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금융위기가 본격화되면서 세계적 인 금융기관들이 줄줄이 무너졌다. 대공황 보다 더 무서운 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는 상 황이었다. 결국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 제도이사회(연준)가 양적완화, 곧 돈을 찍어 내 금융기관이 보유한 국채 등 유가증권을 매입하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발등의 불을 겨우 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양적 완화에 대한 의심의 눈길도 적지 않았다. 많 은 이들이 돈을 찍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 은 무언가 정당하지 않다거나 부도덕하다는 모종의 본능적 반감을 토로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양적완화에 의혹의 눈길을 던진 것 은 시중의 장삼이사들만이 아니었다. 금융 문제의 전문가인 경제학자들도 이 대열에 동 참했다. 이들이 양적완화에 처음부터 반대 했던 건 아니다. 애초 양적완화 정책은 금융 권의 연쇄도산을 막기 위한 한시적인 긴급 개입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공화당의 반 대로 ‘재정정책의 확대를 통한 경기회복’이라 는 기본 전략에 차질이 빚어지자, 양적완화 의 연장이라는 방식으로 경기회복의 총대를 연준이 메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양 적완화로 1조달러까지 늘어났던 금융기관들 의 준비금 규모가 더 커졌다. 양적완화를 중 단하지 않으면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경제학자들의 목소리가 본격화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은행권의 준비금이 엄청나게 늘어났으므로 이 돈이 대 출을 통해 시중에 풀리면 그냥 인플레이션 도 아니고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우려하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인플레이션은 떨어졌다. 은행권에 막대한 자 금이 제공됐음에도 이 돈이 대출 등을 통해 가계나 기업에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패러다임을 21세기 현실에 대입
분명한 사실은 중앙은행이 돈을 많이 찍 는다고 해서 무조건 물가가 상승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인플레이션이란 기본적으 로 가계나 기업의 전반적인 씀씀이가 크게 늘어날 때 비로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렇 다면 왜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이처럼 자명 한 사실을 놓친 것일까? 오늘날 (거시)경제 학계를 이끌면서 양적완화에 대한 반대 흐 름을 주도했던 학자들은 1970년대 이래 통 화와 인플레이션의 관계에 대한 연구로 대가 가 된 사람들이다. 1970년대는 인플레이션 에 대한 기대심리가 만연한 반면, 금융기관 의 연쇄도산 같은 사건은 원천적으로 봉쇄 된 시대였다. 반면 이번의 금융위기는 1970 년대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을 펼친 이유는 1970년대의 경제를 대 상으로 이루어졌던 연구를 오늘날 금융위기 의 상황에 기계적으로 대입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데올로기가 이들의 눈을 흐렸던 점도 있다. 이들은 “인플레이션이란 기본적 으로 화폐적 현상이며 만악의 근원”이라던 밀턴 프리드먼의 충실한 후예로, 그리고 인 플레이션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뼛속 깊이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다. 따라서 돈을 찍어 경기를 회복하겠다는 연준의 양적완화 정책 은 직관적 차원에서 이미 이들의 학문적 업 적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자 사회적 해악으 로 간주됐을 터다. 이들은 또한 시장의 자율 적 조정 능력을 신봉하는 반면, 정부나 중앙 은행을 불신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주장 에서 강조점은 중앙은행의 개입에 더 맞춰 져 있었다. 그로 인해 양적완화와 인플레이 션 사이의 정교한 연결고리에 대한 천착을 소홀히 했을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시장의 본성에 대한, 그리 고 시장 속에서 경제활동을 벌이는 인간의 행동방식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런데 양적 완화에 반대했던 경제학자들 중에는 시장이 불완전하기에 정부의 경제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도 많다. 이들은 정부 개입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공화당 대통령에 의해 현명하고도 신중하게 수행될 때만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이 진영에 속하는 대표적 학자인 존 테일러는 재정적자가 지미 카터 대통령 때 확대됐다고 강변했으나, 재정적자가 실제 커진 것은 로널드 레이건 때였다. 양적완화의 성과를 민주당 정권이 챙기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게 이들의 속내일 터이다.
월가의 불만, 버냉키 인신공격으로 확대
양적완화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또 다른 집단으로는 월가의 금융전문가들도 있다. 경제학자들이 주로 인플레이션 문제에 주목했다면, 이들은 저금리 문제를 부각시켰다. 세계적 채권운용사인 핌코의 빌 그로스 같은 전문 투자자들에 따르면, 시장논리상 미국의 엄청난 재정적자로 인해 달러화 가치는 폭락하고 국채의 유통수익률은 폭등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던 것은 연준이 국채를 무차별 매입해 금리를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했기 때문이라는 게다. 그러나 금융위기 이후 국채 금리가 극히 낮은 수준을 유지하는 것은 연준의 양적완화 때문이 아니라 시장의 특수한 여건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오늘날 저금리의 진정한 원인은 불확실성이 대단히 높은 상황에서 사람들이 미래를 비관적으로 기대하는 데 있다. 이때는 일반적으로 빚을 갚으려는 사람은 많은 반면, 새로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빌리려는 사람은 부족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마땅한 투자처를 찾기 어려워진 투자자들은 낮은 수익률에도 불구하고 안전자산인 국채에 대한 수요를 늘렸으며, 국채 금리는 이로 인해 아주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양적완화에 대한 월가의 불만은 얼마 전부터 벤 버냉키 연준 의장에 대한 인신공격으로까지 확대됐다. 버냉키가 시장을 망쳤고 사회조직을 파괴했으며 서방 문명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노골적인 불만의 이면에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도사리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 월가의 투자자들 중에는 일종의 공매도나 풋옵션 등을 통해 달러화 약세와 국채 수익률 상승 쪽에 베팅을 한 세력이 존재한다. 이들은 시장이 계속 예상과 다른 쪽으로 움직임에 따라 큰 손실을 입었고 그 화풀이를 ‘버냉키 때리기’의 방식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은 펀더멘털을 정확히 알았지만 연준의 반칙 때문에 게임에서 진 것이라는 자기 정당화도 있겠지만, 양적완화에 대한 계속적인 공격을 통해 연준의 정책 기조를 전환시키고 시장의 기대도 바꾸려는 투기꾼의 책략도 함께 있을 법하다.
〈WSJ〉 등 보수 매체의 전폭적 지원
양적완화가 과연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반면 양적완화에 대한 불만에 대해서는 분명한 평가가 가능할 듯싶다. 이 불만은 더 나은 정책 수단을 모색하거나 경제적 진실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게 아니다. 그보다는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의 성격을 지닌다. 그것들은 주류적 패러다임의 이론적 정당성을 지키려는 전술적 공격이거나, 시장은 항상 옳고 정부는 언제나 위험하다는 선험적 가치판단에 따른 이념적 공세이거나,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한 얄팍한 계산이거나, 혹은 특정 정파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정쟁의 도구인 셈이다. 그렇다고 새로운 배움의 기회를 줄 정도로 그 내용이 풍부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대중의 마음을 얻고 만만치 않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WSJ)이나 같은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매체가 이를 조직적으로 전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양적완화에 대한 그동안의 불만이 설득력을 잃으면서 ‘금융 불안정성’에 주목하는 불만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이 불만만큼은 양적완화를 둘러싼 생산적 논쟁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면 다음 연재를 기대하시라.
경남과학기술대 산업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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