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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처럼’ 하겠다는 이재명의 다짐

등록 2025-06-13 09:33 수정 2025-06-18 14:05


“똑같은 조선에서 선조는 술 먹고 놀다가 수백만 조선 백성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정조는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노비 자식이라도 실력이 있으면 기회를 줘 동아시아 최대 부흥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6·3 대통령 선거를 일주일여 앞둔 2025년 5월26일 대선 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경기 수원 팔달문 앞 영동시장에서 열린 유세 현장에서 조선시대 정조 임금을 불러냈다. 이 대통령은 “지난 3년 동안 폭력적이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하고 무능한 권력자가 대한민국을 어떻게 망치는지 체감하지 않았나. 한 명의 리더가 실력과 애정이 있느냐에 따라 나라가 망하고 흥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임진왜란 시기 임금인 선조를 12·3 내란 계엄의 수괴인 윤석열에 빗대면서 자신은 ‘탕평책’을 펼쳤던 정조와 같은 훌륭한 리더가 되겠다는 다짐을 담은 연설이었다.

정조는 붕당정치의 폐해가 극심했던 1776년 임금이 됐다. 붕당은 조선 조정의 인사권과 지방 행정까지 장악하면서 당파의 이해에 따라 관직을 배분했다. 개인의 능력보다는 어느 파벌인지가 관직 임용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결과 전반적인 조선의 국정이 부패하고 효율성이 떨어지게 됐고, 고통은 고스란히 백성에게 돌아갔다. 배타적이고 강경한 성향으로 정치적 경쟁자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노론 벽파의 공격과 영조의 외면 속에 아버지(사도세자)를 잃은 정조에게 붕당정치의 폐해는 개인적 트라우마로 남았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중론이다. 정조는 침실 입구에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걸어놓을 정도로 붕당을 해소하기 위한 ‘탕평책’에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당파에 속했는지 상관없이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들을 등용해 왕권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던 영조의 ‘완론탕평’(緩論蕩平)과는 다른 노선을 택했다. 온건하기보다는 주장이 확실한 인재들을 모아 옳고 그름을 명백하게 가리는 적극적인 ‘준론탕평’(峻論蕩平)을 택했다. 아버지를 죽게 한 노론 벽파를 견제하지 않고서는 왕권을 강화하기 어렵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는 자신의 친위 세력인 시파에 의존하면서 구조적인 정치 개혁은 이루지 못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규장각을 설치하고, 서얼 출신도 규장각 관리에 기용하는 등 신분 차별 완화를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는 정조는 실학자 박제가가 개혁안을 담은 ‘북학의’를 지어 올렸음에도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 두려워 개혁안을 채택하지 못했다.

‘국민 통합’을 외치며 당차게 출범한 이재명 정부가 재산 증식 관련 논란에 휩싸인 인사를 등용한 일과 다시 치솟기 시작하는 서울 집값 등을 보면서 정조가 떠오른 건 노파심이기를 바란다. 유세 현장에서 정조를 오마주했어도, 정조의 실패까지 답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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