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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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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늙어가는 사회를 꿈꾼 슈타이너와 게젤

투기경제 개혁 위해 매달 돈 가치 떨어지는 ‘노화하는 돈’ 구상
지역통화운동이나 여러 대안적 금융기관들에 큰 영향 끼쳐
등록 2013-07-18 16:08 수정 2020-05-03 04:27

돈은 종종 혈액에 비유된다. 인체의 피가 세포에 ‘산소’를 전달해주는 매개체라면, 사 회 속의 돈은 경제활동을 펼치는 사람들에 게 ‘가치’를 전달해줌으로써 그 활동을 촉진 하는 매개체다. 돈은 경제의 곳곳을 누비며 다양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활동을 도울 때 비로소 본연의 역할을 다하게 된다. 그러나 돈에는 자기증식의 논리가 있다. 자 신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올려놓는 힘 도 있다. 카를 마르크스는 생산의 결과물이 자 생산물의 매개체에 불과하던 돈이 자본 주의 체제와 결합돼 하나의 목적이 되는 과 정을, 그리고 이 속에서 인류가 돈이 돈을 낳 는 (것처럼 보이는) 메커니즘 내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예리하게 보여준 바 있다. 진정한 가치를 낳는 것은 사람들의 다양한 경제적 활동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경제활동을 촉진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돈이 가치의 원천처럼 나타난다. 마르크스의 ‘물신성’ 개 념에는 자본주의 경제의 이런 모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담겨 있다. 물신성이 확대됨 에 따라 자기증식하는 돈의 논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면화되고 금융적 수익을 통해 부를 추구하는 생활양식도 확산된다. 이제 돈은 생산적 활동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돼 경제 현장에서 ‘퇴장’하거나 사람들의 삶이나 진짜 경제와는 무관한 투기적 공간으로 진출 해 자기증식 논리를 더욱 강화한다. 이 과정 에서 돈이 부족해진 진짜 경제는 활동이 위 축되고 실업자가 늘어나며, 돈이 넘쳐나게 된 가상의 투기적 공간은 거품을 부풀린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루돌프 슈타이너(왼쪽)와 독일의 경제학자 실비오 게젤. 이들은 돈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도록 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 돈에 사회적 생명과 수명을 명시적으로 부여해 자기증식 능력을 제한하는 거라고 믿었다.한겨레 자료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루돌프 슈타이너(왼쪽)와 독일의 경제학자 실비오 게젤. 이들은 돈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도록 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 돈에 사회적 생명과 수명을 명시적으로 부여해 자기증식 능력을 제한하는 거라고 믿었다.한겨레 자료

저축 의미 잃고 대규모 투자 불가능

그렇다면 어떻게 돈을 본연의 위치로 돌려 놓을 수 있을까? 위대한 경제학자들은 어떤 답을 제시했을까? 마르크스는 자본이 노동 을 고용해 생산을 주도하고 잉여가치를 최대 한 뽑아가는 상황에서는 단순히 화폐제도를 고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 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역시 돈이 목적의 자 리에서 수단의 자리로 내려와야 한다고 주 장했지만,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는 못 했다. 이 문제에 대한 참신한 해법은 오히려 경제학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내놓았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이자 사회개 혁가이고 신비주의 사상가인 루돌프 슈타이 너(1861∼1925)와 독일의 사업가이자 아나 키스트이고 경제학자인 실비오 게젤(1862∼ 1930)이 바로 그들. 이들은 화폐와 금융의 문제에 동시대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 했다. 그리고 돈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 도록 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란 돈에 사회적 생명과 수명을 명시적으로 부여해 자 기증식 능력을 제한하는 거라고 믿었다. 즉 돈도 인간처럼 태어나고(발행되고), 늙어가 고(가치가 떨어지고), 세상을 떠나도록(가치 가 없어지도록) 함으로써 목적하는 바를 이 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기본 발상은 이른바 ‘화폐 노화법’ 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법은 돈의 가치 가 예컨대 매달 10%씩 떨어지도록 규정한 다. 그러니까 신권 10만원은 한 달이 지나면 9만원으로, 두 달이 지나면 8만원으로 그 가치가 계속 떨어지며, 열 달이 지나면 0원 이 된다. 이 법이 적용되는 세상에서는 시간 이 흐를수록 돈이 노화해 그 가치가 줄어들 고, 수명 또한 10개월로 제한되는 것이다. 이 런 상황에서 우리가 하루 일하고 거래 상대 방에게 신권 10만원을 받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제 이 돈을 투자해 더 많은 돈 으로 돌려받는다는 발상이 사라질 터이다. 그리고 외식을 하거나 문화생활을 늘리거나 집수리 등을 해서 새로 생긴 돈의 구매력이 줄어들기 전에 최대한 빨리 써버리려 할 것 이다. 이처럼 돈이 퇴장하지 않고 ‘진짜 경제’ 내에 계속 돌면서 빠른 속도로 경제활동을 매개하게 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곳’의 경제도 좋아지고 사람들의 다양한 창조적 활동도 늘어날 게다. 물론 세상에 ‘노화하는 돈’ ‘감가하는 돈’만 있다면 저축이 의미를 잃을 테고 많은 자금이 은행에 모일 수 없게 돼 대규모 투자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슈타이너와 게젤이 전국적 차원에서 발행·운영하는 전통적 통화 부문과 돈의 노화 원리에 기반해 지역마다 자율적으로 발행·운영하는 대안적 통화 부문이 공존하는 이원화된 화폐 시스템을 제안한 것도 이런 사정을 고려해서였다.

