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숲을 조망하면 놓치는 사실들이 있다. 신발을 고쳐 신고 숲속에 발을 들이면 안다. 마주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 담긴 숲의 깊이와 다채로움을. ‘전체 국회의원 300석 중 집권당인 국민의힘이 108석밖에 얻지 못하고 대패한 선거.’ 2024년 4월10일 치른 총선 결과다. 윤석열 정부의 무능과 일방통행식 국정운영, 해병대 채 상병 수사 외압 등 권력형 범죄 의혹에 대한 심판이었다. 벌써부터 “국정 방향은 옳았다”(4월16일 윤 대통령의 말)는 식의 현실 부정 발언까지 나온다.
<한겨레21>이 2024년 4월15∼16일 △고물가·경제위기의 후폭풍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소상공인, 이번 선거에서 언론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던 △20·30대 여성 △서울 밖 거주자 △진보정당 지지자 △전체 연령대 가운데 가장 큰 비중(31.9%)을 차지하는 60대 이상 노령층까지 5개 집단 시민 유권자 50여 명과 이번 총선 결과를 두고 심층 인터뷰를 했다. ‘당선과 낙선’의 이면에 있는 시민들의 깊고 다채로운 선택 경로를 톺아보려는 시도다. 정치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걱정돼 투표장을 찾았고, 표를 찍었지만 응원하는 마음은 거뒀다. 어쩌면 이 날것 그대로의 분노와 실망 그리고 약간의 기대를 직시하고 추적해야 혐오 정치로 인해 추동되는 정치혐오라는 악순환의 덫에서 벗어날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녹색평론>(격월간 인문잡지)을 오래 구독해서 봤어요. 친환경 농업에 관심이 많아서 그동안 녹색당만 찍었어요. 그런데 윤석열 정권은 사회적경제에 대해 너무 무지하고 관심이 없는 거예요. 이런 정부를 반드시 막아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 민주당을 선택했습니다.”
강원 원주시 면 단위 지역에서 사회적기업을 운영하는 노아무개(남·58)씨의 말이다. 코로나19라는 위기를 견뎌내니 찾아온 물가상승·경기침체와 이에 대한 정부 대응은 이번 총선을 가른 최대 복병이었다. 윤 대통령의 “대파값 875원이면 합리적”이라는 발언이 일파만파 국민적 분노를 산 배경이다. 노씨가 이어서 말했다. “별일 없으면 5년간 지원받는다는 얘기를 듣고 일자리 지원을 받아왔는데, 갑자기 2024년 8월부터는 지원이 끊긴다고 통보받았어요. 이런 시골에서 일자리가 생기는데, 이 정부는 효율성만 따지는 것 같아요”라며 “반도체 기업 등 대기업만 밀어줘서 잘되면 뭐 합니까. 정부가 상생하라, 사회 공헌하라고 압박해서 대기업들이 소상공인과 함께 살도록 해야죠. 거지처럼 무조건 달라는 게 아니잖아요. 내수를 살리고 일자리를 늘리는 길인데, 참….”
서울 마포구에서 20년째 피자집을 운영하는 김아무개(여·62)씨는 이렇게 말했다. “물가가 제일 문제입니다. 치즈가 두 배 이상 올랐고 피망이 1㎏에 2만원 넘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에요. 대파 같은 채소도 2배 이상 올랐고요. 이런 걸 소통해야 하는 대통령(경호실)은 입이나 틀어막고…. 지금 나라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상태가 아니라고 봅니다. 조국혁신당이 큰 지지(비례후보 12명 당선)를 받은 것도 지금의 이런 정부를 갈아엎어야 한다는 공감대 때문이겠죠.”
