가 부과돼 있었다. 형네 학교에는 양궁부가 있었다. 전교생 대략 1800명에게 양궁 과녁판을 그려오라는 숙제가 떨어졌다. 그것도 1인당 3장씩. 날로 먹어도 이런 게 없다. 노랑, 빨강, 파랑 칠해야 하니 미술 숙제였다. 그런데 사실상 만들기 숙제 아닌가. 마루에 전지가 깔렸다. 동그란 과녁을 연속적으로 그리기 위해, 종이를 길게 자른 뒤 일정하게 구멍을 뚫은 거대한 종이 컴퍼스를 만들었다. 별짓 다 했다. 나에게도 불법하청이 한 장 떨어졌다. 재룟값도 안 주고 학교가 착취한 학생이, 또 다른 저학년 학생을 착취하는, 한국이 제3세계를 쥐어짜는 듯한, 그런 먹이사슬이 완성됐다. 방학숙제가 당시 노동 현실을 반영한다면 믿겠는가. 하얀 전지를 바라보며 동그라미 대신 불법하청의 억울한 심정을 글로 쓰고 싶었다. 대학생이 된 뒤 그 소원은 풀었다.
더 큰 충격은 개학 뒤 찾아왔다. 우리 반에서 반공독후감 20편을 다 써간 미친놈은 나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이상한 미소를 지으며 칭찬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도, 제대로 미쳤다는 표정이었을 거다. 그해 겨울방학에도 어김없이 반공독후감 20편이 찾아왔다. 나는 여름방학 숙제를 순서만 바꿔서 다시 철했다. 소년은 그렇게 어른이 됐다. 여름방학이다. 반공독후감 숙제는 없겠지.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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