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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저항으로 일궈낸 펜의 자유

언론 통제 거부하고 쌓아온 민주주의… 진실 기록자로서의 사명을 되새기며
등록 2025-12-11 22:15 수정 2025-12-13 17:55
1990년 5월15일 정부가 한국방송공사 신임 서기원 사장 임명에 반대하며 농성하던 노조원들을 경찰력을 투입해 강제로 연행하면서 촉발됐던 파업 사태 때, 경찰이 한국방송공사 본관 2층 중앙홀을 봉쇄하고 있다.

1990년 5월15일 정부가 한국방송공사 신임 서기원 사장 임명에 반대하며 농성하던 노조원들을 경찰력을 투입해 강제로 연행하면서 촉발됐던 파업 사태 때, 경찰이 한국방송공사 본관 2층 중앙홀을 봉쇄하고 있다.


“언론이 바로 서야 민주주의도 바로 설 수 있다.”

이 오래된 명제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여정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했지만, 한국 언론은 때로 칼보다 무뎌진 펜으로 독재 권력의 앞잡이 역할을 해왔다. 일제강점기의 관제 언론에서 군사독재 정권하의 통제 언론에 이르기까지, 언론은 사회적 공기라는 책무보다는 권력의 입맛에 맞춘 ‘혀’로 기능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언론이 지켜야 할 원칙은 분명하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스키외는 “자유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언론의 자유 또한 그렇다. 언론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자유가 아니라,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가져야 한다.

한국 언론은 오랫동안 권력의 지침에 따라 움직였고, 이를 거부한 언론사와 기자들은 펜이 꺾이고, 때로는 생존 위협 속에 놓였다. 그럼에도 역사는 증언한다. 언론이 제구실을 다할 때, 민주주의는 한 걸음 나아간다는 것을.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시민들의 피와 땀으로 결실을 일궈낼 수 있었지만, 그 뒤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끝내 세상 밖으로 드러내려 했던 언론인들의 고단한 저항이 있었다.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산소였고, 그 산소는 독재를 넘어서는 길 위에서 언제나 절실했다.

역사가 토머스 제퍼슨은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언론의 존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택이 아닌 필수다. 한국 사회가 경험한 민주화 과정은, 언론 자유가 제도적으로 보장받지 못할 때 어떤 참혹한 대가를 치르는지를 생생히 보여줬다.

오늘날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언론의 책임은 결코 가벼워지지 않았다. 권력과 자본을 견제하고,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진실을 기록하는 일은 시대를 초월한 언론의 사명이다. 민주주의는 한 번의 성취로 완성되지 않는다. 언론이 제구실할 때마다, 민주주의는 새롭게 숨을 쉰다.

그 역사를 다시 한번 뒤돌아본다.

 

1986년 9월9일 권력과 언론이 야합해 국민을 호도해왔던 정부당국의 ‘보도지침’을 폭로 고발한 언론인들이 구속되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기자회견을 열어 ‘보도지침’ 자료를 공개하고 있다.

1986년 9월9일 권력과 언론이 야합해 국민을 호도해왔던 정부당국의 ‘보도지침’을 폭로 고발한 언론인들이 구속되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기자회견을 열어 ‘보도지침’ 자료를 공개하고 있다.


 

1975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대규모 해직 사태와 1980년 언론인 강제 해직의 진상을 따지기 위해 1988년 12월13일 열린 국회 언론청문회에 참석한 (왼쪽부터) 김상만 동아일보 명예회장,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 이종기 중앙일보 사장, 장강재 한국일보 회장이 청문회 시작에 앞서 증인선서를 하고 있다.

1975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대규모 해직 사태와 1980년 언론인 강제 해직의 진상을 따지기 위해 1988년 12월13일 열린 국회 언론청문회에 참석한 (왼쪽부터) 김상만 동아일보 명예회장,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 이종기 중앙일보 사장, 장강재 한국일보 회장이 청문회 시작에 앞서 증인선서를 하고 있다.


 

1975년 ‘3·6운동’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당시 해직 기자들에 대한 원상회복 및 배상 등을 촉구하며 이틀째 밤샘농성을 벌인 조선일보 노조 조합원 150여 명은 1989년 5월17일 서울 중구 태평로 조선일보 편집국에서 제3차 기자조합원 총회를 열었다. 이들은 이날 회사 쪽이 노조의 요구를 공식 거부한 것에 강력히 규탄하고 앞으로의 대응책을 강구하기로 했다. 이 중 50여 명은 이날 총회가 끝난 뒤 조선일보사 1층 로비에서 자정까지 농성을 벌였다.

1975년 ‘3·6운동’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당시 해직 기자들에 대한 원상회복 및 배상 등을 촉구하며 이틀째 밤샘농성을 벌인 조선일보 노조 조합원 150여 명은 1989년 5월17일 서울 중구 태평로 조선일보 편집국에서 제3차 기자조합원 총회를 열었다. 이들은 이날 회사 쪽이 노조의 요구를 공식 거부한 것에 강력히 규탄하고 앞으로의 대응책을 강구하기로 했다. 이 중 50여 명은 이날 총회가 끝난 뒤 조선일보사 1층 로비에서 자정까지 농성을 벌였다.