여권에 투표했어도 정부에 대한 불만은 상당했다. 서울 금천구에서 의류제조업을 운영하는 윤석봉(남·70)씨가 목소리를 높였다. “김준혁 후보(민주당 수원정)의 ‘이대생 성상납’ 발언 하나 때문에 화나서 국민의힘을 뽑았어요. 그래도 여당이 대패할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대통령은 2년간 야당 대표와 대화 한 번 안 하는 불통 대통령이잖아요. 소상공인 입장에선 일거리가 국외로 빠져나가서 계속 줄어듭니다. 정부가 나서서 기업들이 국내에서 일하도록 정책을 내놓고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경기 고양시에서 부동산중개업을 하는 이아무개(남·66)씨도 지역구는 녹색정의당, 비례는 국민의미래를 뽑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정치가 사람을 살게끔 해줘야죠. 요즘은 일자리가 줄어 아르바이트, 식당, 심지어 공사판도 일자리가 없어요. 전부 동맥경화처럼 막혀버린 거죠. 정치가 이걸 해결해야 합니다.”
“의대 증원 문제가 대표적이죠. 윤석열 정부는 정책 집행과 문제 해결 능력이 없는 것 같아요. 바닥 경기는 아이엠에프(외환위기) 때보다 어렵다고들 하는데, 처방이 전혀 안 보여요. 전 정부 탓만 하고 실력이 없어요. 이재명 때려잡기가 우리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경기 고양시에서 자영업을 하는 박아무개(남·51)씨가 말했다.
윤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정치에 대한 불신과 불만은 투표소로 가는 길을 막아나서기도 한다. 서울 은평구에서 출판업을 하는 고아무개(여·44)씨는 이번에 처음으로 투표를 포기했다. “민주당도 국민의힘도 찍기 싫어서 패스했어요. 약간 정치혐오가 생겼어요. 민주당 공천을 보고 환멸을 느꼈어요. 국민의힘과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줄곧 찍어왔던 정의당은 정책도 없고, 내세울 인물도 없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하고 있는지도 회의적이에요. 종잇값이 최근 30∼50% 올라서 책값을 올릴 수밖에 없고, 그러니 독자는 책을 안 사보고, 악순환이죠. 희망이 없어요.”
“대구에서 47년 살면서 ‘박정희 대통령 없었으면 대구는 거지 동네 아이가’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무조건 국민의힘을 뽑자는 정서가 강하죠.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 바뀔 줄 알았습니다. 주변의 젊은 사람들은 ‘이제 대구도 바꿔야 하지 않겠나’라는 분위기였거든요. 투표소 앞에서 1번(민주당)·9번(조국혁신당) 뽑았다고 인증샷 올리는 친구도 많았고요. 개표 결과 보고 체감한 거랑 너무 달라서 깜짝 놀랐어요.” 대구 달서구에 사는 류재욱(남·47)씨가 말했다.
이번 총선에서 대구·경북 지역은 국민의힘이 25개 지역구를 싹쓸이했다. “야권이 대세를 잡았으니 대한민국 정치를 한번 깨끗하게 해봤으면 좋겠어요. 다 까놓고 깨끗한지 안 그런지 제대로 기준을 정해 심판했으면 좋겠어요. 언제까지 ‘그놈이 그놈인데 덜 지저분한 놈 뽑자’는 식으로 선거해야 합니까.” 류씨가 말했다. 같은 지역에 살며 국민의힘에 투표한 남희정(여·43)씨도 “지금까지 선거에서 어느 당 후보도 잘해왔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나온 사람들 보고 ‘최악은 아니었으면’이라고 생각하고 뽑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며 에둘러 이렇게 말했다. “정치인들이 민생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피부에 와닿은 적은 별로 없었어요. 출생률 대책 같은 것도 이게 정치권에서 대책을 세운다고 될 문제일까 생각도 들고요. 정치인들은 뭔가 잘못했을 때 뚜렷한 해명 없이 그냥 넘어갈 때도 잦잖아요.”
