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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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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 자기 책임보다 더 중요한 원칙

동양증권 피해자들에게 자기책임 운운하는 경제지와 금융계
힘없는 서민이 아닌 명백한 불완전판매에 책임 물리는 계기 돼야
등록 2013-11-28 13:06 수정 2020-05-03 04:27
동양피해자대책협의회 회원들이 지난 11월21일 오후 서울 성북동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자택 앞에서 동양 기업어음·회사채 투자자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요구사항을 적은 종이를 벽에 붙이고 있다.한겨레 류우종

동양피해자대책협의회 회원들이 지난 11월21일 오후 서울 성북동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자택 앞에서 동양 기업어음·회사채 투자자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요구사항을 적은 종이를 벽에 붙이고 있다.한겨레 류우종

지난해 초, 의 기고문 하나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골드만삭스를 떠나는 이유’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이 글을 쓴 그레그 스미스에 의하면, 골드만삭스가 세계 최고의 금융기관이었던 것은 나보다 동료와 회사를 먼저 생각하고, 고객을 언제나 공정하게 대하려 하며, 정직과 겸손을 중요한 가치로 추구하는 기업문화 덕분이었다. 그런데 고객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끼고, 고객의 존경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던 동료들이 언제부턴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대화의 소재도 멍청한 고객을 어떻게 속여넘겼는지, 그래서 얼마를 벌었는지로 바뀌었단다. 골드만삭스 임직원들이 고객을 봉으로 여기고 있다는 이러한 내부고발은 월가의 거대 금융기관들에 제기된 의혹이 사실이었음을 확인시켜주는 결정적인 ‘한 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당시 소강상태에 놓였던 금융규제의 고삐를 한층 강화하자는 움직임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소유 구조 변화, 골드만삭스 변질 원인

그렇다면 골드만삭스의 문화는 왜 변질된 것일까? 이는 소유 구조의 변화와 관계가 깊다. 예전의 골드만삭스는 소수의 파트너들이 회사의 경영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고, 대신 그 성과 또한 모두 가져가는 합명회사 방식으로 운영됐다. 회사의 경영이 잘못되면 전 재산을 날릴 수도 있는 상황에서 파트너들은 충성도 높은 고객을 회사의 가장 소중한 자산으로 여기며 고객의 재산을 늘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1999년 기업을 공개하고 거래소에 상장을 하면서 경영진의 관심은 영업이익을 최대한 빨리 늘리고 이것이 주가 상승과 배당 증가로 연결되도록 하는 데 쏠리기 시작한다. 경영진들은 무한책임을 지던 파트너의 족쇄를 벗어던짐으로써 회사를 신중하게 경영해야 할 동기를 잃고, 대신 고객의 이익과 충돌하더라도 단기적 실적에 매진해야 할 동기를 새롭게 부여받았다. 골드만삭스는 결국 고객의 주문을 받아 거래를 성사시키던 기존 사업 방식에 더해 회사의 고유 계정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거래를 늘리는 쪽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고객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눈앞의 돈벌이에 치중하게 된다.

이러한 고객의 이익 훼손 문제는 우리 사회의 현안이기도 하다. 동양증권은 올해 들어 신용등급이 낮은 계열사 발행 회사채와 기업어음(CP) 대부분을 떠안아 개인투자자들에게 집중적으로 판매했다. 그런데 이 회사들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투자자들은 최악의 경우 원금을 모두 잃을 상황에 내몰리게 됐다. 대략 5만 명의 개인투자자가 연루됐고, 피해 금액만도 1조6천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증권회사 직원들의 말만 믿다가 평생 모은 재산을 날리게 된 딱한 사정들이 알려졌고, 직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까지 발생했다. 그런데 동양증권은 이번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종합자산관리계좌(CMA) 통장을 통해 나름 잘나가던 회사였다. CMA 통장이란, 은행의 자유입출금 예금통장에 비해 훨씬 높은 금리를 주면서 소액 입출금과 공과금 납부, 신용카드 결제 기능도 제공해주는 예금통장이다. CMA 통장을 계기로 한때 은행에서 증권사로의 자금 이탈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를 주도한 게 바로 동양증권이었다.

