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들은 보통 소수의 제한된 독자를 상대로 글을 쓴다. 복잡한 수식과 그래프로 가득해 대중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암호와도 같은 논문을 써서 학술지에 투고하면, 심사자들이 꼼꼼한 심사 과정을 통해 논문의 독창성과 정합성을 판정하고, 경제학 연구자들은 이 과정을 통과한 논문을 읽으며 무언가를 배우고 새로운 논문 주제를 찾아 낸다. 이렇게 생산된 논문 중에는 전세계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으며 경제학의 연구 방향을 바꾸고 후대에도 계속 인용되는 걸작도 있지만, 몇 년을 들여 준비한 것임에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잊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경제학과는 거리가 먼 대중을 상대로 큰 성공을 거둔 몇몇 경제학자들도 있다. 20세기 중·후반의 경제학을 이끈 대표적 인물들인 폴 새뮤얼슨(1915~2009)과 밀턴 프리드먼(1912~2006)은 시사주간지 에 오랜 기간 칼럼을 연재하며 각각 케인스주의의 입장과 보수주의의 입장에 서서 대중의 마음을 얻는 데도 성공했다.
폴 크루그먼의 의료 관련 칼럼 논란당대의 경제학자 중 이런 인물로는 단연 폴 크루그먼(1953∼)이 있다. 그는 공간적 경제활동과 국제무역에 대한 경제학 전반의 인식을 확장시켰다는 공로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지만, 의 대표적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2000년부터 연재를 시작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려 750편을 실었다고 한다. 철저하게 진보적 입장에 선 크루그먼의 칼럼은 종종 미국 사회에 만만치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그중 하나가 의료비용 절감 방안에 관한 칼럼이었다. 미국은 선진국들 중 의료비 지출 비중이 유독 높은 나라인데, 이 문제를 놓고 공화당은 고령층과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정부가 운영 중인 메디케어나 메디케이드 같은 의료보장 프로그램에 좀더 많은 소비자 선택의 원리를 도입함으로써 치솟는 의료비를 절감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요컨대 의료 분야에 상업적 시장 거래 원리를 더 많이 확대해서 의사들이 의료 소비자를 대상으로 가격과 품질 경쟁을 벌이고 환자들이 비용을 자기가 부담한다는 원칙 아래 선택권을 늘리게 되면 의료비용 또한 자연스럽게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크루그먼은 환자와 의사의 관계란 공급자와 수요자의 관계라기보다는 성직자와 신자의 관계에 가깝다며, 환자를 ‘소비자’로, 의료를 단순히 금전적 거래로 보는 게 대단히 위험하다는 반론을 펼쳤다. 의료란 삶과 죽음이 걸려 있는 심각한 결정이 따르는 영역으로, 이 결정을 제대로 내리려면 방대한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다. 더욱이 이러한 결정은 환자의 즉각적인 행동이 요구되는 심각한 상황에서 내려져야 하는 경우도 많다.
크루그먼에 따르면,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시장 원리가 아니라 의료 윤리다. 의사가 전통적으로 특별한 존재로 간주되고 평균적인 전문직 종사자에 비해 높은 기준에 따라 행동하도록 기대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크루그먼은 의사에게 요구되는 모든 것이 시장 원리에 따라 돈으로 해결될 수 있고, 의사는 단순한 ‘공급자’로서 의료 ‘소비자’에게 서비스를 판매하면 된다는 발상 자체가 역겹다는 심경도 토로한다. 이러한 종류의 언어가 만연할수록 미국 사회의 의료 문제를 악화시킬 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가치를 훼손할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과도한 환상 지닌 소수의 소란일까의료를 자동차와 같이 보아서는 안 된다는 크루그먼의 ‘도발적’ 주장에 수많은 독자가 뜨거운 관심을 보였고, 마침내 시장주의의 가장 세련된 전도사인 영국의 경제주간지 까지 개입하게 된다. 크루그먼의 칼럼이 실렸던 당시 미국에서는 버락 오바마의 출생지가 미국이 아니라는 억지 주장마저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의 미국 주재기자는 잡지 홈페이지의 블로그에서 이처럼 오바마의 출생을 문제 삼는 사람들과 시장을 문제 삼는 크루그먼의 행태가 비슷하다며 이 경제학자의 정신 상태를 진단한다. 그는 환자를 의사들로부터 의료 서비스를 구매하는 소비자로 보는 게 경제학의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미국의 의료가 사회주의의 관료적 규율 대신 금전적 연계의 시장 규율에 기반했다면 의료비 지출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까지 치솟지는 않았을 거라고 주장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크루그먼이 상업적 거래에 대해 병적인 결벽증을 보인다고 주장하는 부분이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대중은 무지몽매해서 시장의 훌륭한 자원배분 기능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럴수록 경제학자들은 시장 원리가 사람들의 삶에 많이 도입될수록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진리를 설명해주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최고의 경제학자라는 크루그먼이 대중의 무지를 일깨우고 계몽하는 대신 시장에 대한 대중의 오해를 강화하는 ‘사회학자’와 같이 행동하는 것은 과도한 정치적 신념이 ‘경제학자’로서의 정체성을 압도한 결과라는 진단을 내린다.
이 글이 실린 홈페이지의 ‘데모크라시 인 아메리카’(Democracy in America) 블로그에는 많은 댓글이 달렸다. 이 잡지 독자의 특성상 시장에 대해 호의적인 사람이 다수일 것임에도 기자의 글에 공감하는 쪽보다는 비판하는 쪽이 더 많았다. 결국 의 다른 미국 주재기자가 동료의 한계를 비판하는 글을 같은 블로그에 싣기도 했다.
그렇다면 사회 곳곳에 시장 원리가 더 많이 스며들수록 우리 삶도 나아질 것이라는 주장은 시장에 대한 과도한 환상을 지닌 소수의 소란 정도로 치부해도 좋은 것일까? 안타깝게도 오늘날 경제학자들의 다수는 크루그먼이 아니라 기자 쪽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제부턴가 경제학자들은 우리 시대의 신학자가 되어 시장이 모든 문제의 해법이라고 믿고 이를 강요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들은 ‘민간은 선이고 정부는 악’이라는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를 경제학의 핵심 원리로 믿고, 의료보장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민간 영역을 확대하라, 학생들의 학업능력을 높이려면 교육 분야에도 시장원리를 확대해야 한다, 지진 발생으로 긴급 구호가 필요하다면 월마트와 계약을 하라는 등의 주장을 경제학의 이름으로 제안하고 있다.
과거의 초심을 회복하는 일그러나 경제학이 하나의 과학으로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자본과의 유착 속에서 자유시장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선험적 선언을 내리는 대신 시장의 구체적 작동 방식에 대한 지식을 확장하는 데 몰두했던 과거 많은 경제학자들의 진지한 지적 탐구 덕분이었다. 도발적으로 보이는 크루그먼의 칼럼도 사실은 50년 전에 이루어졌던 또 다른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케네스 애로의 독창적 연구를 대중적 언어로 옮긴 것이다. 예전의 경제학자들에게는 시장의 구체적 조건에 대한 세밀한 연구를 바탕으로 사회적 발언을 하는 게 당연한 직업윤리였다. 경제학이 시장과 정부 사이에서, 개인의 선택과 공공의 가치 사이에서, 인센티브에 대한 존중과 공정을 향한 열망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 사회 발전에 진정으로 기여할 수 있으려면 그 첫걸음은 과거의 초심을 회복하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박종현 경남과학기술대 산업경제학과 교수
*‘이코노미피아’는 이코노미+유토피아의 합성어로 좋은 사회를 위한 경제학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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