전북 전주시에 사는 최명주(여·49)씨는 민주당을 지지하지만 공천을 보고 불만이 생겨 무소속 후보를 뽑았다. “민생을 망가뜨리고, 정치·경제·외교가 실종된 엉망진창 윤석열 정부를 심판하기 위해 민주당 압승을 응원했어요. 하지만 공천 과정에서 지역에서 발로 뛰고 정책을 발굴했던 후보들이 탈락했어요. 중앙당에서 내려온 후보 중 한 분은 지역의 관심사인 대한방직 재개발 건에 대해 ‘동남방직’이라고 하고, 전주를 ‘빛고을’이라고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죠. 지역민의 바람을 외면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이어 “이렇게 뽑힌 지역의 국회의원들은 자연을 보존하기보다 개발을 무조건 옹호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새만금 문제만 놓고 봐도 예산 증액을 요구하며 전북 국회의원들이 삭발했지만(2023년 9월17일), 우습다고 느꼈어요. 케이티엑스(KTX)로도 충분히 오는 곳에 왜 공항이 생겨야 하나요? 갯벌과 환경을 살리자고 주민들을 설득할 깊이 있고 용기 있게 말하는 정치인이 필요해요.” 전남 나주시에 사는 남아무개(남·43)씨는 이렇게 말했다. “민주당 강세 지역이다보니 국민의힘에선 여길 버려진 지역으로 취급하고, 안 될 거 같은 사람을 후보로 내세운 것 같아요. 대통령이 ‘김건희 명품백’ ‘이종섭 호주대사 임명’ ‘대파값’ 등 여당에서조차 당황스러워하는 일을 벌이니까 ‘윤석열 심판론’이 거세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세월이 흘러도 지역주의가 여전히 득세한다는 점도 비수도권 유권자의 무력감을 가중시키는 원인이다. 경남 밀양에 사는 조아무개(남·35)씨가 말했다. “저는 어릴 때 지역에 따른 정치성향은 옛날 세대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흘러도 지역색은 없어지지 않는 것 같아요. 서울의 한 개 지역구를 다닌 것과 4개 시·군을 합쳐서 돌아다녀야 하는 곳의 차이는 큰 것 같아요. 이것도 일종의 수도권 중심주의의 폐해라고 봅니다. 수도권의 입김은 세지고 언론의 주목을 받고 지역은 결국 소멸하겠죠.”
서울 중심 선거운동과 언론보도, ‘정권심판’ 등 대형 이슈 중심의 선거 구도에서 농민 등 지역에만 있는 계층의 박탈감도 심각하다. 충북 청주에서 농사짓는 임종래(남·62)씨는 “윤석열 대통령이 처음 양곡관리법에 거부권을 행사할 때 충격이 컸다. 기후위기 시대 식량 안보 문제도 그렇고,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인 기초농산물 관련 법안을 이렇게 손쉽게 거부하는 걸 보면서 ‘(농업과 식량 문제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다’고 느꼈다”며 “이미 농업은 4∼5년째 기후위기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는데 사과값 (폭등) 문제를 대하는 정부 대응에 너무 준비되지 않은 정권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이번 선거에서 정권심판론이 우세했지만 그래서 그 정권을 어떻게 심판할지는 메시지가 없었던 거 아닌가요?” 서울 영등포에 사는 박아무개(여·34)씨가 말했다. “지금껏 진보정당을 지지해왔지만 지난 대선 때 소신투표를 하면 이렇게도(윤석열 당선) 될 수 있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지역구·비례 모두 이번엔 큰 정당(민주당)에 몰아줬죠.” 박씨가 덧붙였다. “위기감을 느꼈어요.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윤 대통령이 거부했을 때였죠. 그런데 그 위기감 때문에 정책이나 인물은 안 보게 되더라고요. 윤석열 정부를 심판한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민주당이 정권심판의 방법론은 제시하지 못한 채 선거가 끝나버린 것 같아요.”
서울 강서구에 사는 정아무개(여·32)씨는 “가장 충격적인 건 이수정 후보(국민의힘 수원정)의 대파 발언이었다”고 했다. 이수정 후보는 선거운동 기간 윤 대통령의 ‘대파 가격 875원’ 발언에 대해 “한 단에 3500원 정도인데 (윤 대통령이) 말한 건 한 뿌리 가격일 것”이라고 무작정 옹호하려 들어 물의를 빚었다. 정씨는 “훌륭한 후보라고 생각했는데, 정당에 속하면 정당 논리에 저렇게까지 매몰되는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다수당이 될 것 같은 민주당을 저지했으면 해서 지역구·비례 모두 국민의힘·국민의미래에 투표했어요. 결과 보고 속상했어요. 대통령이 자신을 내려놓았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이제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만나서 대화했으면 좋겠어요.”
