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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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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참사 진상조사, 피해자와 가족들이 중심이다

<한겨레21>-참여연대와 함께 살펴본 미국 9·11 테러,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 산불 등 재난 ‘치유와 회복’
등록 2014-06-27 13:58 수정 2020-05-03 04:27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항해가 시작됐다.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이 고비마다 막힌 길을 뚫어낸 결과다. 지난 5월28일 여야가 세월호 국정조사에 합의하지 못하자 피해자 가족들이 국회에서 밤새 기다리며 세월호 진상 규명 및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을 받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항해가 시작됐다.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이 고비마다 막힌 길을 뚫어낸 결과다. 지난 5월28일 여야가 세월호 국정조사에 합의하지 못하자 피해자 가족들이 국회에서 밤새 기다리며 세월호 진상 규명 및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을 받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세월호가 사고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항해를 떠나고 있다. 첫째, 사고 원인을 밝혀낼 세월호 선원과 청해진해운 임직원의 재판이 시작됐다(6월10일과 20일). 둘째, 진상 규명과 재발방지책 등을 담은 세월호 특별법 초안이 나왔다(6월16일). 셋째, 전문가와 유가족 대표 등이 참여하는 국회 국정조사 예비조사팀(46명)이 꾸려졌다(6월17일).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이 고비마다 막힌 길을 뚫어낸 결과다. “고통스럽지만 살아야 할 이유가 우리에게 있다. 아이들이 왜 갑자기 죽어야 했는지, 바다 속에서 고통받았을 아이들에게 적어도 누가 무엇을 잘못했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줘야 한다. 아이들 앞에서 약속했다.” 세월호 사고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 김병권 위원장의 말이다.

해외에서도 대형 참사의 진상 조사는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중심이었다. 그것이 치유와 회복으로 나아가는 출발선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방문한 아르헨티나 심리사회연구센터 ‘에아티프’(EATIP)의 루실라 에델만 박사(정신과 전문의)는 이렇게 말한다. “집단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길은 ‘진실과 정의’로 통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책임자를 처벌하고 치유를 위한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은 시민단체 ‘참여연대’와 함께 미국·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 재난이 발생했을 때 진상 조사를 어떻게 진행하는지 살펴본다. 피해자들이 그 과정에 어떻게 참여했는지도 취재한다. 진실을 찾아 떠난 세월호의 현재와 미래가 그곳 어딘가에 있어서다.

테러 방지 권고·이행평가 ‘10년 보고서’9·11 테러(미국·2001)

9·11위원회는 2002년 11월27일 설립된다. 이슬람 테러집단 알카에다가 2001년 9월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WTC) 빌딩 등을 공격한 지 14개월 만이었다. 공화당과 민주당 의원 10명으로 꾸려진 위원회에서 직원 80여 명이 활동했다. 편성 예산은 300만달러(약 30억원)였다. 이들은 10개국에서 1200명이 넘는 사람을 만났다. 국가안보 문서 등 관련 자료 250만 쪽을 검토했다. 청문회는 2003년 3월31일~2004년 6월17일 총 12차례, 19일간 열렸다. 첫 청문회의 증인은 생존자와 피해자 가족이었다. 그들은 9·11 사태 이후 변해버린 삶을 이야기했다. 이후 조지 부시 대통령, 딕 체니 부통령, 콜린 파월 국무장관 등 고위 공무원이 줄줄이 증언석에 앉았다. 공식 누리집(www.9-11commission.gov)에 청문회 속기록과 녹취파일, 보고서 등이 게재돼 있지만 부시 대통령 등 일부 인사의 증언은 비공개로 처리했다.

조사 결과는 20개월 뒤인 2004년 7월에 보고됐다. 결론은 ‘상상력의 실패’였다. “테러 공격 위험이 높아지는데 미국 정부가 더 큰 공격이 있을 가능성을 예견하지 못한 게 문제였다.” 제2의 9·11 테러를 막기 위한 41가지 권고를 냈다. △경찰, 소방관 등 초동대응 요원이 사용하는 비상 무선주파수 확보 △테러 취약 도시·분야 예산 편성 △국가테러방지센터 신설 △연방수사국(FBI)의 국가안보 인력 증강 등이다. 2011년에는 권고사항이 얼마나 잘 이행되는지 평가하는 ‘10년 보고서’가 나왔다.