‘슈타이너와 전쟁’ 선포한 나치

화폐 문제에 대한 이들의 도발적인 해법은 현실에서 수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의 작업, 특히 슈타이너가 주도한 사회개혁운동은 1920년대 중부 유럽에서 마르크스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의미 있는 정치적 대안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나치 정권은 ‘슈타이너(주의)와의 전쟁’까지 선포하며 여러 차례에 걸쳐 그의 암살을 시도했고, 슈타이너는 결국 스위스로 망명한다. 독일과 소련 정권은 이들의 저서를 금서로 취급해 불태우기까지 했지만, 이들의 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개혁을 모색하는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재조명됐고 이후 신좌파운동과 녹색운동의 물결이 일면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된다. 슈타이너와 게젤 사이에는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사실상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해법 또한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독일 관념론이라는 공동의 지적 전통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당시 유럽 좌파의 지배적 흐름은 생산의 중요성과 노동계급의 해방적 역할을 강조하며 체제를 근본적으로 전복하는 혁명을 지향한 마르크스주의였다. 그러나 슈타이너와 게젤의 작업은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등 높은 구체성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이론의 체계성을 중시하고 거대 담론에 치중한 마르크스주의나 오스트리아학파에서는 찾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 슈타이너는 정치·경제·문화의 세 부문이 독자적 영역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협력하며 창조적 삶을 꽃피우는 다차원적 사회를 지향한 ‘삼중 구조화 운동’을 이끌었다. 게젤은 개인의 능력에 기반한 자율적인 지역화폐 및 경제 시스템을 세우려는 ‘자유경제운동’을 주도했다. 그리고 보유 재산과 각자의 필요에 따라 금리와 지대에 차이를 둠으로써 부자와 빈자의 차이를 좁히는 세상을 꿈꿨다. 이들의 사상은 철학이나 경제학에서는 주요한 학파로 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휴머니즘과 사회정의의 이상으로 돈과 금융의 냉혹한 현실주의를 감화시킴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열어가려는 실천가들에게 대단히 유용한 지적 자양분을 제공했다.

돈과 경제와 사회의 관계

수십 년 동안 더디지만 꾸준히 확산되고 있는 지역통화운동이나 여러 대안적 금융기관들의 새로운 실험은 슈타이너와 게젤의 작업에 크게 빚지고 있다(대안적 금융기관들이 이들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어떻게 구현하고 있으며 전통적 금융기관과 차별화되는 어떤 비전을 보이는지, 그리고 이들의 사업모델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소개는 다음 기회로 넘길 수밖에 없겠다). 슈타이너와 게젤의 작업이 더 널리 알려진다면, 돈과 경제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사고방식을 바꾸는 데 큰 도움이 될지 모른다. 슈타이너의 사상 중 인지학과 유아교육에 관한 부분은 ‘발도르프 학교’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 의해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유기농법이나 지역통화에 관한 부분은 의 김종철 선생 같은 우리 사회의 눈 밝은 분들이 소개한 바 있다. 그리고 최근에 출간된 는 미하엘 엔데의 마지막 육성을 통해 슈타이너와 게젤의 사상이 지니는 현재적 의의를 들려줄 것이다.

경남과학기술대 산업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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