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유언이 9년 만에 이뤄진 날, 묘비를 세운 송죽회 회원들이 묘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1980년 5월24일 오전, 서울구치소 사형장에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는 “나는 국민을 위해 할 일을 하고 갑니다”였다.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 발생 7개월 만의 일이었다. 김 전 부장은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 미수 혐의로 사형이 집행됐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1989년 2월24일. 마침 이날은 김대중·이희성씨에 대한 증인신문으로 시작된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청문회가 막을 내린 날이기도 했다.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삼성공원묘지 안 김 전 부장이 잠든 무덤에는 제대로 된 비석이 없었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산길은 진흙탕이 되었고, 묘지 가장 안쪽에 있는 그의 묘소에 이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날 김 전 부장의 비석을 옮기기 위해 동원된 경운기는 진흙에 빠져 연신 헛바퀴를 돌았다.
결국 인부들과 함께 이날 행사를 준비한 광주·전남 지역 재야인사들의 모임인 ‘송죽회’ 회원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송죽회는 유신철폐운동에 앞장섰던 이들의 모임이다. 여러 차례 실패 끝에 이들은 묘비를 어깨에 메고 직접 산길을 올라가기로 결단했다. 그들은 해가 질 무렵에야 마침내 묘소에 도착해 비석을 세울 수 있었다. 비석에는 김 전 부장의 유언대로 ‘의사 김재규 장군추모비’(義士 金載圭 將軍 追慕碑)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하지만 이후 이 묘비는 누군가에 의해 ‘의사’와 ‘장군’ 네 글자가 정으로 심하게 훼손당했다.
민주화가 되면 비석을 세워달라는 유언은 9년 만에 이뤄졌지만, 그 의미는 여전히 논쟁과 상처 속에 남아 있다.
사진 한겨레 자료·글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며칠 전 내린 눈과 비로 진흙탕이 된 산길에서 비석을 실은 경운기가 연신 헛바퀴를 돌자, 참석자들이 함께 경운기를 밀고 있다.

경운기가 한계에 다다르자 송죽회 회원들과 인부들이 직접 비석을 어깨에 메고 산길을 오르고 있다.

송죽회 회원들과 인부들이 마지막으로 힘을 모아 비석의 머리를 올리고 있다.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저는 먼저 갑니다”라는 김재규의 유언처럼, 참석자들이 그의 비석을 세우고 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사형 집행 뒤 9년 만에 비석이 세워지는 날, 송죽회 회원들이 묘소 앞에서 비석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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