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일이다. 이건 뭐, 그냥, 제대로 털어갔다. 다용도실 방범창을 뜯고 들어온 그는, 그만 창문 바로 앞에 서 있던 스테인리스 수납장을 쓰러뜨렸다. 꽤나 큰 소리가 났을 것이다. 놀란 마음을 애써 진정시킨 뒤, 예의도 없이 신발을 신은 채 곧장 안방으로 내달렸을 것이다. 침대에는 그가 의도치 않게 항목별로 분류해놓은 옷가지와 장신구 등이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 추상화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저걸 언제 치우나, 한숨이 먼저 나왔다. 그는 안방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둔 뒤, 서재로 꾸며진 방으로 건너갔다. 헌책방을 뒤져 애써 수집한, 1948년 해방공간에서 발행된, 이른바 ‘똥종이’에 인쇄된 좌익 서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외서인 낡은 바티칸 금서목록집도 그대로였다. 나였다면 저걸 들고 갔을 것이다. 취재 자료로 가지고 있던 ‘전국 조폭 리스트’가 널브러져 있었다. 흠칫 놀랐을 그는, 이어 옷방을 마지막 타깃으로 삼아 돌진했다. 21세기형 웰빙 도둑은 그 와중에 식탁 위에 놓여 있던 비타민까지 몇 알을 드시고 가셨다. 한시도 사주경계를 늦출 수 없는 극한 직업. 초긴장의 작업 현장에서 건강까지 알뜰히 챙기는 그의 투철한 직업정신이 느껴졌다. 그런 전문가시니, 그는 아직까지 잡히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관할 경찰서 형사과장은 “이미 어디선가 다른 건으로 잡혔겠지만 여죄를 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영구미제가 됐다는 얘기다. 안녕, 내 재물들아.
도둑이 검사와 얽히면 얘기는 달라진다. 어느 고위직 검사의 총각 시절, 그와 도둑의 이야기다. 사건이 너무 많아 검사실에서 먹고자다 간만에 집으로 돌아왔더니 집 안 공기가 이상했다. 방바닥 한가운데, 주방에 있어야 할 식칼이 꽂혀 있었단다(시멘트 바닥에 칼이 어찌 꽂혔냐는, 보고 과학 따지는 식의 질문은 하지 말자. 야구 배트도 썬다고 설레발치는 장미칼이나 엑스칼리버표 식칼이라고 해두자). 지난 몇 년간 자신의 손으로 잡아넣은 인간들이 영화 필름처럼 차르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고 했다. 식칼은 무슨 의미인가. 보복인가, 아니면 요리를 해주겠다는 건가. 관할 경찰서가 발칵 뒤집혔다. 경찰은 현직 검사를 노린 보복범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본부’까지 차렸다. 얼마 뒤 겁도 없이 검사 집에 칼을 꽂고 사라졌던 이가 잡혔다. 그냥 좀도둑이었다. 빈집을 턴 뒤 그 집 식칼을 방바닥에 꽂아야 잡히지 않는다는 업계 토속신앙을 믿었을 뿐이었다.
지난 8월16일. 국가정보원 대선 여론조작 사건 수사를 축소·은폐하라고 지시한 혐의로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를 오전부터 자정까지 보고 있자니 갑자기 몇 년 전 털린 집과, 기어이 잡혔던 도둑과, 끝내 도망친 또 다른 도둑이 생각났다. 나와 도둑과 큰 도둑놈. 시인 백석을 빌리자면 이렇다. ‘집을 털린 내가/ 잡히지 않은 도둑이 궁금해서/ 오늘밤은 푹푹 한숨이 나온다.’ 경찰이 딴짓하니 도둑이 안 잡히지. 어디서 뭐하십니까, 경찰.
김남일 정치부 기자 namfic@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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