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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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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괴물의 위험한 부활

오바마케어 둘러싼 미국 연방정부 폐
쇄는 수구 보수주의 몽상의 현실화…
황색언론과 석유재벌 지원 젖줄로 정
부 해체 원하는 수구파 공화당 장악
등록 2013-10-18 14:35 수정 2020-05-03 04:27

이념전쟁이 끊이지 않는 한국처럼 미국에서도 2008년 버락 오바마 집권과 함께 극단적 보수주의의 이념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오늘날 미국 정부는 시민의 자유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으며 특히 오바마케어를 방치하면 시민은 정부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들에 따르면, 이러한 전체주의의 뿌리는 깊다. 18세기 말 ‘건국의 아버지들’에 의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나라가 태어났고 이 속에서 자유로운 시민들이 번영을 누렸지만, 100년 전 대통령을 잘못 뽑으면서 오늘날 미국의 병폐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공산주의 첩자였다”

이들이 주목하는 그 나쁜 대통령이 바로 우드로 윌슨이다.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해 3·1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진 바로 그 인물이다. 그는 빈부 격차가 커지는 상황에서 연방 차원에서 소득세를 도입하고 정부의 힘을 키워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며, 금융 시스템의 안정을 위해 중앙은행을 설립했다. 그러나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은 이를 시민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약한 행동으로 왜곡한다. 여기에 윌슨이 소련 공산주의자들과 내통했다는 혐의도 추가되었는데, 미국 대통령을 공산주의의 앞잡이로 연결하는 발상은 이후 여러 대통령들에까지 확대된다.
그런데 이처럼 미국 역사를 시민과 정부의 투쟁 그리고 정부 지도자들의 반역 행위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는 새롭지 않다. 이미 1960년대에 존버치협회가 이러한 주장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 단체의 설립자인 로버트 웰치는 연방정부가 오래전부터 공산주의자들에게 장악되었다고 믿었으며, 특히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젊은 시절부터 좌익 사상에 포섭돼 공산주의자들의 첩자 노릇을 했다는 엉뚱한 주장을 펼쳤다. 이들의 음모론은 마침내 공산주의조차 로스차일드와 록펠러 가문, 빌더버그 그룹, 대외관계협의회, 삼각위원회의 세계 지배 음모를 관철시키는 퍼즐 조각에 불과했다는 한층 거대한 음모론으로 자가발전한다. 웰치는 이러한 현실 진단 위에 어둠 속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악의 무리를 몰아내고 선한 사람들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는 혁명이 불가피하다고 믿었으며, 이를 위해 존버치협회를 혁명의 전위조직으로 설립했던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들은 조롱과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모든 것을 선과 악의 싸움으로 단순화하고 공산주의와 여러 진보주의들 사이의 다양한 차이를 고려하지 않으며 공공선을 인정하지 않는 극단주의는 보수주의 내부에서도 비판에 직면했고 결국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수구적 보수주의가 왜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우선 농촌 지역, 특히 남부에서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들은 흑인 대통령, 여성 하원의장, 히스패닉 여성 연방대법원 판사, 불법 이민노동자, 동성 결혼 등이 자신의 가치관을 조롱하고 생활 방식을 뒤흔들며 사회·경제적 지위마저 위협한다고 느낀다. 이들은 또한 평소 세금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사람들이다. 미국 사회에 만연한 정경유착이나 금융위기 당시의 막대한 구제금융도 정부에 대한 이들의 불신을 키운 요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구적 보수주의는 그들의 불만과 분노 그리고 무력감을 위로하고 치유해주는 복음과도 같았다. “잘못은 사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당신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뜻을 거스르고 건국자들의 헌법을 어기려는 악의 무리에 있소.” 이 이념은 조세저항을 벌이고 정부에 맞설 명분도 주었다. 이제 수구적 보수주의의 말씀으로 세금을 줄이고 정부의 간섭을 없애려는 모든 시도는 개인적 이익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필요한 일이 된 것이다. 결국 남부의 백인 중산층은 ‘티파티’라는 이름으로 조직화되었으며, 수구적 보수주의는 이 티파티를 통해 화려하게 부활할 채비를 갖춘다.

오바마케어 없애기 위해 정치인이 된 이들

이 수구적 이념이 티파티를 통해 부활하고 현실적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 데는 잊혀졌던 존버치협회를 세상에 다시 알리고 이를 티파티로 연결해준 중개상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의 TV쇼 진행자였던 글렌 벡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루 평균 200만 명이 넘었던 예비 티파티들은 벡의 현란한 방송을 통해 세상의 숨겨진 비밀을 배우며 사회주의자에게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서는 오바마케어를 저지해야만 한다는 확신을 키웠다. 엔터테이너와 교육자의 역할을 동시에 자임했던 그는 티파티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도 선정되었다. 하지만 그는 공포와 증오의 정서에 엉터리 음모론을 버무려 돈과 명성을 얻으려 했던 장사꾼에 불과하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수구적 보수주의가 강력한 현실적 힘으로 부활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돈의 힘에 있었다. 이 점에서 주목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미국 최고의 석유 재벌인 코크 형제다. 찰스 코크와 데이비드 코크는 연간 매출액이 수천억달러에 달하는 ‘코크산업’의 주인이자 정치인을 대본에 의해 연기하는 배우에 불과한 존재로 여겼던 인물이다. 이들은 티파티를 조직화하고 의회로 진출시키며 오바마 정부를 공격하는 데 수억달러의 거금을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티파티는 정경유착을 비판하고 잃어버린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세상을 바꾸겠다고 자임했지만, 이들의 풀뿌리 시민운동은 실제로는 석유재벌의 돈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다고 봐야 한다. 코크 형제는 막대한 자금을 정치권에 투입하는 과정에서 배우를 선택하고 대본의 주제를 결정하고 대사까지도 제공했기 때문이다.
오바마케어를 둘러싸고 최근 전개된 미국의 연방정부 폐쇄 사태는 정부를 뿌리부터 흔들어버리겠다는 존버치협회의 몽상이 현실이 되었음을 웅변한다. 예전에도 예산안을 놓고 힘겨루기가 있었고 연방정부가 폐쇄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연방정부의 폐쇄를 진심으로 원한 정치인은 없었다. 그리고 의회를 통과해 대통령이 사인을 했고 대법원까지 손을 들어준 정책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예산안과 연계해 오바마케어 무력화와 연방정부 폐쇄 중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우격다짐 역시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공화당 하원의 티파티 출신 의원들은 오바마케어를 없애기 위해 정치인이 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연방정부의 폐쇄 또한 바람직한 사건이다.

미국의 쇠락을 가속화할 가능성

오바마 정부와의 타협을 사회주의자에게 나라를 바치는 것과 동일시하고, 다수결과 같은 게임의 룰을 존중하지 않으며, 정부를 송두리째 해체하는 것이 조국을 사랑하는 정치인의 임무라고 믿는 수구적 ‘이념가’들이 공화당을 사실상 장악한 상황에서 사태의 해결은 쉽지 않아 보인다. 공화당 지도부가 국민의 따가운 눈길을 의식해 형식적인 타협을 하더라도 티파티 의원들의 ‘반란’은 내년 선거에서 다수의 심판이 있기 전까지는 되풀이되며 미국의 쇠락을 가속화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한낱 농담거리로 치부되다가 철저하게 잊혀졌던 시대착오적인 함량 미달의 극단적 이념이라도 황색언론의 음모론 장사와 석유재벌의 금권정치를 방치할 경우 공론장의 자정장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음으로써 위험한 괴물로 커질 수 있음을 우리는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박종현 경남과학기술대 산업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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