 

1988년 8월31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국방부 관계자가 같은 달 6일 발생한 국군정보사령부의 대표적인 흑역사이자 국내 불법공작 사례 중 하나인 현역 군인들의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 오홍근 기자 대검 공격이라는 백색테러 사건에 쓰인 칼 3개를 내보이고 있다.

1988년 8월31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국방부 관계자가 같은 달 6일 발생한 국군정보사령부의 대표적인 흑역사이자 국내 불법공작 사례 중 하나인 현역 군인들의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 오홍근 기자 대검 공격이라는 백색테러 사건에 쓰인 칼 3개를 내보이고 있다.


 

1989년 7월12일 아침 7시 국가안전기획부는 수사요원 70여 명과 경찰력 750여 명을 동원해 한겨레신문사 사옥의 철문을 부수고 편집국에 진입했다. 이들은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민권사회부 윤재걸 기자의 개인 서류함을 열고 서경원 의원이 북한 방북 때 찍은 사진과 서 의원 자필 메모지, 서 의원 관련 기사 스크랩 등을 압수했다. 압수수색 과정에서 한겨레신문 기자 등 12명이 경찰에 강제 연행됐다.

1989년 7월12일 아침 7시 국가안전기획부는 수사요원 70여 명과 경찰력 750여 명을 동원해 한겨레신문사 사옥의 철문을 부수고 편집국에 진입했다. 이들은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민권사회부 윤재걸 기자의 개인 서류함을 열고 서경원 의원이 북한 방북 때 찍은 사진과 서 의원 자필 메모지, 서 의원 관련 기사 스크랩 등을 압수했다. 압수수색 과정에서 한겨레신문 기자 등 12명이 경찰에 강제 연행됐다.


 

1988년 12월12일 국회에서 열린 제2차 언론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광표 전 문화공보부 장관이 1981년 설치된 문공부 홍보조정실의 역할과 제5공화국의 언론통제 정책에 대한 질의에 답하고 있다.

1988년 12월12일 국회에서 열린 제2차 언론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광표 전 문화공보부 장관이 1981년 설치된 문공부 홍보조정실의 역할과 제5공화국의 언론통제 정책에 대한 질의에 답하고 있다.


 

1988년 6월24일 오전 8시30분 한국일보 노동조합이 본사 강당에서 비상총회를 열어 25일 오전 9시부터 신문 제작 거부 등 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의하고 있다. 한국일보 노조는 편집권 독립을 포함한 8개 항목에서 회사와 맞섰다. 한국일보 파업은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 언론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1988년 6월24일 오전 8시30분 한국일보 노동조합이 본사 강당에서 비상총회를 열어 25일 오전 9시부터 신문 제작 거부 등 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의하고 있다. 한국일보 노조는 편집권 독립을 포함한 8개 항목에서 회사와 맞섰다. 한국일보 파업은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 언론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1988년 12월12일 문화공보부 홍보담당관들이 언론사 편집 실무진을 주요 접촉 대상으로 분류해서 수시 접촉해 언론계 내부의 자율성까지 침해하는 발언과 정보 유출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이 문공부의 매체조정활동계획서와 활동결과보고서를 통해 알려졌다.

1988년 12월12일 문화공보부 홍보담당관들이 언론사 편집 실무진을 주요 접촉 대상으로 분류해서 수시 접촉해 언론계 내부의 자율성까지 침해하는 발언과 정보 유출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이 문공부의 매체조정활동계획서와 활동결과보고서를 통해 알려졌다.


 

1990년 5월29일 편집권의 기자 공유 명문화와 무노동·무임금 조항 삭제 등을 둘러싸고 회사 쪽과 단체교섭이 결렬됨에 따라 쟁의발생 신고를 낸 동아일보사 노조가 파업 찬반 투표에서 찬성률 88.4%로 파업을 결의하고 있다.

1990년 5월29일 편집권의 기자 공유 명문화와 무노동·무임금 조항 삭제 등을 둘러싸고 회사 쪽과 단체교섭이 결렬됨에 따라 쟁의발생 신고를 낸 동아일보사 노조가 파업 찬반 투표에서 찬성률 88.4%로 파업을 결의하고 있다.


 

1988년 11월29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산하 의문사 유가족협의회 소속 회원들이 조선일보사 로비에서 같은 해 10월27일 사회면 머리기사로 이한열 열사 어머니가 최류탄을 제작한 삼양화학 한영자 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한 사장을 용서했다고 쓴 것이 전혀 사실과 달라 해명기사를 실어줄 것을 요구하며 항의농성을 벌이고 있다.

1988년 11월29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산하 의문사 유가족협의회 소속 회원들이 조선일보사 로비에서 같은 해 10월27일 사회면 머리기사로 이한열 열사 어머니가 최류탄을 제작한 삼양화학 한영자 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한 사장을 용서했다고 쓴 것이 전혀 사실과 달라 해명기사를 실어줄 것을 요구하며 항의농성을 벌이고 있다.


사진 한겨레 자료·글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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