경기 남양주에 사는 이진옥(여·65)씨의 말이다. 60대는 정치에 대한 관심도·기대치가 가장 높은 연령대다. 4월2일 중앙선관위가 발표한 ‘제1차 유권자 의식조사’를 보면 60대 유권자 중 ‘총선에 관심 있다’고 답한 비중은 91.7%로 가장 컸다. 56.8%에 그친 ‘20대 이하’나 77.9%인 30대와 큰 차이를 나타냈다.
관심이 크기 때문일까. 반대 정당에 대한 반감 수위도 높았다. 민주당 지지자로 서울 마포구에 사는 서아무개(남·66)씨는 “우리나라 보수는 순 자기들끼리 사익만 추구한다. 야권 의석이 200석이 안 돼 기분이 언짢다. 자기가 왕인 줄 알고 있는 대통령을 견제하지 못할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반면 국민의힘에 표를 준 김아무개(남·67·부산 수영구)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재명 대표는 국회를 자기 재판을 막기 위한 방탄용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젊은 사람들이 민주당의 포퓰리즘에 넘어간 게 아닐까 걱정입니다. 국민이 싫어한다고 필요한 정책을 안 하면 그건 대통령이 아니죠.”
이번 선거의 최대 변수였던 정권심판론을 놓고 강하게 충돌하는 발언도 나왔다. 서울 강남구에 사는 김아무개(여·65)씨는 “윤 대통령은 대통령이라기엔 너무 부끄럽다. 거부권 무력화가 안 되는 총선 결과가 아쉽다”고 했고, 강서구에 사는 류아무개(남·61)씨는 “윤 대통령은 경제에 무지한 채 자기 고집만 내세웠고, 민생은 피폐해졌다. 전두환 때 같은 독재정치가 돼가는 것 같다”고 했다. 김씨·류씨 모두 지역구는 민주당을, 비례는 조국혁신당을 뽑았다.
반면 강서구에 사는 장원희(여·65)씨는 “윤 대통령은 이해타산 없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이나 국민의힘이 표에 좌우되지 말고 소신대로 꿋꿋하게 헤쳐나갔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이런 지지층의 정서를 반영한 듯, 총선 엿새 뒤인 4월16일 윤 대통령은 총선 결과에 대해 “기본적으로 우리가 추진해왔던 국정 기조나 원칙은 (그대로) 가져가되, 그동안 제기됐던 여러 기술적인 문제는 잘 조화해나가도록 노력하겠다”며 국정운영 기조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정치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지 않는 것도 60대 유권자들의 특징이다. 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강아무개(여·60)씨는 이렇게 말했다. “총선을 계기로 우리 삶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봤으면 합니다. 우리가 버린 쓰레기조차 스스로 해결 못하는 삶이 제대로 된 삶인지, 젊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근본 이유가 무엇인지 함께 고민했으면 해요. 완벽하진 않지만, 정치가 진화한다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많은 유권자가 공통적으로 차선 내지 차악에 투표해야 하는 현재 상황에 대한 답답함·무력감을 호소한다. 단적으로 이번 총선 254개 지역구 가운데 진보정당이 후보를 낸 곳은 15.3%(진보당 21곳, 녹색정의당 17곳, 노동당 1곳)에 불과하다. 지역구 출마자 693명 중 30대는 33명(4.8%), 20대 이하는 4명(0.6%)이다. 여성 후보도 14.0%(97명)밖에 안 됐다. 정치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다른 연령대의 두 사람이 비슷한 제안을 했다.
“지금은 국민 요구가 엄청 다양하잖아요. 그걸 대변하는 당이 두 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우려스럽죠.”(32살 여성 정아무개씨) “노동자·농민을 대변하는 당이나 녹색당 같은 곳도 적어도 한두 석씩은 있어야죠. 국회가 지역 현안을 다루는 곳도 아닌데 선거에선 지역 얘기만 합니다. 다양한 요구가 분출돼 나올 틈이 없는 거죠.”(58살 남성 노아무개씨)
김양진 기자, <한겨레21> 기자 종합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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