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전 비상연락망을 ‘조직’했다. 점조직이 었다. 학교에서는 분단별이었는지, 사는 동네별이었는지 몇 명한테만 대표적으로 연락을 한다. 연락받은 아이는 다음 아이에게 연락하고, 그 아이는 다시 다음 아이에게 연락하는 식이다. ‘선’이 끊기면 얼어죽 는 빨치산 같은 긴장감은 전혀 없었지만, 아이들의 뜻모를 의무감을 자극하는 연락망이었다. 간혹 집에 전화가 없는 애들에게는 ‘누구야 놀자’식으로 집까지 찾아가서 불러젖혀야 했다.
뭐, 국민학생들에게 비상을 걸 만한 대단한 일이라도 있겠느냐마는. 날이 추워서 개학을 연기한다는, 꿈같은 비상연락은 절대 오지 않았 다. 선이 끊어져 개학 연기 연락을 받지 못한 아이가 있었다고 한다. 아무도 없는 휑한 학교에 혼자 등교했다가 추위에 떨며 울면서 집으 로 돌아왔다는, 몇 해 전 소문만이 전설처럼 떠돌았다.
‘아동노동’을 강요하는 경우는 있었다. 폭설이 내리면 눈 치우러 오라 는 비상연락이 왔다. 왓더헬! 도대체 변변찮은 운동부도 없던 학교에 서 방학 중에 쌓인 눈을 왜 치워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 는 널찍한 나무합판에 손잡이용 각목을 덧댄 눈삽이 하나씩 주어졌 다. 눈삽 양쪽에 줄을 연결해 3인1조가 되어 소처럼 일하기도 했다. 2 명은 줄을 잡고 앞에서 끌면 1명은 뒤에서 손잡이를 잡고 눈을 밀어냈 다. 처음에는 재밌다고 ‘우헤헤’거리며 눈을 치우다가, 운동장 이쪽에 서 저쪽까지 두 번만 왕복하면 우울해졌다.
추웠다. 화학솜으로 만든 두툼한 ‘잠바’, 안감을 부들부들하게 처리한 털장화, 그런데도 빨갛게 얼어붙은 볼. 겨울철, 코 흘리는 어린 것들끼 리 모여 찍은 사진을 보면 다 그랬다. 그렇게들 차려입고 눈 치우러 나 타났다. 그 와중에도 학교 체육복에 목도리 하나 달랑 두르고 시크한 척하다가 두 손을 겨드랑이에 끼고 오들오들 떠는 바보들도 있었고.
그런 놈이라도 체육복 소매 밖으로 비죽 튀어나온 것이 있었으니 내 복이었다. 특히 소매 밖으로 비죽 튀어나온 빨간색 내복은 눈에 잘 띄 었다. 다들 옛 앨범을 한번 펴보시라. 원초적 빨간 내복만 입고 안방 에서 뛰어노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니. 심심하면 왼손으로 오른 팔 내복 소매 끝을 당겨 오른손으로 잡은 뒤 콧물을 쓱 닦아내기도 했다. 소매는 허옇게 변했다. 더 심심하면 내복 소매 끝을 쪽쪽 빨기도 했다. 짭짤했다. 이게 무슨, 거의 전쟁고아처럼 느껴지겠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원래 아이들은 상상도 못할 괴이한 행동을 하기 마련이 다. 나는 서울 강남에 사는 꼬마애가 자기 코딱지 먹는 것도 보았다.
최근 에너지 절약 TV 광고를 보니, 유명 걸그룹 카라의 구하라가 빨간 내복을 들고 팔짝팔짝 뛰는 장면이 나온다. 정작 자신은 입지 않았더 라. 게다가 에너지 아끼자는 광고에서 구하라는 매우 헐벗었다. 필요한 에너지는 알아서 구하라는 것인가 보다. 예전에 첫 월급을 타면 부모 님께 빨간 내복을 사드렸다. 빨간색이 액을 쫓는 색깔이라 무병장수하 시라는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벌칙’으로 빨간 내 복을 입는 세상이지만 옛날에는 매우 비쌌다더라. 요즘도 빨간 내복이 곧잘 팔린다는데 주변에서 샀다는 사람은 좀체 찾을 수 없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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