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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라찌’ 신공 펼치기

무릎 도가니 빠질 뻔한 스틱 승용차
등록 2013-09-13 17:47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자료

한겨레 자료

지상은 아직 멀었는데 차들은 가파른 언덕 위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멀리 한 점, 지상의 빛이 보였지만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 빛나는 곳에는 돈을 받고 나를 지상으로 보내줄 여인이 있었다. 백화점 주차장 입구의 바가 올라가고 내려갈 때마다 차들은 무심히 움직였지만, 유독 나만은 요만큼 차를 이동시키는데도 바쁘게 손발을 놀려야 했다. 경사도 15%에 육박하는 백화점 달팽이 주차장. 주말이라 지하 3층, 4층, 5층까지 밀려 내려갔다. 거슬러 올라오는 길은 그만큼 길었다. 물색 모르는 외제차 한 대가 내 차 뒤에 바짝 붙었다. “망할. 내 차에다 씹던 껌이라도 붙여놨나.” 혼잣말로 욕은 했다만 당신이 무슨 잘못인가.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는 앞차가 ‘스틱’이라는 걸 모를 뿐이지.

스틱, 그러니까 수동변속, 바로 내 차다. 지금까지 차를 세 대째 쓰고 있는데 모조리 스틱이었다. 남자는 스틱? 뭔가 19금 느낌이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 아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아이가 타고 있어요’처럼 ‘앞차는 스틱이에요’ ‘운전은 손맛이지요’ 이런 스티커라도 붙여놓아야 한단 말인가.

군에 있을 때 업무상 출장을 자주 나갔다. 위관장교 따위한테 배차될 차는 없었다. 그래서 운전면허를 땄다. 첫 실전 운전은 실로 대단했다. 또 출장을 가란다. 연습도 뭣도 없었다. 지방국도와 고속도로를 이용해 대전에서 청주로 내달렸다. 신호 없는 고속도로가 차라리 쉬웠다. 도심에서는 빨간 신호에 걸릴 때마다 시동을 꺼먹었다. 자동변속 오토차량 운전자들은 모르는 비애다. 신호가 바뀌고 1초만 늦게 출발해도 뒤차가 ‘ㅈㄹ’한다는 것을 울면서 깨달았다. 첫날 ‘전투운전’을 하고 나니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옆 차선 운전자를 향해 웃는 얼굴로 욕하는 습관은 이때 생겼다.

운전이 익숙해지니 신은 인간에게 스틱을 주기 위해 팔과 다리를 둘씩 달아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손이 심심하다 하시니 기어스틱이 생겼고, 왼발이 한가하다 하시니 클러치가 달렸다. 손발을 동시에 놀려서 150km를 밟아대니, ‘감각의 확장’은 이렇게 완성되더라.

경사로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신이 아닌 아버지한테 배웠다. 재빨리 ‘반구라찌’(반클러치) 상태에서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를 번갈아 밟아야 한다.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그런 게 있다. 문제는 30cm만 뒤로 밀려도 뒤차와 당구공처럼 들러붙는 지하주차장 통로에 있었다. ‘반구라찌 신공’도 급경사에서 살짝 밀리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아버지는 스틱 운전자들 사이에서 최후에 써야 할 ‘금기’로 알려진 사이드브레이크 올렸다 내리며 반구라찌 신공 펼치기를 알려주셨다. 그런 게 있다. 오토는 모른다.

지금도 스틱 승용차가 일부 출시되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오토 승용차의 출시 비율은 지난해 99%에 달했다고 한다. 추석이다. 고속도로 한번 막혀봐야 클러치 밟다가 무릎 도가니가 빠져나가는 걸 알게 된다. 그래도 왼발, 오른손이 심심하지 않다고? 운전도 결국 손맛이라고? 뭐, 그렇다고 해두자.

김남일 정치부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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