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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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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전’과 ‘이물질 소주’

잊을 수 없는 대동제 술판
등록 2013-04-26 11:09 수정 2020-05-02 19:27

술 없는 축제라니요. 요즘 대동제 기간을 앞두고 몇몇 대학에서 술 없는 축제를 추진한다고 한다. 참으로 건전해지는 세상이다.
천막 치고, 라면 박스로 술상 만들고, 1학년들은 호객하고, 음식 좀 한다고 설치는 것들은 전을 부치고, 시장에서 끊어온 순대에 대충 당면 넣어서 볶고, 미적지근한 막걸리를 마시다가 왜 내가 여기서 따뜻한 맥주를 마시고 있지, 생각하다가 눅눅해진 종이컵에 밍밍한 소주를 부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한겨레 이정아 기자

1학년 때였다. 나는 부추전을 만들었다. 장사가 나름 됐다. 오후 늦게 재료가 동났다. 친하지도 않은데 학과 교류를 하겠다며 ‘빨간 깃발’을 든 다른 대학 숭악한 인간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지하철 타는 법을 몰라 전철표 투입구에 직접 동전을 넣는다는 소문이 돌던 애들이었다. 듣던 대로 막걸리를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그건 주겠는데, 전은 떨어졌다고 했다. 전을 내놓으라고 했다. 밀가루 반죽은 많은데 부추가 없었다. 고전적인 레시피를 쓰기로 했다. 잔디에도 ‘5월 신록’이라는 말을 쓰는지 모르겠다만, 때깔이 고왔다. 한 움큼 뜯어서 씻지도 않고 반죽에 넣었다. 그럴듯했다. 지져서 내놓았더니 ‘절대 미각’이라고 떠들던 애들이 맛있다며 먹는다. 다음날 죽었다는 애는 없었다.

봄에 뿌린 악행은 가을에 풍년으로 돌아왔다. 잔디전 레시피를 선보이고 넉 달 뒤, 이번에는 우리 과가 빨간 깃발 대학으로 찾아갔다. 굳이 그 대학까지 가고 싶어 하는 여학우는 거의 없었기에, 일부 남학우만이 청나라로 끌려가는 조선인의 심정으로, 일부는 육탄 10용사 같은 처절한 결심을 품고 뛰어들었다.

중과부적이었다. 우리 쪽 1명에 청나라 군사 20명이 달라붙었다. 다행히 잔디밭이 아닌 넓은 아스팔트 바닥에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나에게 아스팔트를 먹일 수는 없는 법이다. 나이 많은 청나라 군사가 소주를 땄다. 병째 한 모금 마시더니 오른쪽으로 돌렸다. “나한테까지 다시 오면 알지?” 소주는 채 4명을 넘기 전에 바닥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나보고 소주를 돌리란다. 두꺼비를 한 병 따서, 적당히 홀짝인 뒤 왼쪽으로 돌렸다. “잘 부탁해요.” 순진했다. 청나라 군사 20명이 돌아가며 소주병을 빨았는데 이상하게도 양은 줄지 않았다. 이물질이 들어간 소주병은 애초 용량보다 많아지고 혼탁해진 상태에서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이런 경우는 돌린 사람이 다 마셔야 한단다. 이게 법이냐? 소주 한 병을 원샷하고 나는 이성을 잃었고, 전철표 투입구에 동전을 넣고 있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대동제에 대기업 협찬이나 상품 광고는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학생들이 막았다. 지금은? 차라리 술이 낫다고 본다. 마셔라 마셔라 쭉쭉쭉쭉쭉~.

김남일 기자 한겨레 정치부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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