위원회는 빛과 그림자를 남겼다. 대통령·부통령을 청문회 증인석에 앉혔지만 위원회가 너무 늦게 구성됐고 조사 기간이 턱없이 짧았다. 예산도 부족했다. 9·11위원회를 설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피해자 가족대책위원회는 “수많은 의혹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평가한다.

“계획의 실패이자 리더십의 실패”허리케인 카트리나(미국·2005)

2005년 8월23~30일 미국 남부 지역에 시속 250km의 강풍이 몰아쳤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다.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는 도시 의 80%가 물에 잠기는 피해를 입었다. 사망자가 1836명, 실종자가 135명 발생했다. 300만 명이 전기를 공급받지 못했고 피해액은 1080억달러에 달했다. 정부가 재난 대응 강화 방안을 발표했지만 미 의회가 미흡하다고 퇴짜를 놨다. 대신 ‘포스트 카트리나 법’이라 불리는 재난관리개혁법안을 독자적으로 통과시켰다. 그 법안의 토대를 국회 카트리나 진상조사위원회가 놓았다.

위원회는 2005년 9월 구성돼 2006년 2월에 최종 보고서를 냈다(katrina.house.gov). 위원회가 던진 질문은 명확했다. ‘사태를 파악하는 데 왜 시간이 오래 걸렸고 그것도 불명확했는가?’ ‘가장 취약한 집단이 왜 빨리 대피하지 못했는가?’ ‘구호물자와 장비, 지원은 왜 늦게 도착했는가?’ ‘근거 없는 소문과 무비판적으로 반복되는 언론 보도가 어떻게 대응을 방해하는가?’ 답을 찾아서 위원회는 50만 쪽에 달하는 자료를 검토하고 현장방문, 청문회 등을 했다. 결론은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는 계획의 실패이자 리더십의 실패’였다.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안전 예산을 지속적으로 삭감했다. 재난관리청을 국토안보부 산하로 편입해 사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게 주요 원인이다.” 카트리나위원회는 9·11위원회와 마찬가지로 국회의원으로만 구성됐다는 태생적 한계를 드러냈다. 재난 대응에서 발견된 문제점, 그 책임 소재를 가려내지 못했다.

청문회 과정 누리집 통해 생방송 중계빅토리아 산불(오스트레일리아·2009)

2009년 2월7일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주에서 600건의 산불이 일어났다. 10년간 이어진 가뭄과 일주일 넘게 지속된 이상고온 현상이 원인이었다. 토요일이던 이날 하루 건물 3500채가 불탔고, 173명이 목숨을 잃었다. 2200만 인구의 나라에 유례없는 참사였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이날을 ‘블랙새터데이’라고 부른다.

화재 원인을 조사하기 위한 빅토리아 산불 왕립위원회는 사고 발생 9일 만인 2월16일에 설립된다. 위원회는 3명으로 꾸려졌다. 위원장은 20년 이상 대법관을 맡은 형법·민법 전문가였다. 나머지 2명은 베테랑 공무원이었다. 이들은 14개 산불 피해 지역을 돌아다니며 주민 1256명과 26차례 간담회를 열었다. 청문회는 155일간 진행됐는데 피해자와 전문가 등 434명이 증인으로 나왔다. 그 모습을 공식 누리집(www.royalcommission.vic.gov.au/Home)에서 생방송했다. 그 외의 과정과 자료도 공개가 원칙이었다. 1차, 2차 보고서는 2009년 8월과 11월에 나왔다. 재난위기관리청의 크리스 콜렛 부청장은 지난 4월29일 캔버라에서 열린 한국언론진흥재단 주관 한국·오스트레일리아 교류 간담회에서 “위원회가 내놓은 조사 결과의 영향력은 컸다”고 했다. “위원회의 권고 사항은 빅토리아주뿐 아니라 다른 주에도 적용됐다. 예산 투자가 확대돼 결과적으로 재난 대응 능력을 향상시켰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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