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역사소설’이라는 장르가 있다. 작가 는 역사적 사실을 뒤틀어 정치가의 암살 시 도가 실패로 돌아갔다거나 전쟁의 승패가 달라졌다는 가상의 현실을 설정하고 상상력 을 한껏 발휘해 ‘올 수도 있었지만 오지 않은 세상’에서의 삶을 그린다. 복거일의 나 필립 K. 딕의 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런데 역사학에도 ‘사 후가정 논증’(Counterfactual Arguments) 이라는 비슷한 방법이 있다. 이는 역사적 사 실을 뒤집는 가정 위에 대안적 가설을 설정 하고, 이로부터 도출되는 상황과 실제의 역 사를 비교함으로써 실제 역사가 지니는 의 미를 판단하는 방법이다. 대체역사소설이 역사적 사실에 ‘만약’이라는 가정을 도입해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가상 의 세상을 거울로 삼아 지금 이곳에서 살아 간다는 것의 의미를 깊이 반추하게 한다면, 사후가정 논증은 역사적 사실들의 인과관 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방법이 역사학 계에 도입된 것은 1960년대였는데, 그 흐름 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로버트 윌리엄 포겔이었다.
“모든 해답은 마르크스에 있다”고 믿어
당시 기성 경제사학자들은 19세기 미국의 경제성장을 이끈 가장 중요한 요인이 철도 라고 믿었다. 포겔은 철도가 경제성장의 원 인이라면, 철도가 없던 ‘다른 세상’(Parallel Universe)을 가정할 경우 경제성장은 크게 둔화될 수밖에 없을 터이니 정말로 그런지 확인해보자고 도전장을 던졌다. 그는 다양 한 종류의 역사적 자료와 문헌을 활용해 운 하나 마차가 철도를 대신하는 상황을 상정 해 국민총생산 손실분을 계산했는데, 그 정 도는 1890년대의 경제성장을 단지 1년 정도 지체시킨 것에 불과했다. 이러한 시도를 계 기로 포겔은 기성 경제사학계의 통념을 뒤집 었을 뿐 아니라 경제사학계에 혁신적 연구방 법을 새롭게 제시했다는 찬사를 받았고, 다 양한 자료와 구체적인 숫자에 대한 통계 분 석에 경제이론을 결합한 그의 고유한 연구 방법은 계량경제사(Cliometrics)라는 새로 운 분과 학문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20대의 포겔은 ‘모든 해답은 마르 크스에 있다’고 믿으며 혁명을 꿈꾸던 청년 이었다. 대학 졸업 뒤에는 가업을 계승하라 는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고 공산당 활동 에 투신했는데, 평생의 동반자인 이니드 카 산드라 모건과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 녀는 그때 할렘의 청소년들을 교육하며 ‘진 보당’의 대통령 후보 헨리 월리스의 선거운 동을 하고 있었다. 포겔은 자본주의의 모순 으로 인해 대공황이 다시 올 것에 대비해 혁 명을 준비하는 바쁜 삶을 보냈다. 그러나 공 황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는 불평등과 불안 정의 원인이 무엇이고 이를 해결할 방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오랜 의문을 풀기 위해 서 른이 넘은 시점에서 만학의 길을 선택한다. 그에게 경제학이란 세상을 정확히 설명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는 새로운 대안이 었던 셈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자리를 경제 학이 대신했지만, 정의와 평등에 관한 갈망 과 진보적 성향은 평생 간직했다. 포겔이 경 제학으로 세상을 과연 바꾸었는지에 대해서 는 해석이 엇갈릴 수 있겠지만 그가 경제사 라는 학문의 세계를 바꾸었다는 점만은 분 명하다. 영국의 한 일간지가 ‘20세기를 만든 1천인’으로 지명하고 스웨덴 한림원이 노벨경 제학상을 수여한 것도 그의 이러한 기여를 입증한다.