이처럼 금융혁신을 주도한 동양증권이 문제의 한가운데 놓이게 된 게 골드만삭스처럼 직원들의 문화가 변질됐기 때문은 아니다. 이번 사태의 일차적 원인은 금융기관이 산업자본의 사금고로 악용될 수 있었던 환경적 요인에 있다. 동양그룹 계열사들의 경영이 악화되자 부도 직전 상황에서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높은 금리로 기업어음을 발행했는데, 같은 계열사 소속인 동양증권이 그 판매를 떠맡게 된다. 문제는 이 기업어음들이 웬만해서는 투자자에게 권유하기 어려운 위험한 금융상품이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직원들이 이를 안전하다며 적극 판매에 나섰고 결국 계열사들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많은 피해자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불완전판매 입증 부담 판매자가 져야

금융기관이 고객의 성향에 맞지 않는 상품을 권유하거나, 해당 상품의 투자 위험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고 투자 권유를 하는 행위를 ‘불완전판매’라고 한다. 불완전판매 행위가 입증될 경우, 해당 금융기관은 상응하는 책임을 지고 피해자는 보상을 받게 된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불완전판매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불완전판매의 원인이 산업자본에 의한 금융자본 지배 속에서 동양증권이 그룹의 사금고로 악용된 데 있었던 점 또한 대부분 동의할 것으로 보인다. 동양그룹의 위험신호가 오래전부터 있었음에도 금융감독원은 위험한 투자상품의 판매를 사실상 방임했던 점에 대해서도 많은 이들의 지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사태와 관련해 피해자 중 절반 이상은 원금 보장이 안 되는 고금리 상품에 투자했던 사람들이므로 자기책임 원칙을 확실히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들은 집단행동에 나선 고객에게 피해를 보상해준다면 경제행위가 정치 논리에 휘둘리는 것이며 이래서는 후진적인 투자문화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원금을 돌려받지 못할 위험을 알고도 연 7% 이상의 고금리를 선택한 투자자라면 원칙적으로는 스스로의 판단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자기책임의 무거움을 지우기 위해 불완전판매의 명백한 희생자들까지 구제하지 않는다면, 이는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이다. 더욱이 이번 동양그룹 사태에서도 피해자는 대부분 힘없는 서민이다. 정보에 능하거나 돈이 많은 사람은 사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이미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이들을 일확천금에 눈먼 사람들이나 무책임한 사람들로 매도하고, 따라서 법의 보호가 필요 없는 사람들로 몰아가는 것은 야만적인 처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태의 재발을 막으려면 무엇보다 불완전판매를 근절시키는 게 필요하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금융 투자 관련 피해가 되풀이되는 것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무분별하고 무지한 투자자 때문이 아니라 그룹 오너의 압력으로 금융기관 직원들이 벌이는 불완전판매 때문이다. 불완전판매가 계속되는 것은 불완전판매로부터 누리는 이익은 아주 큰 반면 부담해야 할 손실은 미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완전판매의 입증 부담을 소비자가 아닌 판매자 쪽이 지는 것으로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 분쟁 발생시 불완전판매가 아니었음을 금융기관이 입증토록 하고, 이를 입증하지 못할 경우 해당 금융기관과 실질적 지배주주가 부담해야 할 과징금이나 보상금 부담을 대폭 늘릴 필요가 있다.

미국, 금융기관 사회적 책임 강화 논의

물론 이처럼 소비자가 아닌 금융기관에 더 많은 부담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금융기관이나 경제신문들은 대단히 부정적이다. 금융기관의 경영난과 시장의 위축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기관의 영향력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미국에서도 금융위기 이후 투자자의 자기책임보다는 금융기관들의 수탁자 책임이나 사회적 책임을 상대적으로 더 중시하는 방향으로 사회적 합의가 진행되는 현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세에는 귀족이 전쟁에 나가면 명망 높고 능력 있는 수탁자가 재산을 대신 관리하고 남겨진 가족을 후견하는 제도가 있었다. 예전의 골드만삭스 또한 고객의 이익을 높여주는 일에서 직업적 자부심을 가졌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 금융기관들도 고객을 위해 최선을 다할 책무를 기꺼이 수용함으로써 중산층과 서민의 진정한 후견인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박종현 경남과학기술대 산업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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