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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얼굴을 한 만화자본 시대

우리시대의 웹툰, <아이큐 점프>
등록 2013-08-02 18:14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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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어떤 놈이 교실에서 동을 떠서 100원씩 모았다. 암묵적으로 200원을 낸 놈이 소유권을 가지는 시스템이 정착됐다. 200원을 내 는 놈은 언제나 200원을 냈는데, 자본의 본원적 축적에 성공한 놈 이 분명했다. 대신 소지품 검사에 걸릴 위험부담은 200원을 낸 자본 가놈이 훨씬 크게 져야 했다. 우리 100원짜리 소액주주들은 출자금 만큼만 책임지는 유한책임회사 시스템이라고 설레발을 쳤다. 파산이 멀지 않았음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우리는 매주 발매되는 만화잡지 를 사기 위해 교실에 서 돈을 모았다. 요즘 말로 하면 크라우딩펀딩이 되겠다. 때가 되면 판매가격이 100원씩 올랐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1천원대 가격에는 큰 변함이 없었다. 열댓 놈이 100원씩 내고, 200원을 낸 놈이 마지 막 물권을 행사할 때까지, 주간만화잡지 는 교실 안을 돌고 돌았다. 100원을 내지 않은 나머지 40여 명도 만화책을 볼 수 있었다. 순서 는 조금 늦더라도 소외되지 않았다. 인 간의 얼굴을 한 만화자본의 시대, 아름 다운 시절, 벨 에포크였다.

창간호부터 실린 이현세의 은, 쓸데없이 심오했다. 어쨌든 는 로 기억돼 마땅하다. 100원씩 추렴한 것도 사실은 을 보기 위함이었다. 우주 의 생명에너지를 야금야금 모아서 덩어리로 방출하는 무시무시한 기술 ‘원기옥’, 몸 안의 힘을 몇 배로 불려준다는 ‘계왕권’ 따위나 떠 들고 다녔지만 매주 맨 뒤에 몇 장 붙어 있지도 않은 을 읽기 위해 돈 모아 기다렸다.

그러나, 라는 제국의 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가 창간됐고, 의 시대가 도래했다. 미국 프로농구 NBA 열풍이 불던 때였다. 이제 교실 안에는 거대 만화자본 두 개가 공존 했다. 독점은 독과점이 됐지만, 여전히 인간적인 만화자본의 시대였 다. 이 ‘산왕고’라면, 는 ‘북산고’였다. 와 는 농구공 백패스처럼 선생님 몰래 1분단과 2분단 사이를 오갔다. 우리 시대의 웹툰이었다.

파산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만화계의 동렬이()도, 종범이 ()도 떠났다. 만화대여점 시대가 활짝 열렸다. 수십만 부에 달하던 주간만화잡지 발행 부수가 뚝뚝 떨어졌다. 즐겨 보던 순정만 화잡지 도 어느덧 사라졌다.

아, 그러고 보니 고등학생 때 즐겨 보던, 뭔가 세미프로 정도의 느낌 이 나던 19금 야한 잡지 가 있었다. 얼마 전 부모님 집에 갔 더니 내 방에 쌓아둔 옛날 책들 사이에 가 보였다. 참고서 팔던 학교 앞 서점 주인 아줌마는, 와 사이 에 이걸 끼워서 줬다. 뒤적여보니, 추억은 돋는데 이건 뭐, 요즘 케이 블TV만도 못하네. 느낌이 없다.

김남일 정치부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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