“노예제 비효율적이지 않았다” 주장 논란
포겔은 짜인 틀 바깥에서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간 연구자였는데, 미국 역사상 인신 공격을 가장 많이 받은 학자로도 유명했다. 그는 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질 문을 던지는 것이라 믿었고, 일단 제대로 된
물음을 찾아내기만 하면 과거의 현실을 정확히 밝혀줄 자료를 선별해 가공한 뒤 이를 경제이론의 체에 걸러냄으로써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대답이 아니라 자료 스스로가 드러내는 객관적 대답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대답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수정하는 작업이 엄정하게 이루어졌다면, 그렇게 얻어진 결론은 어떤 비난을 받더라도 고수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의 이런 확신은 노예제를 둘러싼 논란에서 잘 확인된다.
포겔은 미국 시카고대학 재직 시절 동료 학자인 스탠리 엥거먼과 함께 쓴 을 통해 노예제가 결코 비효율적인 경제체제가 아니었고, 노예가 죽도록 일만 했다는 통념 또한 잘못됐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쳤다. 포겔의 회고에 따르면, 노예제 연구의 처음 동기는 노예노동이 임금노동에 비해 어느 정도나 비효율적인지를 밝혀보려는 데 있었다. 하지만 자료가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노예가 그들이 생산한 소득의 90%를 받았다거나, 북부의 자유로운 공장 노동자들에 비해 더 잘 먹었던 반면 일은 덜 했다는 등의 예상치 못한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경제학자들로부터는 명성을 탐해 자료를 조작했다는 공격이, 역사학자들로부터는 미국의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난이, 민권운동가들로부터는 노예제를 옹호하는 비열한 인종차별주의자라는 험담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포겔은 이런 발견의 진정한 함의가 세상에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고 맞섰다. 남북전쟁이 없었다면 노예제는 종결되지 않았을 것이며, 이런 사후가정 추론을 통해 링컨으로 대표되는 노예해방론자들의 업적이 얼마나 큰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노예해방운동은 내버려둬도 조만간 사라질 쇠락한 체제가 아니라 부유하고도 강고한 경제적 체제에 맞서 승리를 거둔 것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결론은 노예제는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이어서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워서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시장으로는 노예제를 없애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당시 노예제는 효율적이었고 수익을 낳고 있었거든요. 노예제는 정치적 개입을 통해서만 폐지될 수 있었는데, 이는 미국인들의 윤리가 노예에 반대하는 쪽으로 나아갔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세상의 거센 비난으로부터 포겔이 평정심을 유지하고 자신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내 이니드 카산드라 모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에 이념의 동지로 처음 만난 이니드는 흑인이었다. 포겔은 이니드와 함께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을 뿐 아니라 눈에 띄는 차별과 핍박에도 맞서야 했다. 포겔이 젊은 시절 아내와 함께 인종주의의 편견을 이겨내며 획득했던 강한 정신력과 자기확신은 이후 쏟아졌던 인종주의자라는 혐의를 견뎌낼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포겔의 회고에 따르면, 아내는 가장 믿음직한 후원자이자 가장 신랄한 비판자였으며, 그가 평생 간직한 사회적 양심의 감독관이었다. 2007년, 평생의 동반자 이니드가 59년의 결혼생활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난 지 1년 뒤 포겔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라는 제목으로 회고록을 집필 중이라고 밝혔다.
역사소설보다 더 치밀하고 감동적으로그 작업이 부디 포겔 생전에 완성됐기를 고대해본다. 이 책이 앞으로 출간된다면, 우리는 혁명으로 세상을 바꾸려 한 청년 공산당원과 그가 어렵게 사랑한 흑인 여성의 시선으로 20세기 현대사의 내밀한 부분을 입체적이고도 다채롭게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평생 진보적 색채를 유지했다고 회고한 그가 보수적인 시카고대학에서 대부분의 학자 인생을 보내며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출간 이후 옮긴 하버드대학에 계속 머무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포겔은 살아 숨 쉬는 구체적인 개인들의 복잡다단한 내면과 이들이 맺었을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그 어떤 대체역사소설보다 더 치밀하게 그리고 더 감동적으로 보여준 위대한 전기작가로도 기억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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